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도 소통해야 합니다. 막10:32-45 2012.10.7

//하나님과도 소통해야 합니다. 막10:32-45 2012.10.7
하나님과도 소통해야 합니다. 막10:32-45 2012.10.72018-12-03T19:52:34+09:00

Home 게시판 주일설교 하나님과도 소통해야 합니다. 막10:32-45 2012.10.7

1 글 보임 - 1 에서 1 까지 (총 1 중에서)
  • 글쓴이
  • thechurch
    키 마스터
    Post count: 356

     

      우리는 ‘행복한 소통’이라는 주제로 11월 4일, 제2차 D3행복축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행복한 소통을 하기위해서는 먼저 자신과 소통해야 하고, 다음으로는 이웃과 소통해야 하고, 세상과 소통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마지막 단계로 하나님과의 소통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맨 마지막으로 하나님과의 소통을 말씀드리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소통하지 않으면 진짜 행복한 소통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소통하는 길이 활짝 열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설교 제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도 소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과 소통하고 있는데 왜 또 소통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과 소통할 자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하나님과 온전히 소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예수께서 곧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만 삼일 만에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 중 야고보와 요한은 주의 영광중에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그 어느 제자보다 예수님을 가까이 따라 다녔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제자들이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한 마디로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왜 제자들과 예수님이 서로 소통이 되지 않았는지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뜻에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본문을 읽은 대로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 의해 이방인에게 넘겨져 채찍질을 당하고 죽임을 당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제자는 몰라도 수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에 반응을 보였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주의 영광중에 하나는 주의 우편에, 다른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왜 두 제자들이 그렇게 했을까요? 한 마디로 오직 자신들의 영광을 구하는데만 관심이 있고 예수님의 뜻을 아는데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상대방의 뜻에 관심을 갖지 아니하면 서로 소통할 수 없습니다. .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그렇기 때문에 가만히 있어서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고 하나님과 소통하는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성경은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기록한 책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소통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것과 하나님과의 소통은 정비례합니다. 구약의 인물 가운데 하나님과 가장 소통을 잘 한 사람은 다윗입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하나님과 소통을 잘 할 수 있었는지 아십니까? 늘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시편을 통하여 그가 말씀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말씀이 송이꿀보다 더 달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시 19:10). 얼마나 말씀을 사모했는지 “내 눈이 주의 말씀을 바라기에 피곤하나이다”(시 119:82)라고 했습니다. 또한 “피곤할지라도 주의 말씀을 바라본다”(시 119: 81)고 했습니다. 성경은 단지 모세의 율법이나 선지자의 글이나 이스라엘의 역사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소통하시는 최고의 통로이며 수단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과 소통하기를 원하신다면 성경을 자주 읽고 들어야 합니다.

      둘째로, 기도를 잘못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야고보와 요한이 드린 기도를 통하여 그들의 기도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35절입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원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우리는 이 말을 통하여 그들이 기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기도하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응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즉 기도를 자신들의 뜻을 이루는 만능키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의 영광 중에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간청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구하는 것마다 다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는 응답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얻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라”(약 4:3)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합니다. 대화를 통하여 상대방의 뜻을 알 수 있듯이 우리가 하나님과 대화하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고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습니다. 기도가 하나님과의 대화임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기도하면 하나님과 소통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가 바뀌지 않으면 주님의 뜻을 알 수 없고 주님과 소통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뜻과 생각과 일방적으로 아뢰었다면 이제는 자신의 기도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즉 ‘말하는 기도’만 하지 말고 ‘듣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통하여 우리가 어떻게 기도를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는 문제를 가지고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셔서 밤새도록 간절히 기도를 하셨습니다. 뭐라고 기도하셨습니까?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마옵소서”(마 26:39). 예수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도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과 서로 소통하는 기도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만 기도하면 하나님과 소통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과 서로 뜻이 통하는 ‘소통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자신의 생각만을 일방적으로 하나님께 전달하는 ‘불통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까?

      셋째로, 마음이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것을 말씀하셨는데 야고보와 요한은 주의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는 것은 그분이 얼마나 겸손하신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야고보와 요한이 하나는 주의 우편에, 다른 하나는 왼편에 각각 앉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는 것은 그들이 교만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사람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자는 항상 자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높은 자리를 요구합니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계셨지만 두 제자들은 교만한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과 소통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교만한 마음을 가지면 아무리 말씀을 많이 보고 기도를 많이 해도 하나님과 소통할 수 없습니다. 혹 여러분 중에 자신을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영적으로 교만한 상태에 있음을 알고 마음을 낮추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특별히 사랑하셔서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만을 특별히 사랑하신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마음을 낮추어야 합니다. 끊임없이 자라나는 교만의 잎사귀를 잘라내야 합니다. 마음이 높아지면 하나님과 소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겸손한 자와 소통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본문을 중심으로 왜 제자들이 예수님과 소통이 이루어지 않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소통하지 못하고 사는 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범하면 기뻐하시지 않고 우리와 소통하시기를 꺼려하십니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의 소통을 막아버립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의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 59:1-2)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이를 가로막아 소통을 방해합니다.

      어떻게 하면 죄 문제를 해결받고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그 비법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10). 그렇습니다. 우리가 깨달은 죄를 자백하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이미 죄를 회개하였으므로 죄 때문에 지옥에는 던져지지 않습니다. 구원 받은 후 짓는 죄는 주님 앞에 고백만 하면 됩니다. 여러분과 자녀의 관계를 생각해 보십시오. 자녀가 아무리 큰 잘못을 범했어도 “잘못 했습니다”라고 고백하면 끝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 죄를 범했을지라도 주님께 고백만 하면 주님이 다 용서해 주시고 우리와 소통을 하십니다.

      그런데 죄를 고백만 하면 하나님과 소통이 이루어지만 죄를 깨닫는다는 것이 그리 쉬운 것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다윗을 통하여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어느 정도 주변나라들을 평정하고 정치적으로 안정을 누리게 되자 인구조사를 하라고 요압장군에게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가 인구조사를 하라고 한 것은 나라의 부강함을 통하여 자신을 과시하려고 하는 교만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압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인구조사를 해서 칼을 빼는 사람만 북이스라엘 중에서는 백십만, 남유다에서는 사십칠만 명이라고 보고를 하셨습니다(삼하에서는 80만, 50만명으로 기록). 그러나 그 일은 하나님의 분노케 하는 죄악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압이 인구조사의 결과를 최종적으로 보고할 때까지 다윗은 그것이 죄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인구조사를 한 기간이 얼마인지 아십니까? 9개월 20일입니다. 즉 다윗은 자신이 범한 죄를 9개월 20일 동안이나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믿음의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죄를 깨닫는데 이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죄를 깨닫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은혜는 자신의 잘못을 빨리 깨닫는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날마다 깨닫는 복을 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소통을 방해하는 가장 큰 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는 흔히 죄라고 하면 살인이나 도적질 같이 행위로 범하는 죄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것보다 더 큰 죄로 여기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불신앙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6장 9절은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죄 사함을 받고 구원 받은 우리가 범하는 가장 큰 죄는 무엇일까요? 그것 역시 불신앙입니다. 즉 비신자에게 가장 큰 죄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고, 신자에게 가장 큰 죄는 믿음으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예수께서 믿음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어떤 사람을 칭찬하시고 어떤 사람을 책망하셨는데 그 기준은 모두 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이 있는 경우는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칭찬하셨고, 믿음이 없는 경우는 “어찌하여 이렇게 믿음이 적으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과 온전히 소통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믿음으로 살려고 몸부림을 쳐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고 있는지 아니한지를 쉽게 판단할 수 있는 바로미터가 있습니다. 그것은 각종 예배를 드리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예배를 사모하기 때문에 10분 전에 도착하여 기도로 준비합니다. 믿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말씀에 집중하고 선포되는 말씀을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고 아멘을 합니다. 그리고 주일낮예배만 드리지 않고 어떻게 해서라도 각종예배에 참석하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없는 가운데서도 예물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세상으로 나가서 자신보다 못한 이웃을 사랑하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우리가 이런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지 않고 있다면 믿음이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하루는 어떤 철학자가 소크라테스에게 찾아와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대화를 잘 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화를 잘하는 비결은 그 사람의 언어로 말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내 언어’로 말하면 상대방과 소통에 성공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과 잘 소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언어로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언어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기록한 성경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부지런히 읽어야 하고 그 말씀으로 기도해야 하나님과 온전히 소통할 수 있습니다 통계학적으로 인간이 공부를 통해서 인생에 성공하는 확률은 12.5%밖에 안 되고, 나머지 87.5%는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의사소통의 능력에 달려 있다고 합니다. 의사소통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사람과의 소통보다는 하나님과의 소통을 이루어야 합니다. “통 즉 불통이요, 불통 즉 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통하면 통증이 없고 통하지 않으면 통증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몸 안에서 소통이 되지 않아도 고통스러운데 하나님과의 소통이 끊어지면 우리의 인생이 어떻게 되겠습니까?우리 모두 불신앙의 삶을 회개하고 하나님과 소통하므로 인생의 성공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글 보임 - 1 에서 1 까지 (총 1 중에서)
  • 답변은 로그인 후 가능합니다.
책주문

게시판

최근 게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