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의 균형잡힌 신앙생활을 본받아야 합니다. 행 2장 42-47 2018.11.11

//초대교회의 균형잡힌 신앙생활을 본받아야 합니다. 행 2장 42-47 2018.11.11
초대교회의 균형잡힌 신앙생활을 본받아야 합니다. 행 2장 42-47 2018.11.112018-12-03T23:59:52+09:00

Home 게시판 주일설교 초대교회의 균형잡힌 신앙생활을 본받아야 합니다. 행 2장 42-47 2018.11.11

1 글 보임 - 1 에서 1 까지 (총 1 중에서)
  • 글쓴이
  • thechurch
    키 마스터
    Post count: 364

    초대교회처럼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장 42-47절 2018년 11월 4일

    우리는 지난 번 강해를 통하여 베드로의 설교에 하루에 삼천이나 구원받는 기적이 일어나게 된 것은 베드로가 설교를 논리적으로 했거나 성경을 통하여 했다기 보다는 성령의 능력으로 전했기 때문이라고 말씀을 드리면서 우리가‘가서 제자 삼으라’는 명령에 순종함에 있어서 가장 우선적으로 관심을 갖고 구해야 할 것은 성령의 충만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가서 제자 삼으초대교회처초대교회의 균형잡힌 신앙생활을 본받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2장 42-47절 2018년 11월 11일

    우리는 지난 번 강해를 통하여 베드로의 설교에 하루에 삼천이나 구원받는 기적이 일어나게 된 것은 베드로가 설교를 논리적으로 했거나 성경을 통하여 했다기 보다는 성령의 능력으로 전했기 때문이라고 말씀을 드리면서 우리가‘가서 제자 삼으라’는 명령에 순종함에 있어서 가장 우선적으로 관심을 갖고 구해야 할 것은 성령의 충만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가서 제자 삼으라는 명령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사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가서 제자 삼으라는 명령에 순종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성령 충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어떻게 했는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본문 42절을 함께 읽습니다.“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본문은 초대교회의 네 가지 신앙 활동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먼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는 온전히 성경의 가르침을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한 마디로 옛 사람의 삶을 버리고 새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목사라는 직임의 은사를 주신 것은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바르게 할 수 있도록 가르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운동 선수들이 코칭을 받을까요? 코칭을 받지 않으면 어느 정도까지는 성장할 수 있어도 최고의 수준에는 도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혼자서 탁구를 친다고 합시다. 우리가 코칭이나 감독을 받지 않아도 얼마든지 탁구를 잘 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코칭을 받으면 훨씬 더 잘 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보지 못하는 단점을 보완하고 코치나 감독의 기량을 본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별로 차이가 없지만 코칭을 받느냐 받지 않느냐에 따라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교회에 다니며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로부터 훈련을 받지 않으면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가르침을 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신앙생활을 하면 당장은 편합니다. 그러나 가르침을 받지 않으면 믿음이 제대로 자라지 않을 뿐더러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할 수 없고 자칫 기독교 이단에 빠질 수 있습니다. 특별히 주님의 마지막 명령인 가서 제자 삼으라는 명령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먼저 가르침을 받아 제자가 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가르쳐 제자 삼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서로 교제했습니다. 교제는 서로 나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무엇으로 서로 나누었을까요?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교제했습니다. 그런데 사도가 말씀을 가르쳤기 때문에 그들이 서로 교제한 것은 말씀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교제는 말씀의 교제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으로 멈추지 말고 서로 나눠야 합니다. 깨달은 말씀을 나누지 않으면 자기 자신에게만 영향을 미칩니다. 반면에 이를 나누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제가 성동중앙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사역할 때였습니다. 당시 제가 평신도 사역자를 약 30명 훈련하였는데 매 주일 낮 예배를 마치고 오후예배를 드리기 전에 한 주 동안 큐티한 것을 발표하도록 훈련했습니다. 하루는 이영순 권사라는 분이 큐티를 하다가 받은 은혜를 간증했습니다. 그분은 방송에도 출연할 정도로 유명한 요리가 입니다. 당시는 남대문 시장에서‘비벼 먹는 돈가스’로 히트를 친 음식점의 주방장으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주일에는 평소보다 손님들이 더 많기 때문에 주인이 주일 오후에도 나와 달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다니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그분이 마태복음 4장 18-22절 말씀을 중심으로 큐티 하던 중 예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셨을 때에 그들이 즉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좇았다는 말씀에 은혜를 받고, 자신도 주일을 온전히 지키기로 결단하고 직장을 그만 둘 각오를 하고 주인에게 찾아가서 주일 오후에는 나올 수 없다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주인이 선 듯 허락하면서 월급까지 올려주더랍니다. 그리고 말씀에 순종하하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간증하자 참석자들이 모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깨달은 바를 나누지 않으면 자신에게만 영향을 미치지만 이를 나누면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설교를 통해서만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평신도들이 말씀의 교제를 나누는 것을 통해서도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목사의 설교를 통해서 은혜를 받는 것보다 평신도들의 간증을 통해서 더 큰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말씀으로 은혜 받은 것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사를 가지고 나눕니다. 매우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는 말씀으로만 교제하지 않았습니다. 44-45절을 보십시오“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이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초대교회는 서로 물질을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즉 물질의 교제를 했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이렇게 교제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당시 예수를 그리스도와 주로 고백하면 유대교에서 출교를 당해 공동체와 집으로부터 쫓겨나서 오갈 곳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믿음으로 살아가려고 하는데 물질적으로 고통을 당한다면 당연히 주의 사랑으로 돌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 공동체입니다. 세상 사람도 가난한 자를 돕는데 교회가 그 일에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는다면 이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크게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자신이 복을 받는 데만 관심을 갖지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는 크게 관심을 쏟지 않습니다. 솔직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재산을 다 내어놓고 공동체생활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작은 공동체에서는 가능합니다. 이런 공동체를 만들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세상에 소망을 주어야 합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교회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는 교제를 해야 합니다. 입으로만 사랑한다고 말하지 말고 생명같이 여기는 물질을 서로 나눠야 합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 앞에서 와서는‘랍비여’하고 입을 맞추었지만 은 30냥에 스승을 팔아버린 것처럼,“샬롬”이라고 인사하지만 성도들의 고통에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공동체는 아닙니다. 사도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7-18).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 공동체 안에서는 물질로 섬기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세 번째로, 떡을 떼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집에서 떡을 떼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46). 그런데 여기서 ‘떡을 떼었다’는 말이 성찬식을 의미하는지 또는 성도들이 함께 식사한 것을 의미하는지에 대하여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러나 저는 두 가지 모두 가능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초대교회는 집이 곧 교회였고 교회가 곧 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성도들은 가난했지만 힘이 닿는데 까지 집에서 음식을 준비해서 서로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들은 은혜 받은 말씀으로 교제하듯이 육의 양식을 가지고 사랑을 나누었던 것입니다. 음식으로 교제하면 무엇보다 서로 친밀해집니다. 같은 가족이라도 함께 식사하지 않으면 친밀감이 떨어지듯이 같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지만 함께 식사하지 않으면 가까워지지 않습니다. 식사만큼 서로의 관계를 밀접하게 해주는 것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식사를 하면 ‘너와 내가 하나다’라는 생각을 갖게 하기 때문입니다. 식사만큼 서로의 관계를 밀접하게 해주는 것이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절대로 창기와 세리와 같은 자들과는 식사를 하지 않은 것은 그들과 하나 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매주 예배 후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를 통하여 더욱 더 가까워지고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초대교회성도들이 서로 음식으로 교제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초대교회 안에는 주인도 있고 노예도 있었는데 그들이 서로 형제자매로 한 자리에 모여서 식사를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평소에는 주인의 상 옆에서 서서 시중을 들어야 하는 종이 교회에서는 주인과 동등하게 한 상에 둘러 앉아 먹고 마시는 것이 어찌 쉽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인이었던 자가 먼저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3:2). 그렇습니다.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낫게 여기는 겸손한 마음이 있어야 상대방을 가족으로 인정하고 품어주고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교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고 더 낮아져서 서로를 섬겨야 합니다.

    넷째로, 기도에 힘썼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기도하는 일에 힘을 썼습니다. 왜 초대교회가 기도하는 일에 힘을 썼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함께 전심으로 기도할 때에 성령께서 임하셨고 그로 말미암아 교회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가 기도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마땅히 교회는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들이 기도한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초대교회의 기도를 본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무엇을 기도했는지를 전후 문맥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43-47절을 다시 읽습니다.“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첫째로, 먼저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두려움’이란 헬라어로‘포보스’라고 하는데, 이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오는 두려움을 뜻합니다. 둘째로, 복음을 전할 때에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셋째로, 날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그들은 주일에만 모이지 않고 매일 모였습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가정교회였기 때문입니다. 넷째로,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실은 당시 총독이었던 플리니우스가 트라얀 황제에게 보낸 서신에 잘 나타나있습니다. 그는 박해로 인해 비밀리에 모이는 기독교 공동체를 은밀히 조사한 후‘그들은 법 이상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라고 보고하였습니다. 다섯째로, 하나님께서 구원받는 자들을 ‘날마다 더하게’ 해주셨습니다. 어떻게 날마다 구원받는 자들이 더해졌을까요? 평신도들이 날마다 삶의 현장에서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펴본 대로 이런 역사는 사람의 힘과 능력으로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이 기도한 내용이 무엇인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충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성령의 충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충만을 위해 간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기도하는 것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을 구하느냐는 것입니다. 요엘 선지자는 마지막 시대에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겠다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누가는 이렇게 말합니다.“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9-13).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하되 성령의 충만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어도 이를 구하지 않으면 그 약속은 우리와 무관합니다. 예수께서“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5)라고 하셨지만 모든 사람이 자동적으로 성령의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 약속하신 말씀을 붙잡고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10일간 간절히 기도한 자들만 받았습니다.
    그런데 본문 42절에서 주목해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전혀’라는 부사입니다. 여러분은‘전혀’가 어떤 말을 수식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말 성경에는‘전혀’가 수식하는 동사가 기도하는 것만 수식하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런데 원문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전혀 힘을 썼다는 말이 4가지 동사를 모두 수식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 것과 교제하는 것과 떡을 떼는 것과 기도하는 것에 모두 힘을 썼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4가지 모두에 힘을 써야 합니다. 그래야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도 초대교회처럼 말씀으로 가르침을 잘 받고, 교제에 힘쓰고, 물질로 섬기고, 기도에 전혀 힘써야 합니다. 이렇게 교회 안에서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해야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할 때에 하나님께서 날마다 구원받는 자들을 더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글 보임 - 1 에서 1 까지 (총 1 중에서)
  • 답변은 로그인 후 가능합니다.
책주문

게시판

최근 게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