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사명은 주님의 방법으로 이루신다 행 25장 1-12절 2020.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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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사명은 주님의 방법으로 이루신다 행 25장 1-12절 2020. 8.22020-08-02T10:13:54+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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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 사도행전 24장 10-27절을 통해서 몇 가지 주의 교훈을 들었습니다. 간단히 살피고 오늘 본문을 통하여 주의 음성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왜 더둘로와 바울의 변론 자세가 달랐느냐는 것입니다. 서로 변론의 목적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더둘로는 돈을 버는 자이기 때문에 총독 벨릭스에게 거짓으로 변론했지만, 바울은 복음을 증거하는 자이기에 사실에 입각하여 변론했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따르는 자들이기 때문에 자신의 유익을 위해 거짓 증언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로, 바울이 총독 베스도 앞에서 논리적으로 치밀하게 변론한 것을 통하여 무엇을 깨달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성공하려면 철저히 준비해야 하듯이 우리가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려면 평소 복음으로 무장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3분복음메시지’를 암송하는 것은 바로 복음을 전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바울이 벨릭스 총독 앞에서 자신이 정치범이 아닌 것을 집중해서 변론한 것을 통하여 무엇을 깨달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당연히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에게 가정도, 직장도, 사업장을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영혼 구원에 포커스를 맞추고 살아야 영원히 성공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성경뿐 아니라 교회사적으로 가장 위대한 인물로 평가를 받는 것은 예수님처럼 영혼 구원하는 그의 생애를 불살랐기 때문입니다.

    넷째로, 바울이 벨릭스 총독 앞에서 복음을 전했지만 아무 결과가 없는 것을 통하여 무엇을 깨달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하지만, 그 결과는 오직 주님께 맡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도의 열매에 괘념치 말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베스도가 벨릭스의 후임으로 총독 관저가 있는 가이사랴에 왔다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바울을 고소합니다(1-3절). 우리가 알다시피 대제사장은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본문에는 ‘대제사장들’이라고 되어 있을까요? 이스라엘에는 역대 77명이 대제사장이 있었는데 당시 대제사장은 제71대 이스마엘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따라 대제사장직을 계속해서 종신직으로 여겼는데(민 35:25), 로마 정부에 의해 새로 임명된 대제사장이 있었고 기존의 대제사장도 대제사장이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바울을 고소한 내용은 한마디로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겨서 재판하도록 해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지만 40여 명의 유대인 암살단이 매복하여 바울을 예루살렘에서 가이랴로 옮길 때 죽이려고 했지만, 이런 정보를 미리 안 천부장 루시아가 밤에 가이사랴로 호송하는 바람에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반대로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바울을 올라오도록 해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2년이 지났는데도 그들이 바울을 죽이려는 이유가 무엇이냐?” 그것은 바울만 죽이면 기독교의 확산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마귀의 조종을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들은 소위 하나님을 믿는다는 유대교 신봉자이므로 그들이 믿는 경전은 타나크입니다. 타나크의 핵심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의 가르침과 정반대로 행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마귀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성경은 마귀가 하는 일은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 10:9). 따라서 누군가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고 있다면 우리가 성령의 영향을 받지 않고 마귀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은 화해의 영이고 용서의 영이지만 마귀는 이간과 정죄의 영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미움과 정죄의 영이 떠나고 용서와 화해의 영이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베스도 총독이 대제사장들과 유대인들의 요구에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4-5입니다. 베스도가 대답하여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류된 것과 자기도 멀지 않아 떠나갈 것을 말하고 또 이르되 너희 중 유력한 자들은 나와 함께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만일 옳지 아니한 일이 있거든 고발하라 하니라.” 베스도는 그들의 제안을 일언지하 거절했습니다. 당시 베스도가 예루살렘에 온 것은 유력지도자들과 상견례를 갖기 위해서입니다. 왜 상견례를 합니까? 서로 잘 협력하기 위해서 입니다. 베스도 총독이 그런 자리에서 그들의 요구를 일언지하 거절하기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새로 부임을 해서 유대인의 특성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그렇게 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정무 감각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9절을 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이유에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당시 베스도 총독이 제일 높았기 때문에 사람 중에는 그에게 이일을 명령할 자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외에는 이 일을 명령하실 분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베스도의 마음을 움직이셨기 때문에 그가 그들의 제안을 거절한 것입니다. 잠언 211을 읽습니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 그렇습니다. 세상의 모든 권력이 왕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스도가 신임 총독으로 부임하면 반드시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자기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하여 중도에서 죽일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고, 하나님께서 베스도의 마음을 움직이시도록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베스도의 마음을 움직이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따라서 세상적인 방법으로 결재권자를 움직이려고 하지 말고 기도로 하나님을 움직여야 합니다. 이런 은혜를 받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바울은 베스도의 물음에 어떻게 대답합니까? 10-11절을 읽습니다. “바울이 이르되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줄 수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한대.” 베스도가 유대인의 제의를 단호히 거절했듯이 바울도 베스도의 제의를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베스도의 제의를 받고 대답하는 과정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그렇게 말한 데는 나름대로 판단 기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무엇에 근거하여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요? 그것은 바로 그의 사명입니다. 그가 하나님께 받은 사명이 무엇입니까? 이는 사도행전 915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즉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복음을 전할 사명입니다. 그는 이 사명을 알고 있기에 베스도 총독의 제의를 받았을때에 단호하게 가이사에게 상소한다고 한 것입니다. 바울도 인간인지라 잠시라도 자유를 누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포기하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황제에게 상소한다고 한 것입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그런데 그 선택이 별로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때도 있지만, 영원히 영향을 미치는 때도 있습니다. 복음 전도 사명을 갖고 선택하는 것은 영원히 영향을 미칩니다. 사명은 목숨보다 강합니다. 여러분 앞에도 계속해서 결정할 일이 놓여질 것입니다. 그때마다 복음전도의 사명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 결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복음 전도의 사명을 모든 일의 선택 기준으로 삼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명이 불타올라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될까요? 평소 이 사명을 반복해서 말하고 들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베스도 총독 앞에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황제 앞에서 복음을 전할 사명이 있다는 것을 반복해서 말하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921을 읽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사도행전 2311을 읽습니다.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왜 우리의 사명을 반복해서 말하고 들어야 할까요? 그렇게 반복하지 않으면 사명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이 날마다 이미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고 전도하기를 그치지 않은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세상일에 온 마음을 쏟다 보면 자신이 누군지 조차 생각하지 않고 사는데 어찌 복음 전도의 사명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또 예수께서 구원자이심을 믿더라도 실제로는 돈을 구원자로 생각하고 살아가는데 어떻게 복음 전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무의식 세계까지 지배하도록 우리의 사명을 계속해서 듣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무엇에 근거하여 베스도의 제의를 거절하면서 황제에게 상소한다고 말했느냐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것은 로마법에 근거한 것입니다. 바울은 재판이 총독의 판결로 끝이 아니고 로마 황제에게 직접 상소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이를 주장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바울은 황제 앞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로마 시민의 권리를 사용한 것입니다. 우리는 두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는 대한민국 시민이고 다른 하나는 천국 시민입니다. 두 나라 시민으로 각각의 권리와 의무가 있습니다. 제가 평소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자녀는 두 가지 권리가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는 양육청구권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청구할 권리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권리를 떳떳이 사용해야 합니다. 어떻게 사용할 수 있을까요? 기도하면 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4:6).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50:14). 그렇습니다. 우리는 기도로 양육청구권을 사용하면 이 세상의 염려와 걱정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다른 하나는 재산상속권입니다. 이는 우리가 죽으면 천국에 들어갈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죽기 전에 사용하는 방법이 있는데, 이는 장차 천국에 들어갈 소망을 갖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이 소망을 가지면 이 세상의 그 어떤 문제를 만나도 걱정하거나 염려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두 가지 권리를 사용하는 범위를 확장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이 세상에서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이 권리를 사용하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지 말고 더 확장해야 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주로 로마 시민권을 사용했듯이 우리도 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만 양육청구권을 사용하지 말고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즉 전도해야 할 대상자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장차 천국에 들어갈 소망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기도 제목에 전도대상자가 있습니까? 곧 천국에 들어간다는 소망이 있기에 담대히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까?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주장하여 담대히 황제 앞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듯이 우리도 이 두 가지 권리를 사용하여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성공해야 합니다.

    끝으로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한다고 하자 베스도가 어떻게 했습니까? 12을 읽습니다.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이르되 네가 가이사에게 상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니라.” 베스도는 바울이 요구대로 황제 앞에서 재판을 받으라고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로써 오랜 세월 유대인과의 실랑이는 일단 마무리되고 로마 황제 앞에서 서게 되었습니다. 그가 로마 황제 앞에 선다는 것은 황제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로마 황제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면서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로마 황제 앞에서도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이 누구로부터 촉발되었습니까? 유대인들입니다. 즉 바울을 죽이려던 자에 의해 임금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은 그분의 방법으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임금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이 자신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에 의해 이루어지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더군다나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 황제 앞에 서서 복음을 전하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2030123007000비전’도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집니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인생의 주인도 하나님이시므로 모든 것이 그분의 뜻대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사건 하나하나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하나님의 눈으로 모든 사건을 해석해야 합니다. 코로나19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장은 교회들이 휘청거리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것을 통하여 교회를 새롭게 하시고 세계 복음화를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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