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전심으로 사랑할 이유 있습니다 누가복음 7:36-50 2016.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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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전심으로 사랑할 이유 있습니다 누가복음 7:36-50 2016. 2. 282018-12-03T23:03:31+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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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 세례요한의 질문에 예수께서 답하신 것을 통하여 우리가 어떻게 하면 시험에 들지 않을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구원방법과 사람의 구원방법이 다름을 알아야 합니다. 세례요한이 잠시나마 시험에 든 것은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를 기대했는데 고난 받는 메시아로 사역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세상의 복의 개념과 성경의 복의 개념이 다름을 알아야합니다. 세상에서는 원하는 대상이 많아질수록 복을 받았다고 말하는데, 반하여 성경은 주님과의 관계가 친밀할수록 더 큰 복을 받은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세례요한을 가장 위대한 자라고 하셨지만, 우리가 그보다 더 큰 자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는 예수님을 예비한 자에 불과했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마음에 주로 모시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두 가지 면에서 성경적인 개념을 따르면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우리가 종종 시험에 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좇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한 여인이 시몬의 집에서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일로 일어난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의 집의 식사에 초대를 받으셨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대부분 예수님께 대하여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본문에 등장하는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식사에 초청할 정도로 호의적이었습니다.
    당시 잘 사는 유대인들은 ‘口’자로 집을 지어 그 가운데 마당을 만들어 우물을 파고 꽃을 심어 화단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마당에 손님을 초청하여 식사를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특별히 랍비들을 초대하여 식사할 경우에는 동네 사람들이 몰려들어 랍비의 말을 듣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시몬의 집에도 랍비이신 예수께서 오신다는 소문을 들리자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37절). 그런데 그는 어떤 여인이었습니까? 죄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도덕적으로 타락한 삶을 살아 주위사람들로 손가락질을 받고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죄인으로 낙인이 찍히면 이방인 취급을 당했기 때문에 성전예배는 물론 회당에도 다닐 수 없었고, 랍비들은 이런 죄인에게 1.8m이상 떨어져야만 했습니다. 또한 죄인이 죽은 경우는 사람들이 울지도 않았고, 무덤도 만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죄인이었지만 예수님의 등 뒤로 가서는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당시 유대 여자들은 사람들 앞에서 자기 머리를 풀어 내리는 것을 큰 수치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기 머리를 풀어 내렸고, 그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발에 입 맞추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입 맞추다’는 헬라어 원문에 미완료 시제로 되어있습니다. 이는 ‘반복적인 행동’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즉 이 여인이 한 번만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지 않고 계속해서 맞추었습니다. 그녀가 입을 계속해서 맞춘 것은 예수님께 뜨거운 사랑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녀가 부었던 향유는 석회석의 일종인 ‘알라바스터’라는 석재로 만든 용기에 담겨져 있었습니다. 이 향유는 매우 귀한 향료로서 한번 용기를 개봉하면 그 자리에서 다 사용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아주 특별한 일이 아니면 개봉하지를 않았습니다(요 12:5). 그런데 그 여인은 옥합을 열어 예수님께 부어드렸습니다. 이것은 그녀가 주님께 모든 것을 바쳐서 섬겼다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향유를 머리에 부었지만 이 여인은 발에 부었습니다. 이것은 자신을 지극히 낮추는 자세로 주님을 섬겼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이 이렇게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 여인은 죄인이므로 자신이 예수님의 식사 자리에 나타나면 뭇사람의 따가운 시선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이 여인에게 믿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어떻게 이 여인에게 이런 믿음이 생겼는지에 대해 문자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유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녀가 사람들로부터 예수께서 행하신 일들을 듣고서 예수께서 메시아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일을 들으면 믿음이 생깁니다. 다른 사람이 고침을 받았다는 말을 들으면 자신의 병도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듭니다. 그런데 저는 이 여인이 이렇게 행동한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여인이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세리 마태는 예수님을 만난 후 너무 기뻐서 자신의 집에서 예수님과 함께 죄인과 세리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아마 이 여인도 그 잔치자리에 초대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예수께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라고 말씀하신 것을 들었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그녀는 예수께서 바로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하러 오신 메시아이심을 깨닫고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가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 생기고, 믿음이 있어야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지만 주님께 온전히 헌신하지 못하는 것은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으므로 믿음이 크게 자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처럼 말씀을 가까이 하므로 저와 여러분의 믿음이 크게 자라고 그 믿음이 행함으로 이어지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돌발적인 행동에 가장 당황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는 다름 아닌 예수님을 그 자리에 초청한 시몬이었습니다. 39절을 읽어보시겠습니다.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시몬이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초청한 이유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혹 선지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그의 말을 들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예언을 사모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시몬도 예수께서 선지자라고 생각하여 그를 통하여 자신의 장래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고 싶어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렇게 하시지를 않자 속으로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아시고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시몬에게 ‘탕감 받은 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예수께서 시몬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41-42). 그러자 시몬은 곧 바로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네 판단이 옳다”고 하시면서 말씀하신 것이 44절-46절입니다.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않았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시몬은 자신을 제대로 대접해주지 않았지만 여인은 자신을 제대로 대접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즉 시몬은 자신을 선지자 중의 하나로 대접했지만 이 여인은 자신을 메시아로 알고 대접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께서 자신을 대접한 시몬에게 기분이 나쁘셨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들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단지 예수께서 시몬에게만 말씀하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시몬처럼 주님을 대접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주님을 만왕의 왕으로 대접해드리지 않고 홀대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마음과 힘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드리지 않는다면 시몬처럼 주님으로 대접해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주님을 만홀히 대하지 않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단지 주일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면 안 됩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주님을 만홀히 여기면 안 됩니다. 주님을 최고의 자리에 앉혀드려야 합니다. 귀찮은 대상으로 대접해드리지 말고 최고로 존경하는 분으로 대접해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왜 그 여인이 자신에게 향유를 부었는지를 설명하셨습니다. 47절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작게 사랑하느니라.” 본문에서 ‘사하여졌다’는 동사는 완료형으로 모든 죄를 사함 받아 지금은 깨끗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여인이 모든 죄를 사함 받은 이유를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이 말씀은 언 듯 보기에 사랑을 많이 해야 죄 사함을 많이 받는다는 말로 들립니다. 카톨릭에서 사용하는 공동번역도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여 사랑의 행위가 많으면 죄 사함을 많이 받고, 사랑의 행위가 적으면 적게 사함을 받는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그렇게 이해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주신 것은우리의 선한 행실에 기초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우리의 행위에 따라 하나님의 사죄가 좌지우지되는 것으로 해석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자신이 죄를 용서받은 것을 깨달은 만큼 주님을 사랑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이 말씀을 하신 후,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죄 사함을 받은 것과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비례합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바쳐서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지 않는 것은 자신이 얼마나 큰 죄를 용서받았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얼마나 큰 죄를 용서받았는지 아십니까?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두려움과 고통과 저주 속에서 살아야 하고 죽은 다음에는 지옥에 던져져 영원히 고통당해야만 합니다. 한마디로 지옥에 던져져 영원히 고통을 당할 정도로 큰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이것을 깨달을 때에 이 여인처럼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죄 사함을 받은 것을 확신하는 것과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비례합니다. 우리는 지옥에 던져져 영원히 고통을 당해야 할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지 못하고 세상에 얽매어서 사는 것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죄 사함 받은 감격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죄 사함 받은 감격을 회복하여 주님을 더욱 더 뜨겁게 사랑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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