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성탄메시지(바울을 통해 성탄절을 이해하다) 갈라디아서 4장 4-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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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성탄메시지(바울을 통해 성탄절을 이해하다) 갈라디아서 4장 4-7절2020-12-25T10:13:02+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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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적으로 성탄절 설교는 사복음서 중 마가복음을 제외한 마태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에서 선택합니다. 왜냐하면 마가복음에는 성탄에 관한 기사가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도 지금껏 주로 세 복음서에서 성탄절 관련 구절을 찾아 설교했습니다. 즉 마태와 누가와 요한이 이해한 성탄을 중심으로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바울이 이해한 성탄을 중심으로 메시지를 전하려고 합니다.

    먼저 바울은 때가 차매라고 말합니다. 즉 바울은 성탄을 “때가 차매”(τὸ πλήρωμα τοῦ χρόνου) 이루어진 사건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헬라어로 시간을 나타내는 말에는 chronos(χρόνος)와 kairos(καιρός(롬 13:11; 고후 6:2), 아이온(αιον)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것은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입니다. 크로노스는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물리적 시간으로 수평적이고 객관적인 시간을 뜻하고, 카이로스는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시간으로 수직적이고 주관적인 시간을 뜻합니다. 즉 시계나 달력으로 측정되는 시간은 크로노스이고, 삶이나 역사에 질적인 변화나 의미 있는 시간은 카이로스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때’는 카이로스가 맞을까요? 크로노스가 맞을까요? 언 듯 보면 카이로스처럼 보입니다. 마가도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1:15)라고 했는데 이 경우의 ‘때’도 ‘카이로스’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때’는 ‘카이로스’가 아니라 ‘크로노스’입니다.

    왜 바울은 예수께서 탄생하신 때를 ‘kairos’라고 하지 않고 ‘chronos’라고 했을까요?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신 때를 크로노스냐 카이로스냐로 똑 부러지게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탄은 카이로스가 크로노스를 침투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즉 카이로스와 크로노스를 연결해주는 통합적 사건이 성육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본문에서 ‘때’를 ‘크로노스’라고 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신 것을 말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예수께서 탄생하신 당시의 상황을 말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탄생하셨을 당시 상황은 어떠했습니까? 크게 세 가지가 준비된 상황이었습니다. 첫째로, 로마 제국의 정치적인 통일이 이루어졌습니다. 로마 제국은 역사상 유래없이 강한 대국이 되었고, ‘Pax Romana’(로마의 평화)를 이루었습니다. 특별히 로마로부터 시작한 도로 포장이 제국의 각지로 뻗어나갔기 때문에 안전하고 신속한 교통과 통신이 가능했습니다. 둘째로, 헬레니즘 문화의 통일이 이루어졌습니다. 기원 전 4세기 경부터 알렉산더 대왕이 희랍어를 상용어와 학문적인 언어로 결정했기 때문에 희랍어만 사용할 줄 알면 로마제국 어느 곳에서든지 의사 소통이 가능했습니다. 셋째로, 유대교와 민중의 종교가 기독교 복음 전파의 터전을 마련하였습니다. 당시 로마 세계에 유행했던 민중의 종교는 희랍, 로마의 신화적 종교와 점성술 및 마술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신비 종교였는데 이를 따르던 자들은 영원과 구원을 갈망하는 종교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의 각처에 흩어져 살면서 남자 10명 이상이 모이면 회당을 만들어 유대교의 신앙을 전승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차매’(플레로마 πλήρωμα)는 충만해졌다는 뜻으로 이런 상황이 무르익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예수께서 탄생하신 때는 로마제국의 통일로 사회가 안정되었고 도로가 잘 닦여져 있었고, 언어가 통일되어 있었고, 구원을 갈망하는 종교성과 제국의 곳곳에 회당제도가 준비되었기 때문에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기에 적합한 상황이었기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저는 이번 성탄절 설교를 준비하면서 왜 우리에게 유대인 복음화 비전을 추가해 주셨는지를 다시 한번 깊이 묵상했습니다. 우리가 유대인 복음화 비전을 갖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몇 해 전, 텔아비브 공항에 내려서 걸어가고 있을 때 성령께서 원장님에게 “이들은 내가 메시아인지 모르니 너희가 그들에게 내가 메시아인 것을 전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우리에게 이런 사명을 주셨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사도행전 5장 42절을 통해서 초대교회 전도법을 알아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전도법은 예수님처럼 세 가지 사역, 즉 제자훈련을 통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사도들이 훈련한 대상은 유대인입니다. 즉 초대교회 전도법은 유대인 전도법입니다. 곧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는데 유대인이 돌아오지 아니하면 그 약속은 성취되지 않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이 도로를 닦아서 신속히 다닐 수 있었지만, 지금은 과거보다 항공 기술이 발달되어 있고, 유대인 디아스포라처럼 이미 전 세계에 한국 선교사들이 있어서 그 나라 말을 하지 못해도 제자훈련이 가능하고, 환난을 앞두고 가정교회와 평신도 사역의 필요성이 크게 대두되고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는 이미 2030년까지 12명의 디렉터와 300명의 현지 목회자와 7000명의 현지 평신도사역자를 파송하겠다는 비전을 하나씩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유대인을 복음화하고 그들을 제자훈련하고 비유대인과 함께 복음을 전하면 가장 빠르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기에 우리에게 이런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사명을 주셨기에 반드시 이를 이루게 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때가 차매’ 아들을 보내셨다고 말씀하지만, 헤롯왕 때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을 뿐(마 2:1) 탄생하신 날짜를 알려주지 않습니다. 또 서신서에도 초대 교회 성도들이 성탄절을 지켰다는 기록이 없습니다.1-2세기 초대 교부들의 기록에도 성탄절에 대한 기록을 찾기 어렵습니다. 2세기 중반에나 가서야 예수님의 탄생과 어린 시절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왜 성탄절을 12월 25로 지키고 있을까요? 일반적으로 이교도의 축제일에서 가져왔다는 것이 다수설입니다. 즉 로마인들은 한겨울에 토성을 숭배하는 농신 축제 (Saturnalia)를 가졌는데, 로마 황제 아우렐리아누스(Aurelianus)가 A.D. 274 태양을 고대 로마의 공식적인 신으로 숭배하고 축제(Sol invictus)를 즐겼습니다. 그런데 그날이 바로 12월 25일입니다. 그래서 소수 종파에서는 성탄절이 이방신을 섬기는 데서 나왔기 때문에 이를 지키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A.D. 338년 이방인들이 태양신을 섬기는 축제일을 성탄절로 바꾸는 과정에서 최초로 참 빛이신 예수님을 기념하는 날로 의미를 새롭게 했기때문에 부정적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날 자체보다는 그 날에 무엇을 하느냐가 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톨릭처럼 기원후 A.D. 354부터 12월 25일을 정식 절기로 정하여 지켜오고 있지만, 동방정교회에서는 1월 6일로, 아르메니아인들은 1월 18일을 그들만의 성탄절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바울은 성탄을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아들’에서 ‘그’가 원어에 소유격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아들’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께서 영으로 존재하시는데 육신으로 오신 것을 가리킬 때 그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은 예수께서 마리아의 몸을 통하여 이 세상에 오셨어도 보통 사람처럼 모태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시는 분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신성을 가지신 분, 곧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3절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여기서 말하는 태초는 이 세상의 처음이 아니라 천지창조가 있기 전을 뜻합니다. 그리고 말씀은 예수님을 뜻합니다. 즉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예수님께서 이미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뜻으로 예수께서 곧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세계 4대 성인 중의 한 분이 아니라 이 세상을 말씀 한마디로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 의미를 알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서 인간이 된 자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예수께서 육체를 입으시기 전에 어떻게 존재했는지를 생각하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 방식은 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십니다. 즉 무소무재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시는 순간 한 곳에서만 존재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즉 행동의 제한이 있습니다. 행동이 제한된다는 것은 자유가 제한된다는 것입니다. 자유가 없다는 것은 감옥에 갇힌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신 것은 스스로 감옥에 갇히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코로나19로 마음대로 갈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우울증에 걸리고 여러 가지 불편을 호소합니다. 이렇게 잠시 행동의 자유를 제한당해도 고통스러운데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으니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더군다나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은 당시 로마의 수도도 아니고, 이스라엘의 중심이었던 예루살렘도 아니고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10Km 떨어진 베들레헴이었습니다. 또한 아기 예수께서 뉘이신 곳은 오물 냄새가 진동하는 구유였습니다(눅 2:7). 그리고 얼마되지 않아 애굽으로 피신을 가셔야 했습니다(마 2:13-15). 베들레헴에서 애굽까지는 약 120km입니다. 하루에 40km를 간다고 해서 적어도 3일 걸립니다. 아기가 어미의 품속에 있다 하더라도 먼 길을 간다는 것은 보통 고통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은 고통과 희생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성탄을 맞이하면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기로 새롭게 다짐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만드신 후 그 이후로 사람이 되는 것은 오직 여자의 몸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여자에게서 나셨다는 것은 예수께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분이신데 굳이 여자의 몸을 통해서 이 세상에 오셔야만 하는 이유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죄인이라 다 죽어야 합니다. 우리가 죽지 않는 길은 죄 없는 사람이 우리를 대신하여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아담의 후손으로 죄인이므로 누구를 대신하여 죽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누가 죄인을 위해 대신 죽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친히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탄을 맞이하여 두 번째로 가슴에 새겨야 할 메시지는 희생과 사랑입니다. 진정한 성탄 축하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기 위해 희생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끝으로 성탄의 목적을 살펴보겠습니다. 다시 5을 읽습니다.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율법 아래 나게 하셨다고 말하는데 이는 저주와 심판아래 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이유를 두 가지로 말합니다. 하나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속량은 지난주에 살펴보았듯이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우리를 자유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8:32)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성탄을 맞이하면서 과연 나는 죄에서 자유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의 은혜로 죄에서 벗어났음에도 죄 가운데 살아가면 마귀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개가 그 토하였던 것을 도로 먹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눕는 것과 같습니다.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됩니다. 죄와 싸워 이김으로 죄의 종이 아니라 의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마귀의 종으로 살아가면 저주와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성탄을 맞이하여 죄에서 떠나기로 새롭게 결단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에게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예수께서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이유를 단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기 위해서라고 말하지 않고,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왜 율법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기 위해서라고만 하지 않고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시기 위해서 율법 아래에 나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속량의 의미를 알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방금 말씀드렸듯이 속량이란 몸값을 받고 죄인을 풀어 자유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죄인을 풀어 자유인만 되게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세상이 구조적으로 악하기 때문에 다시 죄를 짓게 되어 죄의 종으로 살아갑니다. 따라서 죄에서 벗어난 자유인이 되었을지라도 죄를 범하지 않도록 보호하고 양육해야 합니다. 어떤 관계에 있어야 죄를 짓지 못하게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부자 관계여야 합니다. 부모만이 자식을 징계하고 훈육하여 바르게 살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단지 속량만 해주시지 않고 우리에게 자녀의 명분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한 이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은 이를 6-7절에서 설명합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4:6-7).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유업은 영원합니다. 즉 이 땅에서 죄에서 자유한 자로 살게 하실 뿐 아니라 장차 천국을 기업으로 받게 하시기 위해서 단지 우리를 속량만 하시지 않고 우리에게 아들의 명분까지 얻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성탄절을 맞이하여 새삼스럽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성탄절을 맞이하여 그리스도의 고통과 희생과 사랑을 깊이 묵상하고, 천국을 유업을 받을 소망을 갖고 죄에서 자유를 얻은 자답게 살아가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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