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발적 고난은 피할 수 있어요 왕상 10"21-29; 11:9-13 20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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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발적 고난은 피할 수 있어요 왕상 10"21-29; 11:9-13 2014.3.22018-12-03T21:15:06+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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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상에서 역사상 가장 부귀와 영화를 누린 사람은 솔로몬 왕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백합화의 영광을 이야기 하시면서 솔로몬의 부귀 영화를 말씀하실 정도로 그의 인생은 눈부시게 찬란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이토록 인생 최고의 영화와 부귀를 누렸지만 전혀 근심과 걱정 없이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의 인생의 후반기에 주변 나라들이 일어나 대적하였기 때문에 늘 고통 가운데 살았습니다. 우리는 부귀와 영화의 대명사인 솔로몬마저 고난 당한 것을 보면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고난은 누구에게나 피할 수 없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즉 고난은 모든 인간에게 숙명적인 것이냐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지만 그렇다는 것입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저주가운데 있기 때문에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늙고, 병들고, 각종 사고를 당하는 등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같이 누구나 당하는 고난을 본래적 고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고난에는 본래적 고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못하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고난을 후발적 고난이라고 합니다. ‘후발적 고난은 우리가 얼마든지 피할 수 있습니다. 즉 운명적인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솔로몬이 왜 후발적 고난을 당했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본문을 중심으로 우리가 왜 후발적 고난을 당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고난을 피할 수 있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번영에서 고난이 비롯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솔로몬은 나이가 어려서 다윗을 이어 왕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움을 얻기 위해 기브온 산당으로 올라가서 일천번제를 드렸습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솔로몬이 천일 동안 매일 번제를 드려서 응답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일천번제의 이름으로 천일을 작정하고 새벽이나 저녁에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드린 일천번제는 천일동안 매일 드린 것이 아니라 한 번에 천 마리의 소를 드린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의 꿈에 나타나셔서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솔로몬은 많은 기도 제목이 있었지만 오직 하나님의 백성들을 잘 다스릴 수 있도록 지혜를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자기 아버지의 원수를 멸해달라고 기도할 줄 알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백성들을 잘 다스릴 수 있도록 지혜를 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셨고 그가 구하지 않은 것까지도 주셔서 인류 역사이래 가장 부귀와 영화를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솔로몬 왕이 누린 부귀와 영화가 어느 정도인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솔로몬의 궁전이 금과 상아와 보석으로 만들어졌고 그가 마시는 그릇은 모두 금이었고 은그릇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은이 너무 흔해 길에 널려져있는 돌처럼 여길 정도였습니다. 그러자 주변 나라에서 이 소문을 듣고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이스라엘로 몰려들었습니다. 특별히 솔로몬 왕을 만나러 온 사람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은 시바여왕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시바여왕은 향료, , , 보석을 솔로몬 왕에게 선물했다고 합니다. 시바여왕은 솔로몬 왕에게 선물을 하고 국빈으로 왕궁에 거하다가 마지막 날 지혜 겨루기를 하였는데, 시바여왕이 질 경우 솔로몬 왕과 동침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바여왕이 져서 동침을 하였고 임신한 채로 고국으로 돌아가서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에디오피아를 1974년까지 지배한 하이레세라시에 황제집안의 시조인 메넬리크 1입니다. 제가 제자의 초청으로 에디오피아 수도인 아디스아바바에 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시내 한 복판에 있는 공공건물의 벽에 그들의 시조 메넬리크 1세가 솔로몬 왕과 시바여왕과의 관계에서 난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아랍지역의 전승에도 나오기 때문에 무조건 허구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부귀와 영화를 누리게 되자 어떻게 변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본문 9절은 솔로몬이 마음을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부귀와 영화를 누리게 되자 스스로 마음을 돌이켰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부귀와 영화를 누리게 되었으면 더욱 더 하나님께 감사하고 순종해야 하는데 오히려 마음을 돌려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에게 일어난 일은 결코 그만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부귀와 영화를 얻게 되면 솔로몬처럼 마음을 돌려 하나님을 떠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이 백성은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를 한다”(호세아 4:7)라고 외친 것입니다. 물론 솔로몬이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부귀와 영화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방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인 것에 기인합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이방여인을 맞아들일 수 있었던 것도 그의 나라가 부요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솔로몬을 보면서 마음에 굳게 결심해야 합니다. 혹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 올리시고 성공을 하게 하실지라도 하나님을 멀리하거나 떠나지 않겠다고 결단해야 합니다. 진짜 인생의 위기는 고난의 때가 아니라 번영의 때입니다. 잘나가는 때가 정말 위험한 때입니다. 사람들은 고난과 번영이 각각 찾아오면 그 상황이 계속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고난의 때에는 절망하고 번영의 때는 교만한 마음을 품고 하나님을 붙잡지 않고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도 잠깐이고 번영도 잠깐임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번영의 때는 곧 닥칠 고난을 준비해야 하고 고난의 때는 곧 번영이 올 것을 바라보고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아굴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언 307-9). 혹 일이 잘되고 있습니까? 그것 때문에 마음이 여호와를 떠나시면 안 됩니다. 그것을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하고 더 주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세상의 부귀와 영화 때문에 하나님과 멀어지므로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고난의 수렁에 빠지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전 반드시 경고하신다는 것입니다. 9-10절 다시 한 번 읽어보십시오. 솔로몬이 마음을 돌이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저에게 진노하시니라 여호와께서 일찍이 두 번이나 저에게 나타나시고 이 일에 대하여 명하사 다른 신을 좇지 말라 하셨으나 저가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심판하시기전 먼저 그에게 두 번씩이나 나타나셔서 다른 신을 좇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솔로몬 왕은 하나님의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먼저는 하닷이라는 사람을 일으켜 대적하게 하여 경고하셨습니다. 하닷은 군대장관 요압이 에돔에서 6개월간 머물면서 에돔 족속 남자들의 씨를 모두 말렸는데 그 때에 살아남은 유일한 어린 남자아이였습니다. 그가 애굽으로 도망갔는데 애굽 왕 바로에게 크게 총애를 입어 궁전에서 자랐습니다. 그가 성년이 되자 바로 왕은 자기 처제를 하닷에게 아내로 주어서 동서지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애굽에서 호강하고 있던 하닷이 폐허로 변해 버린 자기 고국 에돔 땅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합니다. 바로 왕은 하닷을 가지 못하도록 만류하지만 결국은 하닷은 에돔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거기서 군대를 규합하여 솔로몬을 대적하고 그를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것을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경고로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르손을 일으켜 솔로몬을 대적하게 하였습니다. 르손은 소바 사람인데 다윗이 소바 사람들을 격퇴시킬 때에 살아남은 자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마음을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결국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진노를 쏟아 부으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시기전 경고를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경고를 받아들이면 용서해주시지만 하나님의 경고를 계속하여 무시하면 심판하시고 고난의 구렁텅이에 던지십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앗수르와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 고생을 한 것은 하나님께서 수없이 선지자를 보내서 경고하셨음에도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을 투하했습니다. 왜 미국이 일본에 두 개의 원자폭탄을 떨어뜨렸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당시 일본이 강대국들의 경고를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1945726일 독일의 포츠담에서 미국의 트루먼대통령, 영국의 처칠수상, 중화민국의 장제스 총통, 소련 공산당 서기장 스탈린이 정상 회담을 갖고 합의문을 선언하였습니다. 선언의 요지는 일본이 항복하지 않으면, 즉각적이고 완전한 파멸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이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그러자 미국은 나가사키와 히로시마 두 곳에 원자탄을 투하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후발적인 고난을 피하는 길은 계속되는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지 않고 즉시 돌이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을 경고하신 것처럼 우리를 경고하십니다. 때로는 물질의 손실을 통하여, 때로는 자녀의 문제를 통하여, 때로는 질병을 통해서, 때로는 생각지 못한 사고를 통해서 경고하십니다. 이럴 때에 마음을 낮추고 가던 길에서 돌이키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여 고난을 당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다윗도 그랬고, 모세도 그랬고, 바울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잘못한 후에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회개하면 살고,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을 받아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본래적인 고난은 피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경고에 회개하면 후발적인 고난을 얼마든지 피할 수 있습니다. 시편기자는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107:10-11)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받아들이고 회개하여 더 큰 고난을 당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자신의 마음을 낮추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사람은 교만해지면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게 된 것은 당시 세계열방에서 그의 지혜를 들으려고 선물을 싸들고 찾아오자 자신도 모르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마음이 높아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교만하게 되면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의 저서 성공의 적, 교만에서 고집을 교만의 증상 중의 하나라고 말한 것입니다. 고집이란 무엇의 잘잘못과 무관하게 오로지 자기의 주장을 끝까지 내세우는 태도를 일컫습니다. 물론 고집이 세다고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왕고집 때문에 큰일을 행할 수도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고집이 센 사람을 손꼽으라고 하면 영국의 수상을 지낸 윈스턴 처칠을 들 수 있습니다. 시대를 앞서가는 센 고집이 그를 인생의 성공자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확신하고 있는 것이 영원불변한 진리가 아닌 이상 자신의 생각이 옳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인정하고 지나치게 고집을 부리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을 낮추고 또 낮추어야 합니다.

     

       셋째로, 후발적인 고난은 운명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인생이 선택의 연속이듯이 신앙역시 선택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선택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아주 절친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두 친구는 조용한 저녁 강둑을 거닐며 서로의 앞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조금 가다 보니 갈래길이 나왔습니다. 거기서 어느 길로 갈 것인가를 이야기 하다가 어처구니없게 말다툼을 하고 서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한 친구는 자기 말을 듣지 않은 친구를 원망하면서 강둑을 따라 계속 갔습니다. 가다가 길옆의 과수원에 과일이 주렁주렁 달린 것을 보자 갑자기 그 과일을 먹고 싶은 충동이 생겼습니다. 몰래 기어 들어가서 과일을 땄습니다.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먹어 보니 보통 때 먹던 것과는 달리 너무나 맛이 좋았습니다. 그 후 이 친구는 이 일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해서 이제는 과일만이 아니라 이집 저집에 몰래 들어가서 도적질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귀중품을 훔치다가 주인에게 들키자 그만 주인을 죽이고 달아났습니다. 그는 결국 붙잡혀 사형언도를 받고 죽을 날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사형집행을 얼마 앞둔 어느 날, 감옥 안으로 들여진 신문을 한 장 집어 들었습니다. 그런데 신문에 낯익은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 날 헤어졌던 그 친구였습니다. 다른 길로 갔던 친구는 길을 가다가 불이 켜진 교회에 들어갔더니 예배를 드리다가 말씀에 은혜를 받고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날부터 그의 삶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삶은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하여 교수가 되었고, 대학교 총장이 되었고, 하원 의원이 되었고, 다시 상원 의원이 되었다가 급기야는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미국의 20대 대통령이었던 제임스 아브라함 가필드입니다. 갈래길의 선택이 이들의 운명을 갈라놓았던 것입니다. 선택의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별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부모를 선택할 수 없고, 형제를 선택할 수 없습니다. 고난도 선택할 수 없습니다.  물론 고난 중에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고난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서두에 말씀드린 것과 같이 후발적 고난입니다. ‘후발적 고난이란 자신의 잘못으로 당하는 고난입니다. 솔로몬이 그의 인생 후기에 당한 고난은 후발적 고난입니다. 왜 그가 후발적 고난을 당했습니까? 솔로몬이 계속되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이방 여인들을 사랑하고 이방 신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을 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 만일 하나님의 경고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면 후발적 고난은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후발적 고난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드려도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하면 심판을 받아 고난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냐 불순종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은 180도 달라지게 됩니다. 불순종을 선택하면 고난이 뒤따르지만 순종을 선택하면 평안함이 따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7:23)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선택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제가 오늘 이 넥타이를 매고 나올 때에 이것을 맬까 저것을 맬까 생각하다가 이것을 매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떤 넥타이를 매느냐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예배 후에 집이든 교회이든 식사를 하실 턴데 어떤 반찬을 드시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선택이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정도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순종이냐 불순종이냐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금생과 내생에 복을 받지만 불순종하면 금생과 내생에 저주를 받기 때문입니다. 찬송가 586장에 어느 민족 누구에게나 결단할 때 있나니 참과 거짓 싸울 때에 어느 편에 설 건가“(찬송가 521)라는 가사처럼 누구나 매우 중요한 결정을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선택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점점 시력이 악화되어 눈이 멀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담당의사가 그에게 수술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수술은 성공적이어서 시력은 정상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그런데 수술 중 뇌 신경을 다쳐서 그의 기억력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수술한 결과 이번에는 기억력은 되살아났지만 시력은 나빠졌습니다. 그러자 의사는 환자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시력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기억력을 선택하시겠습니까?” 한참을 생각한 후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시력을 되찾겠습니다. 지나간 일을 기억하는 것보다는 앞으로 될 일을 눈으로 보는 것이 낫겠지요.” 참으로 현명한 선택입니다. 우리의 미래는 말씀에 순종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행복한 미래, 평안한 미래를 원하신다면 말씀에 순종할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저는 오늘 신앙생활하면서 우리가 한번쯤은 고민해볼 만한 고난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과연 고난은 피할 수 없느냐는 것입니다. 본래적 고난은 피할 수 없지만 후발적 고난은 피할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떻게 피할 수 있습니까? 항상 겸손한 마음을 갖고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 돌이키면 피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을 선택하지 말고 순종을 선택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온전히 누리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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