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원농부의 비유를 통하여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눅 20:9-18 2018.1.14.

//포도원농부의 비유를 통하여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눅 20:9-18 2018.1.14.
포도원농부의 비유를 통하여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눅 20:9-18 2018.1.14.2018-12-03T23:39:50+09:00

Home 게시판 주일설교 포도원농부의 비유를 통하여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눅 20:9-18 2018.1.14.

1 글 보임 - 1 에서 1 까지 (총 1 중에서)
  • 글쓴이
  • thechurch
    키 마스터
    Post count: 364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포도원 농부 비유’ 또는 ‘소작인의 비유’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이 비유는 4복음서에 모두 나올 정도로 매우 중요한 비유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 당시 갈릴리 지역의 지주들은 로마정부와 결탁한 상류층의 사람들이었고 농민들은 대부분 땅을 소유하지 못해서 지주들에게 일정금액의 소작료를 내고 농사를 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로마정부에 세금을 내면 근근이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갈릴리 농민들은 정부와 지주들에 대한 반감이 대단히 컸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주인에게 반항을 하기도 하고, 혹자는 도적떼가 되기도 하고, 의분이 강한 자들은 지주들과 맞서 싸우는 단체를 조직하여 조직적으로 투쟁하며 싸우기도 했습니다. 오늘 비유는 이런 상황을 잘 알고계신 예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포도원 농부 비유’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든 후에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갔다가 오랜 시간이 지나서 포도원 소출의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냈더니 농부들이 주인이 보낸 종을 때리고 아무 것도 주지 않고 돌려보냈습니다. 이에 포도원 주인은 다시 다른 종을 보냈는데 그도 역시 능욕하여 돌려보냈습니다. 이에 주인이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냈더니 그도 상하게 하여 내쫓았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면 혹 그는 존대하리라 생각하여 보냈더니 오히려 그는 상속자니 그를 죽여서 그가 받을 유산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 생각으로 아들마저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포도원주인이 돌아와서 그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넘긴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비유이므로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각각 누구를 가리키는지를 알아야 제대로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악한 농부는 유대종교 지도자들이고, 주인의 종은 여러 선지자들이고, 주인의 아들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이 비유는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선지자들을 보냈지만 순종하지 않고 마지막으로 아들이신 예수님마저 보냈더니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차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시고 유대인들에게 주신 사명을 다른 곳으로 옮기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선지자를 보내서 말씀하셨어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종말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는데 이마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시고 그들에게 준 사명을 이방인에게 넘겨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이 비유가 자신들에게 하신 말씀인 줄 알고 즉시 예수님을 잡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 비유를 자세히 살펴보고 세부적으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자 합니다.

    첫째로, 모든 악은 욕심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어서 알고 있듯이 과수원 주인은 때가 되자 농부들에게 세를 받으려고 종을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첫 번째 보낸 종은 때리고 거저 보냈습니다. 다시 종을 보냈더니 그도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냈습니다. 다시 세 번째로 종을 보냈더니 상하게 하여 내쫓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아들을 보냈더니 그도 포도원 밖으로 내쫓아 죽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이 아들을 죽인 이유를 뭐라고 설명하고 있습니까? 14절입니다.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왜 농부들이 과수원주인이 보낸 종들을 때리고 상하게 하여 거저 돌려보냈을 뿐 아니라, 그의 아들까지 죽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욕심 때문입니다.
    사실 농부들은 이미 갖추어진 포도원에서 일하게 된 것을 영광과 기쁨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욕심 때문에 자신의 분수를 알지 못하고 오히려 주인의 아들마저 죽여서 과수원을 자기들의 것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농부들이 욕심 때문에 배은망덕하게 악을 행하는 것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합니까? 혹 매우 분노하거나 손가락질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바로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죄와 허물로 인하여 죽었던 자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천국을 유업으로 물려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욕심을 다 버리고 오직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이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지 않습니다. 이 세상들처럼 돈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천국보다는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에 우리의 정욕과 탐심도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단지 예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정욕과 탐심 때문에도 못 박히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정욕과 탐심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거듭났을지라도 욕심을 버리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영적으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야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그렇습니다. 욕심은 반드시 죄를 낳고 죄는 반드시 사망을 낳습니다. 이 사망은 단지 육적인 사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사망도 의미합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도 욕심을 버리지 못하면 영적으로 죽은 자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아무 영향력을 끼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날마다 욕심과의 전쟁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펴본 대로 과수원 주인이 여러 차례 종을 보냈지만 얻어터지고 거저 돌아왔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포도원주인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즉시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과수원주인은 그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아들까지 보내서 희생을 당하게 하셨을까요? 과수원 주인에게 그들을 처형할 만한 힘이 없었기 때문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16절을 보면 과수원 주인이 얼마나 큰 힘과 능력을 갖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사람들이 듣고 이르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거늘.”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않고 자신의 아들까지 보내서 희생을 당하게 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포도원 주인은 당시 지주들과 전혀 다른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지주들은 소작인들의 피를 빨아먹고 살았지만 비유에 등장하는 포도원 주인은 무한한 사랑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힘이 없어서 아들까지 희생시킨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참고 기다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힘이 없으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이 아닙니다. 죄의 삯은 사망인데 죄 값을 치루기 위해서는 누군가 대신하여 죽어야 하는데 우리는 모두 아담의 후손이라 대신하여 죽을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아들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누가 자기 아들을 내어주기 까지 우리를 사랑합니까?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셨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지난번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하나님 자신은 가만히 계시고 그의 아들만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단지 우리를 죄에서 건져주신 것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 사랑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사랑의 확신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범사에 감사가 없고 불평 속에 살아가는 것은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며 살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관념적으로 이해하지 말고 실제의 삶에서 누리며 살아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다르게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본문 17절은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함께 읽습니다.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성경은 여러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돌에 비유하고 말씀하고 있는데 본문에서 ‘기록된 바’라는 말은 시편 118편 22-23절에 비롯된 것입니다.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께서 갑자기 비유를 전환시키셨습니다. 종전에는 예수께서 자신을 포도원 주인의 상속자인 아들에 비유하시다가 건축자들이 버렸지만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퉁잇돌은 유대 건축의 핵심입니다. 모퉁잇돌은 주춧돌입니다. 주춧돌이 없이 건물을 세울 수 없습니다. 즉 건축자들이 왜 버렸을까요? 쓸모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건축자들이 버린 돌을 가져다가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사용하는 대상과 사람이 사용하는 대상이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는 강하고 지식이 있고 외모가 탁월한 자를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십니다. 어리석은 자들을 사용하여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실까요? 그것은 우리의 약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서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해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장점과 강점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려하지 말고 우리의 연약함과 단점을 가지고 하나님께 엎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장점을 살려야 성공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부족한 부분을 주님께 드림으로 성공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사람들을 보십시오. 한결같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약점을 통하여 크게 일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을 팔던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형들에게 팔리고 애굽에서 옥살이하던 요셉을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인자였던 모세를 사용하여 이스라엘민족을 구원하셨습니다.
    반면에 우리가 강점으로 사역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처음에는 그런대로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것 때문에 교만해서 망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의 강점으로 일하지 말고 약점을 가지고 기도해서 주님의 능력으로 해야 합니다.

    넷째로, 예수께서는 심판자로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함께 18절을 읽습니다.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눅 20:18). 여기서 이 돌은 무엇을 뜻할까요? 농부들이 버렸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그런데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진 자는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예수님과 바른 관계를 맺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해야 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계속해서 주장하는 한 가지 주제는 예수가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시라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께서 구원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로부터 구원해주시는 구원자이십니까? 죄로부터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주시는 구원자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께서 자신의 죄에서 구원해주시는 구원자로 믿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듯이 자신이 죄인인 것을 모르는 자는 결코 죄에서 구원받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 것을 깨달아야 그 죄에서 나오는 길을 찾게 되고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미 이런 사실을 믿고 죄 사함을 받고 구원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예수님의 심판은 우리와 전혀 상관이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믿지 않는 자에게나 믿는 자에게 심판자이십니다. 우리가 지옥에 가는 심판은 받지 않지만 천국의 상을 위해서는 심판을 받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께서 구원자이심을 믿고 구원받은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날마다 삶 속에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치 노아 홍수시대를 방불합니다. 홍수가 나서 죽기까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에만 관심을 가졌듯이 이 세상 것에만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고 300년 간 하나님과 동행한 것처럼 날마다 심판을 의식하는 자만이 심판을 준비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글 보임 - 1 에서 1 까지 (총 1 중에서)
  • 답변은 로그인 후 가능합니다.
책주문

게시판

최근 게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