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 집중하면 모든 시험을 이깁니다. 느6:1-19 2014.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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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 집중하면 모든 시험을 이깁니다. 느6:1-19 2014.6.152018-12-03T21:22:16+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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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지난 주 원망으로 내부갈등이 표출되었을 때에 느헤미야가 어떻게 해결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느헤미야는 백성들의 원망을 듣고 즉시 그들의 고통에 동참했고,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여 원망을 다루었고, 삶의 본을 보임으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특별히 원망한 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고 오히려 원망을 제공한 귀인과 민장들이 책망을 받은 것을 통하여 원망을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동안은 원망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고 위협해서 무조건 입을 막으려고 했지만 원망에는 두 종류가 있음을 알고 원망의 원인이 영적지도자들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오히려 영적지도자들이 회개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러분은 한 주간 동안 어떻게 사셨습니까? 누군가의 원망의 소리를 듣고 마음을 돌이키셨습니까? 신앙의 경력이 많을수록 원망의 대상이 아니라 감사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은 예루살렘 성벽공사가 완성되기 바로 직전 불어 닥친 위기를 느헤미야가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벽재건을 코앞에 두고 세 차례나 위기를 겪습니다. 그러나 모든 위기를 극복하고 결국 공사 52일 만에 완공을 했습니다. 그가 어떻게 세 번의 위기를 극복했는지를 살펴보고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로, 거짓 대화 제의의 시험을 이겼습니다. 어느덧 예루살렘 성벽공사가 거의 마무리 단계에 있었습니다. 이제 문짝만 달면 되는 찰나에 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잠시 공격을 멈추었던 산발랏과 도비야가 다시 공격을 해왔습니다. 그들이 새롭게 세운 공격전략은 서로 만나서 대화를 하자는 것이었습니다(2). 우리가 아는 대로 서로 대화를 한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대화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대화가 문제를 꼬이게 하고 어렵게 만들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만일 느헤미야가 대화를 통하여 문제를 해결할 생각으로 그들의 대화제의에 수용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죽임을 당했을 것이고 성벽재건은 완성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대화를 하자는 제의에 무턱대고 수용을 해서는 안 됩니다. 대화의 진정성이 있는지를 살펴보고 해야 합니다. 진정성이 없는 대화는 오히려 화를 불러오고, 시간만 낭비하고, 서로의 관계를 더욱 더 악화시킬 뿐입니다. 저는 이명박 대통령이 청계천복원공사를 할 때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상인들과 4,200여회나 대화를 한 사실을 알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의 저서인 성공의 적, 교만에 그것을 소개하였습니다. 그는 공권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청계천 상인들을 힘으로 몰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진정성을 갖고 대화로 설득하여 자진 철거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청계천을 복원하여 아름다운 수도 서울을 만들었습니다. 물론 그의 청계천 복원사업에 대하여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진정성을 갖고 청계천 상인들과 그토록 수없이 많은 대화를 시도한 것은 높이 평가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떻게 느헤미야가 대적들의 대화제의를 一言之下에 거절할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3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곧 그들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이르기를 내가 이제 큰 역사를 하니 내려가지 못하겠노라 어찌하여 역사를 중지하게 하고 너희에게로 내려가겠느냐 하매이 말씀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대화의 장소에 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느헤미야가 얼마나 성벽재건공사에 몰두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성벽을 재건하기 위해 대제국의 왕에게 술을 따르는 높은 자리를 내려놓고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성벽재건공사는 그에게 최고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그 일에만 신경을 쓰고 다른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사실 당시는 거의 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있었기 때문에 느헤미야는 방심하여 대화에 나설 수도 있었습니다. 아마 저 같았으면 그들의 대화에 응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서로 위험한 상황을 오랫동안 유지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방심하지 않고 끝까지 그 일에 집중을 하므로 그들의 대화 제의를 거절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비결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맡은 사명에 최선을 다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마음과 힘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주의 일을 하면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우리가 종종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오직 주님 한 분께 집중하지 않고 세상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왜 금지된 선악과를 먹었는지 알고 있습니다. 왜 먹었습니까? 뱀이 유혹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언제뱀이 그들을 유혹하여 넘어지게 했는지 아십니까? 우리가 이것을 아는 것을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알아야 우리도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언제 아담과 하와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갔을까요? 처음부터일까요? 아닙니다. 선악과를 먹지 않겠다고 결심한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을 때입니다. 바로 그 때를 틈타 마귀가 다시 유혹하자 완전히 넘어지게 된 것입니다. 왜 발람선지자가 모압 귀족들의 유혹에 넘어갔을까요? 이스라엘민족을 저주하면 부귀와 영화를 누리게 해주겠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자이기 때문에 늘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잘 전달하는 데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세상에서 높여준다는 말을 듣고 이 세상의 부귀와 영화에 더 관심을 가지자 거짓 예언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귀는 아무 때나 우리를 공격하지 않습니다. 항상 우리를 엿보다가 틈을 보일 때에 공격합니다. 우리가 주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때에 공격합니다. 따라서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는 말씀으로 마음을 무장하고 주님께 대한 신뢰를 굳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중상모략으로 공사를 방해하는 시험을 이겼습니다. 대적들은 만나서 대화하자는 전략에 실패하자 포기하지 않고 또 다른 전략으로 느헤미야를 공격했습니다. 그것은 겉을 봉하지도 않은 채로 모함하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보낸 것입니다. 모함한 내용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성벽재건은 바사 왕에 대한 모반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느헤미야가 선지자를 통하여 자신을 왕이 되게 하려고 선전한다는 것입니다(6:5-7). 우리가 알다시피 이것은 전혀 사실과 무관한 것입니다. 이처럼 누군가를 음해하기 위해 고의로 만들어 낸 거짓말을 악성루머라고 합니다. 우리 속담에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날까?”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아닌 땐 굴뚝에서 연기를 나오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사람들이 있지도 않은 일을 만들어 퍼뜨릴까요? 그것은 상대방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앉고 싶어 하는 교만한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은 단지 소설이나 드라마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종종 일어나는 일입니다. 안타깝게 종교계에서도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의 관계를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은 끊임없이 악성루머를 만들어서 예수님을 괴롭게 했습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셨지만 바리새인들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좇아낸다고 비방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몸을 헐어버리시겠다고 하셨지만 바리새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무너뜨린다고 말을 해서 곤경에 몰아넣었습니다. 이번에 우리 교단에 소속된 동도교회에서 웃지못할 일이 일어났습니다. 동도교회는 부목사만 7명이고, 원로 장로를 비롯하여 48명의 장로가 있을 정도로 규모가 꽤 큰 교회입니다. 이미 별세하셨지만 총회장을 지낸 최훈 목사님이 시무하셨던 교회입니다. 현재 옥광석 목사가 그 교회에 담임목사입니다. 그런데 그가 목회칼럼에 동도교회의 당회장은 성령님이시다라고 말한 것을 가지고 어떤 원로 장로가 고소를 했고 소속노회에서는 그를 면직시켰습니다. 98%의 교인들은 옥 목사를 지지하지만 몇몇 정치 장로와 목사들에 의해 면직을 당했습니다. 옥목사가 동교회의 당회장은 성령님이시다라고 말한 것은 자신이 성령님이시라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동도교회의 실질적인 당회장이 성령님이시고 자기는 단지 수종 드는 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조한 말입니다. 그런데 옥목사가 자신을 성령님과 동일시했다고 악성루머를 만들어 면직을 시켰습니다. 마치 중세시대의 마녀사냥을 보는듯하여 참으로 가슴이 아픕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자기를 중상모략하는 자들에게 어떻게 대처했습니까? 8-9절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사람을 보내어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말한 바 이런 일은 없는 일이요 네 마음에서 지어낸 것이라 하였나니 이는 그들이 다 우리를 두렵게 하고자 하여 말하기를 그들의 손이 피곤하여 역사를 중지하고 이루지 못하리라 함이라 이제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 하였노라”(8-9). 느헤미야는 그들이 왜 자신을 중상 모략하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두렵게 하여 성벽재건공사를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이런 사실을 알고서 어떻게 했습니까? 이제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 우리는 느헤미야의 기도를 자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대적들을 심판해달라거나 두려움을 물러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제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기도한 것은 손에 힘이 있어야 예루살렘 성벽 재건 공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의 기도를 통하여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느헤미야는 자신의 명예가 더럽혀지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예루살렘성벽의 재건에만 관심을 쏟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군가 우리를 중상모략을 할 때에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바로 이것입니다. 중상모략이 들릴 때에 우리 자신에게 집중하면 두려움을 갖게 되어 하던 일을 멈추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신 사명에 집중하면 계속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적들이 중상모략할 때는 자신에게 집중하지 말고 주께서 맡겨주신 일에 더욱 집중해야 합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은 악성루머가 들릴 때에 편승해서 형제자매를 중상모략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화평의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았지 파괴하고 무너뜨리는 일을 위해 부르심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너는 거짓된 풍설을 퍼뜨리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위증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23:1)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거짓된 풍설을 퍼뜨리는 악한 통로로 쓰임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한 청교도는 누군가를 중상모략하려는 말이 들릴 때에 세 가지 단계를 거쳐서 행동을 했다고 합니다. 첫째로, 이 말이 사실에 근거한 소문인가? 둘째로, 내가 이 말을 본인에게 확인했는가? 셋째로, 그것이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들은 말을 전달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듣는 자에게 유익한가? 하나님께서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라”(14: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되도록 좋은 말을 해야 합니다. 악한 말, 불평, 원망의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가 어느 날 잠자리에 누워서 하루 동안 제 언어생활을 되돌아보았습니다. 완전히 실패한 하루였습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누군가가 말한 것을 듣고서 마치 그 말이 사실인 것으로 생각하고 흥분하고 함부로 비판하고 정죄했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갑자기 저의 머리를 스쳐지나간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윗의 기도였습니다.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141:3).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의 입에 파수꾼을 세우셔서 입을 막아주시지 않으면 언어생활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파수꾼이 되셔서 우리의 입을 막아주시지 않으면 어떤 실수를 할지 모릅니다.

     

    셋째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시험을 이겼습니다. 느헤미야가 중상모략의 시험도 이기자 그들은 또 다른 시험을 가지고 공격을 했습니다. 이번에는 스마야 선지자를 통하여 거짓 예언을 하게 하여 느헤미야로 하여금 두려움을 갖게 하여 성전의 외소로 도망을 하라고 하였습니다(10). 이 말이 왜 느헤미야에게 시험일까요? 그것은 외소라는 장소가 어떤 곳인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외소는 성전의 지성소와 성소로 들어가는 문 앞에 위치한 뜰인데 성경은 제사장 외에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말씀하고 있습니다(18:7). 따라서 말씀을 어기고 외소로 피해 목숨을 보존하든지, 아니면 죽더라도 그 자리에 그냥 있어야 할지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이 시험을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살기 위해서 외소로 가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만일 이런 상황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아마도 생명을 보존하기 위하여 외소로 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 길을 선택하지 않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느헤미야가 그렇게 결단을 내릴 수 있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 이유를 11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이르기를 나 같은 자가 어찌 도망하며 나 같은 몸이면 누가 외소에 들어가서 생명을 보존하겠느냐 나는 들어가지 않겠노라 하고여기서 우리는 느헤미야가 나 같은 자가 어찌 도망하며”, “나같은 몸이면 누가 외소에 들어가서라고 말한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당시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총독이었습니다. 그리고 페르시아 제국의 왕을 모시는 자였습니다. 더군다나 그는 지금 성벽재건이라는 큰 공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는 세상적으로는 높은 지위에 있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한낱 종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자세로 신앙생활을 해야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시험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세상과 타협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삶속에서 자신의 목숨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할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더 소중하게 생각할 것인지를 질문하고 후자를 선택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사실 하나님 앞에서는 그 어느 것도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재물, 명예, 목숨, 교회의 직분은 사실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가 세상적으로 아무리 잘 나간다 할지라도 항상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이런 중직자들이 교회 안에 많아져야 다른 성도들이 본을 받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만들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평소 느헤미야와 친밀했던 스마야 선지자가 왜 느헤미야로 범죄케 하려고 거짓 예언을 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 이유를 본문 12-13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깨달은즉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바가 아니라 도비야와 산발랏에게 뇌물을 받고 내게 이런 예언을 함이라 그들이 뇌물을 준 까닭은 나를 두렵게 하고 이렇게 함으로 범죄 하게 하고 악한 말을 지어 나를 비방하려 함이었느니라.” 한 마디로 돈 때문이었습니다. 스마야는 뇌물을 받자 눈이 어두워져 자신이 선지자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평소 친한 관계마저 깨뜨리고 거짓 예언을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사랑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인간과의 관계도 파괴됩니다. 특별히 우리가 뇌물을 받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뇌물은 사람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기 때문입니다(23:8). 왜 잘 나가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추락합니까? 뇌물을 받고 판단력이 흐려져서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계속 어두운 길을 걷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자기를 두렵게 하여 외소로 피하게 하려 했던 자들에게 어떻게 했습니까? 14절을 읽겠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도비야와 산발랏과 여선지 노아댜와 그 남은 선지자들 곧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한 자들의 소행을 기억하옵소서 하였노라”(14). 느헤미야는 가까이 지내던 스마야 선지자의 배신으로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자신에게 아픈 상처를 입힌 자들을 직접 심판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그들을 심판하실 분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12:19)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떤 상처를 받았어도 스스로 심판하려고 하지 말고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이 우리가 심판하는 것보다 정확하고 공평합니다. 우리가 심판하면 얼마든지 오판할 수 있습니다. 판사가 원고와 피고가 제출한 서류를 심사하고 재판을 해도 오판을 하고, 삼심제도를 두고 있는데도 오판을 하는데 하물며 우리의 감정으로 심판하는 것이 어찌 바를 수 있겠습니까? 특별히 우리가 받은 상처를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면 유익한 점이 있습니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상처는 앙갚음을 한다고 치유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아픈 상처를 주님께 가지고 나가서 아픔을 쏟아놓아야 치유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영혼과 육신의 질병만 치료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마음의 상처도 치유해주십니다. 우리가 어떤 상처를 받았든지 주님께서 만져주시면 깨끗해집니다. 우리에게는 스스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능력이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상한 감정을 만져주실 수 있습니다. 주님께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나가서 쏟아 부은 만큼 새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 받지 않으면 결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느헤미야가 계속되는 공격을 어떻게 대처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거짓으로 대화를 하자는 제의를 거절했습니다. 중상모략하여 공사를 방해하는 시험을 이겼습니다. 또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하여 외소로 피하라고 하는 시험을 물리쳤습니다. 느헤미야가 이렇게 번번이 찾아오는 시험을 모두 이길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가 오직 성벽재건공사에만 몰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마귀가 우리를 다양한 방법으로 공격해도 우리가 마음을 오직 주님께 쏟으면 그 어떤 유혹도 이길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6). 오직 주님을 사랑하므로 우리 앞에 닥치는 모든 시험을 이기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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