로마서강해 16차 롬 6:1-14 202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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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강해 16차 롬 6:1-14 2021.1.312021-01-31T14:30:17+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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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 로마서 5장 12-21절을 통해서 몇 가지 주의 교훈을 들었습니다. 다시 한번 정리하고 오늘 읽은 본문을 통하여 주의 음성을 듣겠습니다.

    첫째로, 아담의 후손이므로 죄인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을 어떻게 설득하면 되느냐는 것입니다. 대표성의 원리를 사용해야 것입니다. 즉 대표자의 행동이 구성원에게 영향을 미치는 경우를 예를 들어 설명하면 됩니다. 자녀가 원치 않지만, 부모의 성격과 질병을 타고 납니다. 또한 공동체에서는 자신이 잘못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코로나19도 마찬가지입니다.

    둘째로, 혹자는 아담 이전에 사람이 있었다고 주장하는데, 이를 주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성경이 하나님께서 한 혈통을 인류를 번성하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고(행 17:26), 다른 하나는 만일 아담 이외의 사람이 있다면 예수께서 또 죽으셔야 하는데 그것이 불가하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바울이 아담의 족보와 예수의 족보를 대비하여 말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두 족보를 비교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족보에 있는 것과 아담의 족보에 있는 것은 비교불가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떻게 죄인과 의인을, 사망과 영생을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넷째로, 한 사람 아담과 한 사람 예수가 각각 영향을 미친 것을 통하여 무엇을 깨달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IT의 발전으로 한 사람의 영향력이 그 어느 때보다 큽니다. 따라서 악한 영향력이 아니라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다섯째로, 바울은 많은 사람을 죄인이 되게도 하고, 의인이 되게도 한 결정적인 원인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불순종과 순종입니다. 그렇습니다. 주종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순종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불순종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주인의 뜻대로 살지 않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로마서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로마서 6,7장이 로마서 5장과 8장 사이에 삽입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5장 끝부분과 8장 서두를 바로 연결하여 읽어도 논리적으로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바울은 꼭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6장과 7장을 5장과 8장 사이에 삽입했을까요? 그것은 로마서를 읽는 독자들이 바울이 주장하는 칭의론을 혹 잘못 이해할 수도 있다는 염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주장한 이신득의, 즉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칭의의 교리는 잘못 이해하면 어떻게 주장하는 자들이 나올 수 있을까요?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하는 율법 폐기론자가 나올 수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6:1)고 질문합니다. 바울이 이 질문을 던진 것은 앞서 5장 20절에서 한 말을 곡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20절을 찾아 읽습니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무슨 말입니까? 한마디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큰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더 큰 죄를 지어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에 대하여 어떻게 말합니까? 2을 읽습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한마디로 그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이미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의 은혜로 죄에서 구원을 받았는데 은혜를 더 받기 위해서 죄를 범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은혜를 받은 자가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는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세례를 언급합니다. 여러분은 ‘세례’하면 가장 먼저 무엇이 생각납니까? 아마 물속에 잠겼다가 나오거나 죄가 씻겨지는 것을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세례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에서 세례를 설명하면서 ‘합하여’를 3번, ‘연합’이라는 단어를 2번이나 사용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었기 때문에 결코 죄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크게 두 가지, 즉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한 것과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한 것으로 설명합니다. 먼저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한 것에 대해 말씀을 드립니다. 3절을 다시 읽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바울은 세례를 받을 때 잠시나마 물속에 잠기는 것을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내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즉 세례를 받을 때 물속에 잠기는 것은 옛 사람의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죄가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 죽었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죄 지을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함께 죽었기 때문에 죄 지을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6:6).

    그런데 죄를 짓지 않는 것과 관련하여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만, 우리가 구원받은 후에는 예수께서 죄를 짓지 않도록 우리를 대신하여 일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령께서 우리가 죄를 짓지 않도록 도우십니다. 그러나 전적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짓지 않도록 싸워주시지는 않습니다. 예수께서 죄를 사하신 후에는 죄와의 싸움은 전적으로 우리의 몫으로 남겨두셨습니다. 죄와 싸워 이기느냐 지느냐는 전적으로 우리의 책임입니다. 그래서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날마다 싸워야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말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다음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하는 것에 대해 언급합니다. 4-5절을 다시 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바울은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물속에 잠겼다가 올라오는 것을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에 비교합니다. 즉 예수께서 죽으신 것은 물속에 잠기는 것으로 옛사람이 죽은 것이고, 부활하신 것은 물속에서 올라오는 것으로 새 사람이 된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한 자는 옛사람이 아니라 새사람이므로 더 이상 죄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죄를 짓고 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께서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지만, 그것을 각자의 삶에 온전히 적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삶에 적용하지 않는 믿음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것을 삶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초대교회의 사도들처럼 하면 됩니다(행 5:42).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날마다 가르치고 전하는 훈련을 하면 됩니다. 이렇게 하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께서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려면 무엇보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반복할 때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이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3분복음메시지’를 그토록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로서 죽지 않으면 아무리 3분복음메시지를 암송해도 전도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삶의 변화가 없는데 누가 여러분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믿겠다고 하겠습니까?

     

    바울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기 위해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합니다. 11-13을 다시 읽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먼저 ‘하라’고 명령한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11절의 ‘여길지어다’와 13절의 ‘드리라’입니다. 먼저 11절의 ‘여길지어다’에 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는 헬라어로 ‘로기조마이’라고 하는데 ‘마음에 담다, 생각하다’는 뜻입니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사신 것을 마음에 담아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길지어다’가 로마서에 등장하는 첫 명령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이 명령형 동사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죄에 대해 죽은 자이고 하나님에 대해 산 자라는 것을 마음에 두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할 강제 규정이라는 것입니다. 즉 반드시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죄에 대해 죽었고 하나님에 대해 산 자라는 것을 마음데 두지 않으면 결코 이전의 삶과 전혀 다르게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믿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론적으로만 이해하지, 이것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생각 자체를 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의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함께 죽었고 부활하셨을 때에 우리도 그분과 함께 살아났다는 것을 마음에서 떠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의 몸을 ‘죽을 몸’이라고 말합니다. ‘죽을 몸’은 한계가 있다는 뜻으로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살아 있을 때만 죄를 지을 수 있고 살아있을 때만 하나님께 봉사도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살아있을 동안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13절의 ‘드리라’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12-13을 다시 읽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여기에서 ‘사욕’으로 표현된 원어의 의미는 ‘욕망’이란 뜻입니다. 욕망은 죄를 불러일으키므로 그것이 우리를 지배하도록 허락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습니다. 몸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성령께서 우리를 다스릴 수도 있고 마귀가 다스릴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먼저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먼저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면 마귀에게 주지 않게 됩니다.

    이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합니다. 다시 12절과 13절 상반절을 읽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여기서 바울은 ‘말고’를 두 번 사용합니다.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한마디로 사욕에 순종하므로 자신의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지체는 우리 몸의 각 부분입니다. 따라서 지체를 불의의 무기가 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은 몸의 한 부분이라도 죄를 짓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지난주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몸의 각 지체는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가 아프면 온 몸이 아프듯이 우리의 지체 중 하나가 죄를 지으면 몸 전체가 죄를 짓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지체 중 어느 하나로도 죄를 범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귀와 눈과 손과 발과 생각이 사욕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교회로 출근하는데 길이 너무 많이 막혔습니다. 그런데 옆에 보이는 길이 하나 있어서 그 길로 갔더니 차가 전혀 없어서 평소보다 30분 일찍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빨리 도착하는 길을 발견 후 기뻐하며 계속해서 그 길을 이용하여 출근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아내와 함께 그 길로 출근하는데 아내가 갑자기 “여보, 일방 통행이예요!”라고 외쳤습니다. 그는 그제야 사람들이 왜 이 길을 이용하지 않는지를 알았고, 그동안 자신이 교통법규를 위반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시는 그 길로 갈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길로 다시 가고 싶은 충동이 일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분에게만 일어난 일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도 죄라는 것을 알지만 그것이 주는 잠시의 기쁨과 쾌락 때문에 죄를 범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우리가 고통하며 좌절하고 낙심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에게 아주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본문 14절입니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 바울은 앞서 우리의 몸을 불의의 무기가 아니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우리가 힘써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일견 우리가 노력하지 않아도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는 말로 들립니다. 그래서 다소 헷갈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자는 구원받은 자는 몸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말한 것이고, 후자는 구원받은 자와 죄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말한 것입니다. 즉 과거에는 죄가 요구하면 당연히 그것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는데, 이제는 그 요구를 거절할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말합니까?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고 은혜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과거에는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었는데 이제는 우리가 그렇게 하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몸을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는 것은 어쩔 수 없기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죄에서 자유할 수 있습니다. 개처럼 토했던 것을 도로 먹지 않고, 돼지처럼 누웠던 곳에 다시 눕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의 은혜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가 충만하여 우리의 몸을 의의 무기로만 주님께 드리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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