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감사절은 헌금을 가장 많이 내는 날이 아닙니다. 눅18장 9-14 2018.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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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절은 헌금을 가장 많이 내는 날이 아닙니다. 눅18장 9-14 2018.11.42018-12-03T23:59:24+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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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추수감사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추수감사절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부정적인 견해가 제기 되고 있습니다.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든지, 왜 우리가 미국의 추수감사절을 따라서 지켜야 하느냐는 등… 그러나 한 해 동안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예배를 드리는 것은 좋은 전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바르게 드리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추수감사주일을 일 년 중 가장 감사헌금을 많이 드리는 날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제가 잠시 사역했던 어느 교회는 추수감사헌금의 명목으로 매일 만원씩 적금을 들게 하고 추수감사절에 한 번에 드리도록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추수감사절 헌금을 수입예산 중 가장 높게 책정하고 집행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렇게 헌금을 많이 드리는 것에 치중해서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것이 바람직한 것일까요? 물론 어떤 측면에서 헌금액과 감사의 정도는 비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를 꼭 물질로만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추수감사절을 일년 중 감사헌금을 많이 하는 절기로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닙니다.

    오늘 읽은 성경 본문은 ‘바리새인과 세리 비유’라고 하는데, 한마디로 바리새인과 세리가 함께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는데 바리새인의 기도는 듣지 않으시고 세리의 기도는 받으셨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예수께서 자신의 의를 주장하는 자들을 책망하시기 위해서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본문을 가지고 추수감사절 설교를 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단 한 분도 없을 것입니다. 저 역시 이 본문으로 2018년 추수감사절 메시지를 전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요? 그것은 바리새인이 하나님께서 감사를 드렸지만 하나님께서 그 감사를 받으시지 않았다는 말씀이 제 눈에 크게 와 닿으면서 우리도 하나님께 추수감사예배를 드리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추수감사예배를 드리지만 하나님께서 거절하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정말 아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메시지를 통해서 우리가 드리는 추수감사 예배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되었으면 합니다.

    먼저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각각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바리새인의 기도입니다. 11-12절입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다음은 세리의 기도입니다. 13절입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일반적으로 기도의 네 가지 요소는 찬양(Adoration), 고백(Confession), 감사(Thanksgiving), 간구(supplication)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로 앞 글자만 따서 ACTS라고 합니다. 즉 감사는 기도의 요소 중에서 뺄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런데 기도의 4요소 중의 하나인 감사가 바리새인의 기도에는 들어가 있지만 세리의 기도에는 감사가 빠져 있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 바리새인의 기도가 세리의 기도보다 훨씬 멋집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14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매우 황당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감사가 빠진 세리의 기도는 들으셨고, 감사가 들어간 바리새인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셨습니다.
    감사가 기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지만 하나님께서 바리새인의 감사는 받지 않으시고 세리의 기도는 들으신 것을 통하여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보다 어떤 자세로 하나님께 감사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라는 말 자체보다 감사하는 자세가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감사의 자세입니다. 우리가 어떤 자세로 감사를 드리느냐에 따라 하나님께서 받기도 하시고 그렇지 않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떤 자세로 하나님께 감사해야 기쁘시게 받으실까요? 두 사람의 기도를 비교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바리새인의 기도를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11-12절을 다시 읽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바리새인이 감사한 내용은 무엇입니까? 그가 다른 사람들처럼 토색, 불의, 간음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리와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바리새인에게 감사할 조건입니까? 당연히 감사할 조건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바리새인의 감사기도를 듣지 않으셨을까요? 그것은 그렇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의를 내세웠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주의 일을 해도, 헌금을 많이 드려도, 도덕적으로 의롭게 살아도 그렇게 된 것이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했다고 생각하여 감사하면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리면서 이것을 점검해야 합니다. 2018년 한 해 동안 살아온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100프로 감사해서 드리느냐, 아니면 자신이 뭔가 행한 것이 있어서 감사하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주장하는 의가 조금이라도 있는지 없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에게는 끊임없이 자기의 의를 주장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왜 바리새인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감사하지 않고 자신이 토색, 불의, 간음을 하지 않은 것을 감사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11절을 자세히 읽으면 그 단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바리새인이 감사한 것이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들 즉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않은 것과 세리와 같지 아니한 것입니다. 이처럼 바리새인이 세리를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은 것을 인해 감사한 것을 통해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그가 감사의 조건을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것에 두지 않고,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그들보다 좀 더 선을 행한 것을 감사의 조건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즉 바리새인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좀 더 나은 자신의 의를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는 바리새인처럼 감사하는 마음이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도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더 좀 잘하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이 세상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의 의를 감사의 조건으로 삼는 것은 마음이 교만하다는 증거입니다. 제가 ‘성공의 적, 교만’에서 26여개의 교만의 증상을 소개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자기의 의’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왜 자기의 의를 주장하는 것이 교만의 증거일까요? 성경은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주장하는데 자신의 의를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의는 자신이 노력하여 쌓은 공적을 뜻하는데 이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간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믿음으로 얻은 ‘하나님의 의’를 갖고 있기에 이 ‘의’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기 때문에 ‘자신의 의’로 나가면 교만한 마음으로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철저히 자신의 의를 버리고 하나님께 감사한 사람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가 바로 하박국 선지자입니다. 우리 함께 하박국 3장 17-18절을 읽습니다(1305P).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하박국의 감사에서 무엇을 느낍니까? 그에게서는 자신의 의를 주장하는 것을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푸신 은혜에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자신 안에서 감사의 조건을 찾지 않고 오직 하나님 안에서 찾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도 하박국처럼 감사의 조건을 자신 안에서 찾지 않고 오직 하나님 안에서 찾아 감사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박국이 감사한 이유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박국이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는 상황에서도 감사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구원자이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기쁨의 근원이시고 구원자이심을 믿을 때에 감사의 조건을 오직 하나님 안에서 찾아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즘처럼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가 소중하게 평가받는 시대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맞이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로 원수된 것을 하나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것을 가르쳐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평등사상이 꽃을 피우고 인권이 회복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인권을 회복하자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습니다. 마치 자기의 힘과 능력으로 된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이 앉으려하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호세아 선지자가 “그들은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호 4:7)라고 말한 것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무리 크게 성공할지라도 그렇게 된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고 조금도 자신 안에서 의를 찾지 말고 오직 하나님 안에서 찾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감사의 조건을 자신 안에서 찾지 않고 오직 하나님 안에서 찾는 방법을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그 방법을 세리의 기도 자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3절입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세리는 멀리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 못하고 자신이 죄인이니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세리가 왜 이런 자세로 기도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정말 세리는 자신이 잘한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께 나아갔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세리도 바리새인과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세리가 이런 자세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 줄을 잊지 않고 자신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조건을 찾지 않고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찾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늘 잊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나아갈 자격이 자신 안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있다고 믿고 세리와 같은 자세로 하나님께 나아 갈 수 있습니다.

    오늘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혹시 나름대로 자신이 잘한 것을 가지고 뿌듯한 마음으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리처럼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 줄 알고 자신에게 잘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생각으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만일 전자의 경우라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지 않으실 것이고 만일 후자의 경우라면 기쁘시게 받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받으시는 추수감사절 예배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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