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우리를 낮추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신다 사도행전 25장 13~27절 2020. 8. 9

//주님은 우리를 낮추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신다 사도행전 25장 13~27절 2020. 8. 9
주님은 우리를 낮추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신다 사도행전 25장 13~27절 2020. 8. 92020-08-09T09:55:56+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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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 사도행전 25장 1-12절을 통해서 몇 가지 주의 교훈을 들었습니다. 간단히 살펴보고 오늘 읽은 본문을 통하여 주의 음성을 듣겠습니다.

    첫째로, 유대교 지도자들이 2년이나 지났어도 바울을 죽이려고 한 것을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타나크의 핵심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인데 그들이 이와 정반대로 행했다는 것은 마귀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 사랑이므로 우리가 아무리 대단한 일을 해도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다면 성령의 지배를 받지 않고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깨닫고 돌이켜야 합니다.

    둘째로, 어떻게 바울이 베스도 총독의 제의를 일언지하 거절할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그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로마 황제 앞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명감이 투철하면 사명을 모든 것을 판단할 때 기준으로 삼습니다. 그런데 사명감이 투철하려면 계속해서 사명을 듣고 말해야 합니다. 제가 주님의 지상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셋째로,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로마 시민의 권리를 사용했는데 우리는 두 가지 권리를 주로 무엇을 위해 사용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지금껏 양육청구권과 재산상속권을 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용했는데 이제는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두 가지 권리를 사용해야 합니다.

    넷째로, 바울의 사명은 가이사 앞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인데 그것이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게 된 것을 통하여 무엇을 깨달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전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당장 눈앞에 벌어진 상황만 보고 일희일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D3비전도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가실 것입니다.

     

    베스도가 바울의 재판을 마치고 나서 수일이 지난 후 갈릴리와 베레아 지방의 분봉왕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신임총독 베스도를 방문하기 위해서 가이사랴를 찾아왔습니다. 아그립바 왕은 정확히 말하면 ‘마르쿠스 율리우스 아그립바 2세(Marcus Julius Agrippa II)’입니다. 그는 예수님 탄생하실 때 2살 이하의 아기들을 다 죽이고 세례 요한의 목을 쳤던 헤롯 대왕의 증손자입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아그립바 1세는 야고보의 목을 벤 사람입니다. 그는 갈릴리와 베레아의 분봉왕이면서 예루살렘 성전 감독권과 대제사장 임명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을 아나니아에서 이스마엘로 교체한 사람이 바로 이 왕입니다. 그는 버니게와 함께 왔습니다. 버니게는 두 번 결혼했다가 파혼하고 오빠인 아그립바와 동거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로마의 황제가 된 티투스 장군의 정부가 될 정도로 성적으로 매우 타락한 여인입니다.

    여러 날이 지나서 베스도가 아그립바와 버니게에게 바울에 대해 말합니다. 14-18을 읽습니다. 여러 날을 있더니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왕에게 고하여 이르되 벨릭스가 한 사람을 구류하여 두었는데, 내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고소하여 정죄하기를 청하기에 내가 대답하되 무릇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고소 사건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내주는 것은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 하였노라. 그러므로 그들이 나와 함께 여기 오매 내가 지체하지 아니하고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아 명하여 그 사람을 데려왔으나 원고들이 서서 내가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혐의는 하나도 제시하지 아니하고.”

    다시 15절을 읽습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고소하여 정죄하기를 청하기에.” 여기서 ‘고소하여 정죄하기를’에 주목해야 합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바울을 재판하기도 전에 유죄를 확정해주기를 베스도에게 요청했다는 것입니다. 형사법상 ‘무죄 추정의 원칙’이 있습니다. 이는 아직 죄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나 형이 확정되기 전에는 피고인을 죄인으로 대우하거나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즉 재판을 통하여 유무죄를 확정해야 하는데 유대인들은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바울을 죽이겠다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베스도에게 사형을 확정해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당시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또 우리나라 유신 독재 때만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검언유착과 권언유착과 정언유착으로 시끌벅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안타깝게도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일이 교회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성경의 방법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즉 ‘가서 제자 삼으라’는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제자 삼지 않고 건물을 크게 짓고 사람들을 그 안에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명령에 정면으로 대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일이라는 명목으로 불법을 자행하고 있지는 아니한지 점검해야 합니다. 코로나19는 지금까지의 불법을 회개하고 성경적인 방법으로 돌아가라는 사인입니다.

    다음은 16절입니다. “내가 대답하되 무릇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고소 사건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내주는 것은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 하였노라.” 무슨 말입니까? 베스도가 유대인들이 바울을 정죄하여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겨달라는 요구에 그렇게 하는 것은 로마법에 저촉되기에 이를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랬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앞서 살펴보았지만, 베스도는 로마법에 근거하여 유대종교 지도자들의 제의를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울이 로마법을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왜 베스도가 이렇게 말했을까요? 이는 17-18절을 보면 눈치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나와 함께 여기 오매 내가 지체하지 아니하고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아 명하여 그 사람을 데려왔으나 원고들이 서서 내가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혐의는 하나도 제시하지 아니하고.” ‘내가 지체하지 아니하고 이튿날’, ‘내가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혐의는 하나도 제시하지 아니하고”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자신은 일을 신속히 처리하고 또 통찰력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기를 자랑한 것입니다. 따라서 베스도가 로마법에 따라 일을 처리했다고 말한 것도 법에 따라 일을 제대로 있다고 자랑한 것입니다. 베스도가 그 자리에 오른 것 자체가 자랑거리입니다. 그런데 그가 계속해서 자랑거리를 늘어놓는 것을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자랑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랑은 교만의 증상이고 교만하면 망하기 때문에 잘 될수록 낮아져야 합니다.

     

    베스도는 계속해서 바울의 소송이 어느 단계에 와있는지를 설명합니다. 19-21절입니다.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 내가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심리할는지 몰라서 바울에게 묻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일에 심문을 받으려느냐 한즉, 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 주기를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지켜 두라 명하였노라 하니.”

    베스도는 바울의 소송 건은 한마디로 유대인들의 종교 문제에 관한 것인데, 특히 바울이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주장해서 발생한 것이고, 바울이 황제에게 판결을 받도록 요청하므로 자신이 바울을 헤롯 궁에 지켜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베스도가 이렇게 말한 것을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베스도는 양쪽 주장을 다 듣고서 바울이 아무 죄가 없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베스도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죄판결을 내리고 재판을 종결지으면 됩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20절입니다. “내가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심리할는지 몰라서 바울에게 묻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일에 심문을 받으려느냐 한즉.” 베스도가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일에 심문을 받으려느냐?”고 물은 것은 고도의 정치적인 발언입니다. 바울을 고소한 유대교 지도자들을 의식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질문에 어떻게 답했습니까? 황제에게 판결을 받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사실 베스도는 바울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간다든지, 아니면 가이사랴에 그대로 있겠다든지 둘 중의 하나로 답할 줄 알았는데 가이사에게 상소한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재판에 더이상 관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사람은 자기 꾀에 넘어가기 쉬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의 계산대로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의 주인이 우리 자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계획과 계산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아그립바 왕이 총독 베스도의 말을 듣고서 바울의 말을 직접 듣겠다고 하자, 베스도는 곧바로 이튿날 바울에 대한 청문회를 엽니다. 22-23을 읽습니다. 이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베스도가 이르되 내일 들으시리이다 하더라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와서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접견 장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 그리고 그를 수행한 그의 대신들, 총독 베스도와 천부장들, 그리고 가이사랴 시의 높은 사람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바울이 불리어 나옵니다. 아그립바와 버니게는 접견 장소에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왔습니다. ‘접견 장소’(아크로아테리온)는 재판장이 아니라 공청회나 청문회장과 같은 곳으로 심문을 위해 마련된 곳입니다. ‘위엄’의 헬라어는 ‘판타지아’(fantasia)인데 ‘과시’, ‘허영’이라는 뜻입니다. 베스도는 그 자리에 바울을 데려오라고 명령했습니다. 당시 그곳에 불려 나온 바울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교회 전승에 의하면 바울은 키가 작았고, 대머리였고, 눈썹은 일자였고, 코는 매부리코였고, 다리는 안짱다리였다고 합니다. 게다가 2년 동안 감옥에 있었기에 외적으로는 볼품이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매우 초라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화려함과 초라함이 당시 청문회장의 모습입니다. 왜 누가는 이렇게 바울의 접견 장소를 대조적으로 묘사했을까요? 바울이 이 세상의 권력 앞에서 초라한 모습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에서 대단한 성공을 해서 그것으로 복음을 전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현재 있는 모습으로 복음을 전하기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약할 때 곧 강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잘나갈수록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조그마한 공동체가 전 세계를 향해 복음을 외치는 것이 주님의 방법입니다.

    아그립바가 바울을 데려오라고 하자 베스도가 공개적으로 말합니다. 24-27입니다. 베스도가 말하되 아그립바 왕과 여기 같이 있는 여러분이여 당신들이 보는 이 사람은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되 살려 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여 예루살렘에서와 여기서도 내게 청원하였으나 내가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그러나 그가 황제에게 상소한 고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나이다. 그에 대하여 황제께 확실한 사실을 아뢸 것이 없으므로 심문한 후 상소할 자료가 있을까 하여 당신들 앞 특히 아그립바 왕 당신 앞에 그를 내세웠나이다. 그 죄목도 밝히지 아니하고 죄수를 보내는 것이 무리한 일인 줄 아나이다 하였더라.”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여야 한다고 말해서 이를 살펴보았지만 죽일 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황제에게 재판받게 해달라고 했기에 상소할 자료라도 찾을까 하여 자리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을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베스도가 바울이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27에서 뭐라고 말합니까? ‘죄수’라고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판결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피의자이지 죄수가 아닙니다. 그런데 왜 바울을 죄수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유대 종교지도자의 저주에 걸려들었기 때문입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바울을 베스도에게 고소할 때부터 정죄했습니다. 즉 재판을 통해서 죄목이 나오기도 전에 사형에 처할 죄인이라고 고소했습니다. 베스도는 그들의 말에 사로잡혀서 죄수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선지식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먼저 들은 말이 지식이 되어 우리의 생각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이를 선입견이라고 합니다. 왜 우리나라가 이토록 양분되어 있습니까? ‘선지식의 마법’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진보의 주장은 맞고 보수의 주장은 틀린다는 이분법적 사고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진리를 좇는 자들이기 때문에 선지식의 마법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의 선입견이 바른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은 왜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베스도 총독이 바울의 죄를 발견하지 못하자 아그립바 왕 앞에서 심리한 것을 기록했다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아무런 죄가 없으신 예수께서 총독 빌라도 앞에서 심문을 받으신 것처럼 바울도 죄가 없지만 총독 베스도 앞에서 심문을 받고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자도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제자는 스승의 길을 따르는 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해주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7:13-14). 우리는 주님의 제자로서 멸망의 길을 버리고 생명의 길을 선택한 자들입니다. 주님께서 억울하게 고난당하셨기에 우리가 억울하게 고난당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어떤 일을 당하든지 예수님을 생각하고 주님을 따라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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