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대적이 공격할 때에 어떻게 하죠? 느4:1-23 2014.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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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대적이 공격할 때에 어떻게 하죠? 느4:1-23 2014.4.272018-12-03T21:19:01+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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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지난 번 느헤미야3장 강해를 통하여 성벽재건공사가 순조롭게 잘 진행될 수 있었던 네 가지 이유를 살펴보았습니다. 첫째로, 성벽재건을 치밀하게 준비했고, 둘째로, 지도자부터 솔선수범했고, 셋째로, 다함께 연합을 했고, 넷째로, 힘든 일을 즐거움으로 감당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원리를 교회를 섬기는 일에 그대로 적용하면 우리 공동체가 건강하고 행복한 교회가 될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뭐죠?“주님!, 대적들이 공격할 때에 어떻게 하죠?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우리의 일을 방해하고 공격하는 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럴 때에 그리스도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살펴본 대로 성벽재건공사는 잘 진행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호사마다라는 말이 있듯이 느헤미야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성벽재건 공사를 잘 진행하고 있을 때에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것은 대적들로부터 악한 말로 공격을 받은 것입니다. 산발랏은 유다사람들이 성벽을 재건한다는 말을 듣고서 크게 분노하며 그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하게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일을 마치려는가, 불탄 돌을 흙 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2). 또한 산발랏의 신하 암몬 사람 도비야는 그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고 조롱했습니다. 왜 산발랏과 그의 신하 도비야가 느헤미야의 성벽재건을 이처럼 악한 말로 대적했을까요? 그것은 산발랏이 당시 사마리아 총독이었기 때문입니다. 산발랏이 사마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에 스룹바벨 성전이 재건되고 1, 2차에 걸쳐 포로귀환이 이루어져 수효가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예루살렘은 사마리아의 영향권 하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총독으로 새로 부임하여 성벽을 재건 공사를 하는 것을 보니 자신들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것 같자 방해 공작을 편 것입니다. 즉 시기와 질투심이 만들어 낸 미움과 증오심이 성벽재건공사를 방해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례를 예수님과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관계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얼마나 비난하고 대적했는지를 성경을 통하여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예수님을 공격했던 이유는 자기들은 아무런 능력을 행하지 못하는데 예수께서는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자 백성들의 관심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쏠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시기와 질투심으로 마음에 미움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상대방에 대하여 시기와 질투심이 생기면 미운 마음을 갖게 되어 악한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자신을 대적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12:34-35)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말이 입에서 나오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결코 상대방에게 악한 말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악한 말을 하는 것은 상대방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좋지 않게 말하고 있다면 그것은 곧 그 사람을 미워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형제를 미워하는 행위를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 3:16). 그렇습니다. 칼과 총으로만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시기와 질투가 빚어낸 미움과 증오만으로도 얼마든지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다. 오늘 산발랏과 도비야가 성벽재건공사를 방해하는 것을 보면서 혹 우리가 시기와 질투심으로 같은 지체를 미워하고 악한 말로 공격하고 있지는 아니한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그런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곧 살인죄를 범하는 것임을 깨닫고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의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  런데 느헤미야는 산발랏과 도비야로부터 악한 말을 듣고 어떻게 했습니까? 4절 상반절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느헤미야가 대적들로부터 악한 말을 들을 때에 가장 먼저 기도를 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악한 말로 공격하는 대적들을 향하여 동일하게 악한 말로 맞서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대적들을 향하여 입을 열지 않고 하나님을 향하여 입을 열었습니다. 그가 대적을 향하여 입을 열지 않고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했다는 것은 그 일을 주님께 맡겼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대적들로부터 악한 말을 들을 때에 대적과 싸우지 말고 느헤미야처럼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우리의 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23)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셨습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침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예수께서 힘이 없어서 그렇게 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러함에도 악을 악으로 대적하지 않으신 것은 악을 심판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대적하는 자들을 심판할 권리가 없습니다. 심판은 오직 하나님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억울하게 매를 맞았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여러분이 상대방을 때릴 수 있습니까? 대한민국의 법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검사가 기소하고 판사가 판결을 내리고 그 결과에 따라 형을 집행하는 것입니다.

       요즘 세월호 사고로 온 국민이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맨 처음에는 세월호 선장과 기관장과 선원들의 무책임한 행동에 국민들이 크게 분노했습니다. 그 후에는 정부가 늑장 대처를 했다고 분노가 폭발했습니다. 그러다가 지금은 구원파 교주인 유병언씨를 향하여 온 국민의 분노가 빗발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원파 교주 유병언씨가 오대양 사건과 관련되어 있고 아무리 악한 짓을 했을지라도 우리는 그의 죄악을 징벌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의 악행을 보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주님께 심판을 맡기는 것입니다. 오늘 찬송가 539장의 가사처럼 주님께 조용히 나가 마음을 쏟아놓는 것입니다.” 악한 자들에게 던지고 싶은 말을 하나님께 쏟아 부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악을 대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목사 둘이 각각 문제가 심각한 교회에 부임을 하였습니다. 한 목사는 교회에 부임한 날로부터 교회에 문제를 발생시킨 사람들을 불러다가 시시비비를 가렸습니다. 목사의 조리 있는 말과 논리에 당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시비비를 가리고 나자 교회에 남은 교인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목사는 시끄러운 문제에 대하여 전혀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스스로 잘못을 회개하고 돌이키자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만나든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님께 기도로 맡기는 것입니다. 기도의 아버지 죠지 뮬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릎으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아직 기독교 신앙의 ABC도 모르는 사람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를 만나든 기도로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대적들의 공격을 당할 때에 어떻게 기도할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14절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14절 말씀을 읽도록 하겠습니다.내가 돌아본 후에 일어나서 귀족들과 민장들과 남은 백성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 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느헤미야가 귀인들과 민장과 남은 백성들을 책망할 때 한 말인데, 여기서 우리는 느헤미야가 하나님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지극히 크신 분이라고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문제 앞에서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 그가 당하는 문제보다 하나님이 크신 분이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이신 하나님은 지극히 크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문제를 만나도 하나님께 기도하면 해결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에 봉착해 있어도 그 문제보다 하나님께서 크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정말 믿는다면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12명의 가나안 정탐꾼에 관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열두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보냈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자들 중에 10명은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13:33). 그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나님보다 문제를 더 크게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렇게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하나”(14:9). 여호수아와 갈렙이 이렇게 말한 것은 문제보다 하나님을 더 크신 분으로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보다 문제를 크게 본 10명의 정탐꾼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보다 하나님을 크게 본 자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가나안 땅을 차지했습니다. 불신앙은 문제를 극대화시키지만 신앙은 주님을 더 크게 보이게 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믿음은 문제보다 주님을 더 크게 보게 하여 기도하게 하여 성공하게 하지만 불신앙은 주님보다 문제를 더 크게 보이게 하여 기도하지 못하게 함으로 실패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잘 알고 있습니다. 둘의 싸움은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다윗이 골리앗의 목을 벨 수 있었습니까? 다윗은 골리앗보다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더 크신 분이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문제를 만나든 절망하지 말고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하므로 해결을 받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를 만나든지 당면한 문제보다 하나님께서 더 크심을 믿고 기도함으로 문제를 해결 받아야 합니다.

       다음은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지극히 두려운 분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느헤미야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을 받을 정도로 친밀한 관계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왜 하나님을 두려우신 분으로 인식하고 있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자신의 모든 행위를 심판하신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단지 이 땅에서만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후의 세계에서도 영원히 주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10:28)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무슨 이유로 심판하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종은 주인에게 반드시 결산을 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에 반드시 심판대 앞에 서서 선악간의 행위에 대하여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물론 이 심판은 천국과 지옥을 결정하는 심판은 아닙니다. 상급에 관한 심판입니다. 느헤미야는 그의 행위가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서 칭찬을 받을 수도 있고 책망을 들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적들이 성벽재건공사를 방해할 때에 자기의 생각과 감정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자기 인생의 최종 심판자이심을 안다면 주님의 뜻대로 살기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기도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도하면서 성벽재건과 관련된 일을 아주 열심히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기도하면서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적들을 방어하기 위해 파수꾼을 두어 주야로 방비했습니다(9). 또한 성 뒤 낮고 넓은 곳에 백성으로 그 종족을 따라 칼과 창과 활을 가지고 서있도록 했습니다(13). 또한 일하는 자에게 한 손은 연장을 가지게 하고, 한 손은 병기를 들게 하였습니다(17). 또한 밤중에도 옷을 벗지 아니하고 물을 길으러 갈 때도 병기를 잡게 하였습니다(23). 이처럼 느헤미야가 대적의 공격을 받고 기도만 하지 않고 경계를 강화하고 계속해서 성벽재건 공사에 최선을 다한 것을 통하여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할지라도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한다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게을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영국이 나치의 공격으로 위협을 받게 되자 사람들이 불안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때 영국 수상 처칠은 주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한 후 백성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백성 여러분, 기도합시다. 그리고 눈물과 땀을 흘리며 싸웁시다!” 그렇습니다. 기도만 한다고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고 주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싸워야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참된 기도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듯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문제가 생기면 통닭 신자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는 하지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을 비꼬는 말입니다. 물론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힌 상황에서 그들은 할 것은 기도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 밤중에 기도하고 찬미하자 지진이 나면서 옥터가 움직이고 매였던 쇠사슬이 풀어지고 착고가 풀리는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 갇혔을 때에 그가 할 수 있는 것도 기도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하자 구출되는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처럼 기도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는 기도만 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도 말고 또 다른 것을 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기도만 하고 있으면 안 됩니다. 만일 여러분이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기도만 하고 있으면 안 됩니다. 시장 조사를 하고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서 조언을 경청해야 합니다. 건강이 좋지 않아 기도하는 분이 있다고 합시다. 기도만 하면 안 됩니다. 최선을 다해 자신의 몸에 맞는 운동 방법을 찾아 꾸준히 노력해야 합니다. 시험을 앞 둔 학생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시험을 잘 볼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공부해야 합니다. 수능시험을 치룰 때에 많은 학생들이 실패하는 것은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서 부모나 자신의 기도를 지나치게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부끄러운 간증을 하겠습니다. 제가 법대 재학시절의 일입니다. 당시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통합측 교회 서리집사로 임명을 받을 정도로 열심히 교회 일을 했습니다. 3학년 학기말 시험을 앞두고 있었는데 교회 봉사로 제대로 공부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 한 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 봉사했으니까 주님께서 나를 도우셔서 시험을 잘 보게 하실거야!” 왜냐하면 제가 전도해서 같이 교회에 다니던 학생 중에 박양우가 있었는데 그가 행정고시를 볼 때에 성령께서 그의 손을 움직여 답안지를 작성하게 하심으로 대학교 3학년 때에 고시에 합격한 것을 제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친구는 김대중 정부에서 국내 최연소 차관이 되기도 했습니다. 저에게도 그런 기적이 일어날 것을 확신했습니다. 드디어 월요일 시험을 보았습니다. 민법총론 과목인데 제대로 공부를 하지 않아 답안 제대로 작성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D학점을 맞았습니다. 그 학점이 평생 저를 따라 다니고 있습니다. 그때에 제가 성적표를 받아들도 주님께 물었습니다. “왜 박양우가 행정고시 볼 때에는 손을 움직여서 답을 잘 쓰게 하시면서 왜 저는 주님께 충성을 다했는데 안 도와주셨습니까?” 그 때에 주님께서 저에게 이런 감동을 주셨습니다. “박양우가 시험 준비를 얼마나 철저히 했는지 아느냐그 때에 제가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주님께 아무리 헌신을 해도 내가 할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달란트 비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에 종들을 불러서 자기 소유를 맡겼습니다. 각각 그 재능대로 어떤 종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또 어떤 사람에게는 금 두 달란트를 또 어떤 사람에게는 금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자들은 즉시 가서 장사를 하여 각각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남겼지만, 한 달라트를 받은 자는 즉시 가서 땅을 파서 그곳에 감추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 주인이 돌아와서 그 맡긴 것을 셈할 때에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자들은 각각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남겼다고 보고하자 주인은 그들에게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내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라고 칭찬을 했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를 받아 땅에 묻었던 자는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땅에 묻었다가 다시 드립니다라고 하자, 주인은 한 달란트를 준 종에게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은 줄로 네가 알았느냐라고 책망을 하였습니다. 이 비유를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나님 앞에서는 악한 짓을 하는 것만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도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도하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최선을 다해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게으르면 안 됩니다. 게으름은 죄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기도하고 최선을 다하여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해야 이 세상에서도 성공하고 천국에서 영원히 면류관을 쓰고 왕 노릇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공격하는 대적들과 직접 다투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이유를 알았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악을 심판하는 심판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도하지만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고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은 죄를 범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61구삼행복축제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기도하고 부지런히 대상자를 찾아가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부흥의 역사를 경험하게 하실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기도하고 최선을 다해 노력함으로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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