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롯의 반응을 통해 주의 음성을 듣다 누가복음 9장 7-9절 2016.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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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롯의 반응을 통해 주의 음성을 듣다 누가복음 9장 7-9절 2016.5.292018-12-03T23:07:30+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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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본문 7절을 함께 읽습니다. “분봉 왕 헤롯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당황하니 이는 어떤 사람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도 하며” 여기서 ‘이 모든 일’은 무엇을 가리킬까요? 우리가 ‘이 모든 일’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기 위해서는 이와 평행 귀절인 마태복음 14장 1절과 마가복음 6장 14절을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각각 찾아보겠습니다. 먼저 마태복음 14장 1절입니다. “그 때에 분봉 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다음은 마가복음 6장 14절입니다.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 왕이 듣고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일어나느니라 하고”(막 6:14). 따라서 헤롯 왕이 들은 것은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에 대한 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각종 기적을 행하셨다는 소문을 들은 것입니다.
    그런데 헤롯이 이 소문을 듣자 어떻게 반응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심히 당황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히 당황했다’는 말은 그가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을 듣고서 마치 혼비백산한 모습을 보였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일반적으로 당황했을 때와는 달리 극도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예수께서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는 등 기적을 행하시자 예수께 대한 반응은 다양했습니다. 혹자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했습니다. 혹자는 엘리야가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혹자는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살아났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헤롯 왕은 예수께서 행하신 소문을 듣고서 심히 당황했을까요? 그것은 첫 번째 소문 때문입니다. 즉 자신이 분명히 세례요한의 목을 베었는데 그가 살아나서 그런 능력을 행한다는 소문이 들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왜 헤롯왕이 세례요한의 목을 베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헤롯(헤롯 안디바, 안티바스)은 자신의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빼앗아 자신의 아내를 삼았습니다. 그러자 세례 요한이 이를 옳지 않다고 지적하자 그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생일잔치 때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가 헤롯 왕 앞에서 춤을 추자 기분이 너무 좋아서 딸에게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주겠노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살로메가 그의 어미 헤로디아에게 가서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때에 헤로디아가 세례요한의 목을 달라고 하라 하자, 어미가 시키는 대로 세례 요한의 목을 요구했습니다. 헤롯은 이 요청을 듣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요구하는 대로 허락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왕의 권위에 손상이 갈 수밖에 없었고 또 약속을 들어주자니 백성들이 세례요한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헤롯은 살로메의 요구대로 세례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딸에게 주었습니다. 사실 헤롯은 살로메의 요구를 듣고 고민했지만 얼마든지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세례요한의 목을 베었던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인 세례요한을 제거하면 정치를 마음 편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정적을 제거함으로 마음의 평안을 누렸을까요? 결코 평안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는 세례요한을 죽인 후 육신은 살아있었지만 마음은 이미 지옥이었습니다. 날마다 두려움의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가 죽였던 세례요한이 살아났다는 말을 듣고서 심히 당황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헤롯만 이렇게 두려운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헤롯처럼 자신에게 아픔을 준 자를 원수로 생각하고 그것을 보복하려는 마음을 가진 자는 누구나 그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 사함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지라도 헤롯처럼 자신에게 상처를 준 자를 원수로 생각하고 보복하겠다는 마음을 가지면 영적으로 황폐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원수를 용서하는 자와 함께 하시고 그의 마음에 좌정하셔서 평안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원수를 심판할 권한이 없습니다. 심판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원수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만 있습니다.
    마귀는 원수를 미워하게 하지만 성령께서는 원수를 용서하게 하십니다. 따라서 상대방의 허물을 용서하면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이고 미워하고 보복하려고 생각하는 자는 마귀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용서하는 자세로 살아가면 두려움이 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쫓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용서하는 삶을 살아가면 어떤 일을 만나도 당황하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큰 죄를 용서받았는지를 안다면 누구든지 용서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얼마나 큰 죄를 사함 받았는지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얼마나 큰 죄를 용서받았습니까? 우리가 죄 때문에 이 세상에서 두려움과 죄와 고통 가운데 살다가 죽어야 하고 죽은 후에는 심판을 받아 지옥에 던져져 영원히 고통을 당해야 할 정도로 큰 죄에서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것을 안다면 어찌 우리가 용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앙생활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열심을 내면 안 됩니다. 사람과의 관계도 좋아야 합니다. 즉 원수까지도 용서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8)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최선을 다하신 것입니다. 스테반이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용서하고 사도 바울이 기쁨으로 순교한 것 역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을 듣고서 혹자는 세례 요한을 떠올렸고, 혹자는 엘리야를 떠올렸고, 혹자는 옛 선지자들을 떠올렸지만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하는 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것을 듣고 예수께서 누구신지를 아는 자가 없는 것을 통하여 무엇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누군가가 스스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깨닫고 믿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메시아로 믿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구원받는 것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날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그러자 제자들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번에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때에 시몬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러자 예수께서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시고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고 그분을 우리의 마음에 모시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아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는 귀신의 경우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지만 누가복음 8장에는 예수께서 귀신과 대화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예수께서 거라사 땅에 이르시자 귀신들린 자가 예수님을 알아보고서 엎드려 큰 소리로 뭐라고 말했습니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눅 8:28). 귀신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흔히 귀신같이 안다는 말을 합니다. 귀신은 영이기 때문에 인간보다 아는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모르고 있었을 때에 귀신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귀신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알았지만 그가 그리스도이신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시인하는 자만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최고의 지식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아는 것이고, 최고의 믿음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이는데 앞장을 섰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복음전도자로 바뀔 수 있습니까? 예수께서 거짓 메시아로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기 때문에 그를 따르는 자를 핍박했는데,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께서 자신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이심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고 복음만 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깨닫자 그의 인생관과 세계관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빌립보서 3장 7-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깨달은 자는 사도 바울과 같이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더 얻기 위해 세상의 모든 것을 내려놓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아직도 그분보다 더 중요시하고 더 가치를 두는 것이 있다면 그는 아직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온전히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우리 함께 94장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를 찬양하겠습니다).

    그런데 헤롯왕이 예수께서 행하신 소문을 듣고서 당황한 후 어떻게 했습니까? 9절을 읽겠습니다. “헤롯이 이르되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거늘 이제 이런 일이 들리니 이 사람이 누군가 하며 그를 보고자 하더라.”
    헤롯은 당황한데서 그치지 않고 예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고 보고자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보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신이 세례의 목을 베었는데 그가 살아나서 행동하는 자가 예수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께서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등 기적을 베푸신 것은 단순히 기적을 행하신 것이 아닙니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표적’이라는 단어는 ‘세메이온’이라고 하는데, 이는 예수께서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알리는 수단으로 행하신 기적을 뜻합니다. 즉 예수께서 각 지역을 다시시면서 각색 병든 자를 치유하시고 귀신을 좇아내신 것은 그들에게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깨닫게 하시려고 베푸신 것입니다. 그런데 헤롯이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한 것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이 자신이 죽인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 온 자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오는 이유는 매우 다양합니다. 혹자는 예수께서 자신의 병을 고쳐주시는 분이신지를 확인하고자 나옵니다. 혹자는 자신의 빵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분이신지를 확인하기 위해 나옵니다. 혹자는 예수님이 자신의 소원을 이루는데 도움을 주실 수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나옵니다. 예수님 당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좇았던 것은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 베푸시는 기적을 통하여 떡을 먹고 배부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의도로만 예수님을 가까이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문제만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께 나오면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 즉 죄에서 해방되는 기쁨을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 사함을 받고 구원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이유로 주님께 나아가야 할까요? 예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주신 구원자이실 뿐 아니라, 주인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 그분께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주된 목적으로 주님께 나아가지 않으면 비신자들이 빵의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 예수님을 찾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물론 육신의 문제를 인하여도 주님께 엎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주님의 뜻을 알기 위해 주님께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의 뜻대로 살아야 할 주의 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나아가는 동기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내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구원 받은 것에 감사하여 나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위해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도 하고 헌금도 드리고 나름대로 열심히 주님을 섬기지만 마음이 공허하고 만족이 없는 것은 바로 주님께 나아가는 의도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주님께 기도하는 동기가 새롭게 바뀌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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