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에 다시 듣는 축사사역 눅 4:31-37 2015.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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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에 다시 듣는 축사사역 눅 4:31-37 2015.9.272018-12-03T22:56:09+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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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지난 주 성령으로 복음을 증거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포로 된 자가 자유케 되며, 눈먼 자가 보게 되며, 눌린 자가 자유케 되며, 은혜의 해가 전파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이런 역사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복음을 믿어야만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무엇보다도 복음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시고 기적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오래 믿었느냐, 인격이 훌륭하냐, 헌금을 많이 내느냐, 열심히 봉사하느냐에 관심이 없으십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고 구원 받아 믿음으로 살고 있느냐에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원 받은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은 추석명절입니다. 그래서 추석과 관련하여 말씀을 준비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고린도전서 10장 20절이 생각났습니다.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일반적으로 비그리스도인들은 추석에 제사를 지내는 데, 그것을 성경은 귀신에게 제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내용이 나오기 때문에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으로 가셨는데 마침 안식일이라 회당에 들어가셔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놀랐습니다. 왜 그들이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놀랐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32절). 국어사전은 권위를 “남을 지휘하거나 통솔하여 따르게 하는 힘”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께서 권위를 가지셨다는 말은 한 마디로 힘을 가지셨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어떤 힘을 가지고 계셨습니까? ‘하나님의 힘’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하나님의 힘’이 나타날 수 있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말씀을 가르치시지 않고 성령의 능력으로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가르치는 곳마다 하나님의 힘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사역하면 하나님의 힘이 나타납니다. 제가 ‘왕처럼 사역하라’는 책에서 강조한 것도 우리가 성령으로 사역하면 예수님처럼 사역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복음을 전할 때에 사람의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전하기를 힘썼다고 말한 것입니다. 제가 이번에 ‘스미스 위글스워스의 성령사역’이라는 책을 출간하는데 그 책도 스미스 위글스워스가 성령으로 사역했기 때문에 어떤 역사가 있었는지를 밝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가 성령으로 사역하자 죽은 자를 20여 명이나 살리고 앉은 뱅이를 일으키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목발로 걷던 자의 목발을 버리게 하고, 튜브로 위로 음식을 넣어 살던 자가 위의 뚫었던 흔적이 없어지는 등 엄청난 역사가 있었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그곳에 어떤 사람이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33절입니다.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 질러 가로되” ‘귀신들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귀신 앞에 어떤 수식어가 붙어 있습니까? ‘더러운’입니다. 귀신 앞에 ‘더러운’ 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귀신을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한 마디로 말한다면 더러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귀신은 더럽습니다. 그래서 귀신이 역사하는 곳에는 언제나 추하고 더러운 일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옳지 않은 생각을 하고 그릇된 행동을 하는 것은 모두 귀신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왜 귀신이 우리를 더럽게 살도록 유혹할까요? 그것은 다시 우리를 자신의 종으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알다시피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므로 그의 자녀인 우리도 거룩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더럽게 살면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망각하게 되어 무기력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리고 더럽게 살면 성령충만하지 않아 하나님께 온전히 쓰임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귀신이 바로 이것을 노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더러운 귀신의 유혹을 물리쳐야 하는 것입니다.
    존경을 받는 랍비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수업시간에 한 학생이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께도 여러 가지 시험이나 유혹이 닥치지 않습니까? 죄악의 물결이 파도치고 쾌락과 향락의 유혹이 있을 때 어떻게 대처하시는지 그 비법을 가르쳐 주세요.” 그러자 랍비는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해주었습니다. “나라고 괴롭히는 악한 자의 유혹이 없겠느냐? 그러나 그러한 유혹이 물밀듯이 밀려올 때 나는 사탄에게 ‘지금 비어 있는 자리가 없다’라고 단호하게 말한단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충만하면 귀신이 들어올 자리가 없게 됩니다. 빈 의자가 있으면 누군가가 앉게 되는 법입니다. 타종교에서는 마음을 비우기 위해 도를 닦는다고 하는데 단지 마음을 비우는 것은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빈 마음은 또 다시 마귀가 들어가 앉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2장 43-45절을 보면 쫓겨난 귀신이 물 없는 곳으로 쉴 곳을 찾아 이리 저리 다니다가 마땅히 있을 곳이 없자 어떻게 했습니까? 귀신이 먼저 있던 곳으로 돌아와 보니 그곳이 비어있고, 청소도 잘되어 있고, 수리도 잘 되어 있는 것을 보고서는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므로 그 사람의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음을 비우는데서 멈추지 말고 빈 마음을 성령으로 채워야 합니다.

    예수께서 설교를 마치시자, 회당 안에 있던 귀신들린 사람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34절입니다.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34절). 여기서 우리는 귀신들린 사람이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사람의 입에서 나왔지만 사람의 말이 아니라 귀신의 말입니다. 귀신이 사람의 입을 통하여 말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귀신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나사렛 예수와 우리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기에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이 말은 예수님과 자신은 관계가 없으니 자신을 멸하지 말라고 간청한 것입니다. 그런데 귀신이 정말 예수님과 자신이 관계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귀신은 예수께서 자신과 원수관계에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멸하러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창세기 3장 15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세기 3장 15절을 ‘원시복음’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여자의 후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원수는 마귀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귀신은 예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알고 있었고 왜 오셨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 1서 3장 8절은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귀신이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을까요? 그는 속이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귀신은 입만 열면 거짓을 말합니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입니다. 그는 자신과 예수님이 무관하다고 말해서 예수님의 적이 아니라고 말해서 예수님의 심판을 피하려고 한 것입니다. 마귀는 예수님마저도 속이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마귀에게 속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귀신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말했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맞는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거룩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귀신의 말을 듣고 뭐라고 하셨습니까? 꾸짖으시면서 추방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왜 예수께서 베드로가 자신을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을 때는 칭찬하시고 그의 신앙고백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는데, 귀신이 말했을 때는 칭찬은커녕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 나오라”라고 꾸짖으셨을까요? 베드로는 성령으로 고백했지만 귀신은 거짓으로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거짓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안 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절반만 드렸으면서 전부를 드렸다고 거짓말해서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성령으로만 신앙고백을 해야 진실하고 참된 것입니다. 거짓은 드러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귀신을 어떻게 쫓아내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35절 다시 한 번 읽어보십시오.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예수께서 어떻게 귀신을 쫓아내셨습니까? 먼저 꾸짖으셨습니다. 왜 예수께서 꾸짖으셨을까요? 귀신이 하는 모든 일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것을 눈감아 주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는 잘못을 꾸짖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하셨습니까? 귀신을 꾸짖으신 다음에는 ‘말씀으로’ 쫓아내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귀신을 쫓아내실 때에 귀신들린 사람을 때리시거나 억압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오직 말씀으로만 쫓아내셨습니다. 혹자는 종종 귀신을 쫓는다는 미명하에 귀신들린 자를 감금을 하거나 구타를 하는데 이는 성경적인 방법이 아닙니다. 귀신은 예수의 이름으로 명령할 때에 쫓겨나갑니다. 성경은 믿는 자들에게는 주의 이름을 사용하여 귀신을 내어 쫓는 능력을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막 16:17).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을 수 있는 권세가 있음을 알고 믿음으로 귀신을 쫓아내야 합니다.

    그런데 귀신이 나갈 때에 어떤 현상을 수반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35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하여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갈 때에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쓰러진다는 것입니다. 왜 귀신이 나갈 때에 사람이 쓰러질까요? 그것은 귀신이 나갈 때에 사람을 넘어뜨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귀신이 나갈 때에 사람을 넘어뜨릴까요? 그것은 그동안 잘 있던 곳을 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 속에 편안하게 살다가 거처를 떠나야 하니 얼마나 억울하고 분하겠습니까? 치유집회를 하다보면 종종 쓰러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쓰러진다고 모두 귀신이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쓰러지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성령의 능력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도저도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즉 귀신이 나가거나 성령의 능력이 임했기 때문이 아닌 경우가있습니다. 우리를 속이기 위해 쓰러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거짓으로 쓰러지게 하는지 아십니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쓰러지면 귀신이 나간 줄 알고 더 이상 그에게 사역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귀신이 바로 이것을 노리고 그냥 쓰러지개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귀신을 쫓을 때는 쓰러진다고 무조건 귀신이 나갔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참고로 살펴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귀신이 사람을 넘어뜨렸지만 사람의 몸은 하나도 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제가 한참 축사사역을 할 때는 정말 신기한 일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수백 명이 모인 장소에서 축사할 때에 사람들이 막 쓰러집니다. 그들이 콘크리트 바닥에 쓰러지지만 다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귀신이 나갈 때에 사람을 넘어뜨리지만 조금도 상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어떻게 넘어지는데 하나도 다친 곳이 없었을까요?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귀신은 우리를 죽이고 멸망시키려 왔지만 주님은 우리를 보호하시고 지켜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욥은 엄청난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욥의 생명만은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욥의 생명만 건드리지 말라고 말씀하시며 그의 생명을 지켜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따라서 마귀가 우리를 다양하게 공격할지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추석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귀신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수와 교제하지 말고 주님과 교제해야 합니다. 우리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께서 귀신을 쫓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추석을 계기로 예수께서 공생애동안 귀신을 쫓아내신 것처럼 우리도 귀신을 쫓아내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더러운 귀신을 물리치고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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