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찮게 보이는 자가 큰 자입니다 눅9장 46-50 2016.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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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찮게 보이는 자가 큰 자입니다 눅9장 46-50 2016.7.242018-12-03T23:10:06+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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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의 제자들이 서로 토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토론한 주제는 ‘누가 크냐?’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런 주제를 가지고 토론하는 것은 제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누가 더 크냐’는 주제에 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식, 외모, 물질의 영역에서 끊임없이 누가 더 큰지에 대해서 씨름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것을 찾아 자랑하고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어느 날 우리 딸이 “아빠, 난 아빠와 마시는 공기다 달라”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자기가 저보다 키가 크므로 우월감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나온 말입니다. 이런 현상은 교회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누가 더 헌금을 많이 내냐? 누가 제일 믿음이 좋냐? 누가 제일 성도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냐?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인간세계에서만 ‘누가 크냐’는 주제를 가지고 다투는 것이 아닙니다. 동물들도 매 한가지입니다. 개는 자기보다 덩치가 큰 개를 만나면 짖습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가 상대방보다 적다는 열등감 때문입니다. 코뿔소는 숫놈끼리 만나면 먼저 코 뿔을 대봅니다. 왜 그럴까요? 코 뿔은 코뿔소에게 있어서 상대방을 이기는 강력한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하마는 입을 쩍벌려서 입 크기를 대봅니다. 왜 그럴까요? 하마는 입의 크기로 우열을 가리기 때문입니다. 공작은 꼬리 깃을 활짝 펴서 깃털이 얼마나 화려한지를 비교해 봅니다. 왜 그럴까요? 공작새는 꼬리 깃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누가 더 크냐’는 것을 논쟁의 주제로 삼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그것은 전혀 가치 없고 무익한 것입니다. 논쟁의 가치조차 없는 것을 가지고 씨름하는 것은 시간 낭비에 불과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더 크고 작은지를 판단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이십니다. ‘개미 박사’로 유명한 최재천 국립생태원 원장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국왕이 있고, 노예를 부리고, 농사를 짓고, 전쟁을 벌이는 등 인간만이 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이 개미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인간과 가장 비슷한 동물은 유전적으로 가장 가까운 침팬지가 아니라 개미다.” 그런데 개미세계에서는 왕이 있고 노예가 있고 농사꾼이 있고 군사가 있을지라도 우리 눈에는 다 같은 개미로 보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습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끼리는 우열을 가리고 서열을 매기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오십보백보입니다. 그것은 마치 도토리 키 재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어떤 상황에서 ‘누가 크냐’고 논쟁을 하였는지 아십니까?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보았듯이 예수께서 자신이 곧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것이라는 수난예고를 말씀하신 직후였습니다. 즉 죽음을 앞 둔 상황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실 상황을 앞두고 계셨지만 제자들은 그런 상황에서 ‘누가 더 크냐’는 문제로 다투고 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주님께서는 곧 다시 이 세상에 오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이 땅에서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살아나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곧 오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시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 땅에서 다른 사람보다 더 잘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관심이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의 소망을 이 땅에 두지 말고 천국에 두어야 제자들처럼 한심하고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예고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가 더 크냐는 문제로 다투었을까요? 그것은 제자들이 아직도 그 당시 유대인들이 가진 메시야 관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다윗과 같은 메시아가 나타나서 로마의 억압에서 건져주실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즉 메시아가 오셔서 그들을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세계 위에 우뚝 세워주실 것을 고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께서 그들의 죄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고 말씀하셨어도 그 말씀은 귀담아 듣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듣고자 하는 것에만 귀를 엽니다. 상대방과 대화를 해도 관심을 가지 않으면 상대방의 말이 들리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누가 더 크냐는 문제로 다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이 세상에서 돈을 많이 벌고 높은 지위에 오르겠다는 생각만 하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즉 예수님의 삶을 본받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어떻게 사셨습니까? 하나님이신데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 영광을 다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한마디로 희생과 섬김의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바로 이런 삶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신앙생활을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이 세상의 복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서 조차도 ‘누가 더 크냐’는 주제를 가지고 논쟁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섬김과 희생의 삶을 따라가는 자는 결코 누가 더 크냐는 문제로 논쟁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다툼을 들으시고 어떻게 하셨습니까? 47-48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 성경은 예수께서 누가 더 크냐는 것을 가지고 제자들이 서로 다투는 것을 아시고서 어린아이 하나를 자기 곁에 세우시고 말씀하셨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왜 예수께서 다투는 제자들 앞에서 어린아이를 모델로 세우셔서 말씀하셨을까요? 혹자는 주님께서 어린아이가 겸손하기 때문에 그것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로 마태복음 18장 4절을 제시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그런데 여기서 ‘어린아이 같이 자기를 낮춘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자신을 낮추는 자라는 뜻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어린아이가 스스로 낮추는 것을 보았습니까? 오히려 자기를 자랑하는 아이들이 더 많습니다. 본문에서 ‘어린아이가 자기를 낮춘다’는 말은 아이들이 부모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자세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부모님의 손을 놓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모의 손을 놓으면 죽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어린아이의 특성을 아시고 예수께서 어린아이 같이 자신을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어린아이의 긍정적인 특성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린아이를 긍정적으로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성경에는 어린아이를 부정적으로 말씀하신 부분이 더 많습니다.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3장 1절에서는 시기와 분쟁을 하고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13장 11절에서는 생각하고 깨닫는 것을 어린아이 같이 하지 말고 장성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14절에서는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는 자를 어린아이에 비유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히브리서 5장 13-14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를 어린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께서 어린아이를 곁에 세우시고 말씀하신 진짜 이유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것은 당시 어린아이가 어떻게 취급받고 있었는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어린아이들은 관심에서 제외된 하찮은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마저도 어린아이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오는 것을 막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 어린아이를 통해 제자들을 교훈하실 때에 그를 예수님 곁에 세우셔서 말씀을 하셨을까요? 누구를 옆에 세운다는 것은 동등함을 뜻합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어린아이를 곁에 세우셨다는 것은 어린아이를 자신과 동등하게 여기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께서 당시 사람들이 하찮게 여기는 어린아이를 자신과 동등하게 여기신 것은 제자들이 하찮게 보이는 것을 소중하게 여기라고 교훈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귀찮아하고 하찮게 여기는 것을 소중하게 대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과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들입니다. 세상에서는 크고 멋있는 것을 소중하게 여기지만 하나님께서는 하찮은 것을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따라서 우리도 사람들이 귀찮아하고 하찮게 여기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어린아이를 세우시고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48절을 읽겠습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 본문에서 ‘가장 작은 자’는 누구를 가리킬까요? 그것은 어린아이와 같이 사람들이 하찮게 생각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어떤 자가 큰 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 따라서 언 듯 보기에는 우리의 눈에 가장 하찮게 보이는 자가 큰 자인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가장 큰 자’는 우리의 눈에 가장 하찮게 보이는 자가 아닙니다. 바로 그런 자를 섬기는 자가 큰 자인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우리가 큰 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장 하찮다고 생각하는 자를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 가장 작은 자를 일부러 찾아다닐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주위에는 하찮게 보이는 자들이 즐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공생애 동안 주로 어떤 사람을 섬겼습니까? 당시 사람들이 하찮게 여겼던 세리와 창녀와 가난한 자들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섬기신 것은 작은 것의 가치를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천국을 겨자씨에 비유해서 말씀하신 것을 통하여 이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겨자씨는 씨 중에서 가장 작은 씨입니다. 그런데 그 씨가 자라면 새들이 와서 깃들일 정도가 됩니다. 결코 작은 것의 가치를 평가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CCC 대표였던 김준곤 목사는 살아생전 이렇게 했습니다. “바구니의 사과는 헤아릴 수 있어도 사과 안에 들어 있는 씨앗이 품고 있는 사과는 헤아릴 수 없다.” 이 말은 한마디로 작은 것의 가치는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작은 씨가 땅에 심어지면 어떻게 열매를 맺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겉만 보고 그 안에 있는 작은 것은 보지 않습니다. 크고 많은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의 시선의 방향을 바꿔야 합니다.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화려한 것에서 소박한 것으로 바꿔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작은 것을 크게 보기 위해서 먼저 우리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먼저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자신이 먼저 작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작은 자가 되지 않고서는 작은 것을 크게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오신 것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오셨기에 죄인들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바울이 서신을 보내면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문자 그대로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뜻대로 살아가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지극히 작은 자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종으로 생각하고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찮게 보이는 자를 섬기게 되고 큰 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때 <그 청년 바보 의사>라는 책이 우리의 마음에 잔잔한 감동을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그 책의 주인공은 안수현씨 입니다. 그는 육군 군의관이었는데 33살의 젊은 나이에 유행성 출혈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자, 어떤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는지 아십니까? 4,000여명 이상이 추도했는데 그들 중에는 가난한 환자들과 미화부, 구두 닦는 사람, 식당 아줌마들이 많았습니다. 어떻게 그런 현상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들을 섬기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상 기준으로 볼 때는 바보 의사로 살았습니다. 그는 큰돈을 벌려고 도시에서 병원을 개원하지 않고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들, 즉 가난하고 병들고 무시하기 쉬운 구두닦이, 식당주방 아줌마, 미화부 등과 같은 분들을 예수님의 모습으로 영접하고 겸손히 섬겼습니다. 주님은 이런 자가 큰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천국에서 큰 자가 되는 것보다 영광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장차 천국에서 가장 큰 자가 되기 위해 사람들이 하찮게 여기는 자들을 섬겨야 합니다. 우리가 한 달에 두 번이나 이 나라 저 나라 다니며 복음을 전하지만 주로 가난한 자들을 향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마지막 날에 받을 상이 크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초심을 잃지 말고 세상에서 하찮게 여기는 자들을 섬김으로 천국에서 큰 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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