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 통치하시기에 합당한가요? 눅 3:1-6절 2015. 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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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통치하시기에 합당한가요? 눅 3:1-6절 2015. 7.122018-12-03T22:51:48+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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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지난주에 예수께서 키와 지혜가 균형 있게 성장해 가신 것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경력과 영적성장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신앙경력에 따라 믿음도 성장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은 우리의 신앙에 문제가 있기 때문인데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갓난아이처럼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또한 예수께서 “어찌하여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 모르냐”고 말씀하신 것은 단순히 성전에 있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는 의미라고 말씀을 드리면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유월절 절기를 통해서 자신의 사명을 새롭게 인식하셨기 때문이듯이 우리도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가까워지고 하나님의 일에 더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성전에서 랍비들과 토론 후 집으로 내려가서 부모님께 순종하셨듯이 우리도 육신의 부모님께 순종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주님께서 통치하시기에 합당한가요?”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던 때와 장소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3장 1-2절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즉 세례요한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던 때는 로마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15년이 되던 해였습니다. 디베료 황제는 AD.14-42년 동안 로마제국을 통치하였던 제2대 황제입니다. 즉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국가든 개인이든 누군가에게 종속이 되어있으면 자유를 누릴 수 없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더군다나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장소는 ‘빈들’이었습니다. ‘빈들’은 광야를 가리킵니다. 광야는 대부분 자갈과 모래와 바위로 되어 있을 뿐 아니라, 마실 물도 없고 나무도 없고 그늘이 없기 때문에 그곳에 있다는 것은 곧 고통 중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고 광야에 있을 때에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합니까? 우리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음성을 들려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편안한 상황에 있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배부르고 등이 따듯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셔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육신이 편하면 하나님을 찾지 않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키워봐서 잘 알지 않습니까? 아이는 문제가 없으면 절대로 부모를 찾지 않습니다. 배가 고프든지, 몸이 아프든지, 문제가 생겨야 찾습니다. 우리는 종종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런데 이 약속의 말씀이 어떤 배경에서 나왔는지 아십니까?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시위대 뜰에 갇혔을 때였습니다. 그가 시위대 뜰에 갇혔다는 것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을 맞이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 처해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개인이든, 교회이든, 민족이든 어려운 상황은 하나님께서 음성을 들려주시는 때입니다.
    따라서 어려운 상황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고 하시는지를 알기 위해 두 귀를 주님께 쫑긋해야 하는 것입니다. 혹 여러분이 처한 상황이 어렵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음성을 듣기 위해 하나님을 향해 귀를 열어야 합니다. 어려운 상황만 보고 절망하지 말고 하나님을 향해 귀를 열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그분께 귀를 열지 않으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 마귀의 음성이 들립니다. 마귀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어려운데 하나님께서 도우시지 않는 것은 너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야” 우리가 어려운 상황을 만나면 누군가를 원망하고 절망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지 않고 마귀의 음성을 듣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빈들에서 들은 하나님의 음성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직접적으로 하나님께서 빈들에 있는 요한에게 들려주신 음성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음성을 듣고 나서 한 행동을 살펴보면 하나님께 들은 음성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한 마디로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나서 한 것은 요단강으로 가서 ‘회개하라’고 외친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우리는 요한이 하나님께 들은 메시지가 회개하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나라를 잃고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달하라고 하시지 않고 회개하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회개만이 진정으로 살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회개 없이는 예수님을 만날 수 없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고 올바른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동일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에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회개가 무엇입니까? 가던 길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마귀의 자녀로 살던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회개했습니다. 즉 가던 길을 돌이킨 자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회개한다라고 말을 사용합니다. 이미 주님께 돌이킨 자가 회개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자신의 잘못을 고백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회개한 자들은 날마다 자신의 잘못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그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미 회개함으로 죄와 그 결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죄를 우습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반드시 하나님께 고백해야 하고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런 노력이 없이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도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날마다 동일하게 짓는 죄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즉 반복해서 죄를 지을 경우 날마다 고백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입으로는 잘못했다고 고백하지만 여전히 똑같은 삶을 반복하는 것은 아직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잘못을 뉘우치고 나서도 똑같은 죄를 반복하는 사람을 가리켜 마치 깨끗이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운 돼지와 같고,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개와 같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벧후 2:22). 그러나 고백한 죄를 또 다시 범할지라도 고백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이보다 더 큰 죄를 짓지 않게 되고 급기야는 죄에서 떠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고만 외치지 않았습니다. 주의 길을 예비하라고 말했습니다. 3-6절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눅 3:3)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눅 3:4)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눅 3:5)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 질 것이요(눅 3:6)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눅 3:3-6).
    이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수백 년 전에 예언한 것인데 한 마디로 만왕의 왕이신 주의 길을 예비하라는 것입니다. ‘길을 예비한다’는 것은 험한 길을 평탄하게 닦는 것을 뜻합니다. 옛날에 왕이 민간에 행차하게 될 때에는 미리 사신을 보내어 그 지방 백성으로 하여금 왕이 지나갈 길을 닦게 하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왕의 왕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우리 안에 모시려면 마음의 길을 평탄하게 닦아야 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주의 길을 어떻게 예비해야 할까요?
    첫째로, ‘모든 골짜기’는 메어져야 합니다. 골짜기는 이 산과 저산을 갈라놓습니다. 골짜기는 깊든 낮든 산을 갈라놓습니다. 골짜기가 없어지지 않은 이상 이 산과 저산은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골짜기가 이산과 저산을 갈라놓는 것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서로 용서치 못하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고 미워하면 깨어진 관계는 영원히 회복될 수 없습니다. 크든 작든 미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하나 될 수 없습니다. 영원히 이 사람과 저 사람으로 남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관계에서 골짜기가 많은 사람에게는 주님께서 오셔서 왕 노릇 하시지 않습니다. 자신은 주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진정 주님은 그의 왕이 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을 용서해야 주님께서 다스리심으로 주님의 은혜와 평강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골짜기를 메운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골짜기를 메우려면 산 정상의 흙을 퍼서 메우는 고통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상처와 손해 준 자들을 용서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 됨을 방해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우리가 하나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목숨 걸고 방해합니다. 마귀는 계속해서 증오심을 갖게 하여 깨어진 관계를 더 벌어지게 합니다. 따라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영적전쟁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마귀의 방해공작을 물리치고 자신에게 손해와 상처를 입힌 자를 용서하므로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게 해야 합니다.
    둘째로, ‘모든 산’은 낮아져야 합니다. 산이 낮아져야한다는 것은 높아져있는 마음을 낮추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즉 교만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교만을 버려야 할까요? 교만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원수가 되시므로 그분의 우리의 왕이 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이유로라도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좀 더 가졌든, 좀 더 배웠든, 좀 더 의롭게 살든, 좀 더 외모가 잘났든, 좀 더 교회에 헌금을 많이 했든 마음이 높아있으면 안 됩니다. 교만의 산을 깎아 겸손의 평지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에서 주님의 통치를 받아 은혜를 받게 되고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섰을 때에 면류관을 쓰게 되는 것입니다.
    단테가 쓴 ‘신곡’에 연옥의 한 장면이 나옵니다. 한 곳에 가보니 많은 사람이 등에 무거운 돌을 가득 지고 서 있습니다. 그래서 “왜 저 사람들은 저렇게 무거운 돌을 지고 서 있죠?”하고 묻자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 사람들은 세상에 살 때 너무 교만해서 허리를 굽혀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낙원에 들어가는 문은 낮아서 허리를 굽혀야겠기에 그 연습을 하고 있는 중이랍니다”
    우리는 교만과의 영적전쟁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낮아지신 것처럼 낮아지려고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제가 성공의 적, 교만에서 밝혀듯이 교만은 ‘성장성’이 있습니다. 키우지 않아도 자기 스스로 자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만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해집니다. 방심하는 순간 교만하게 됩니다. 우리는 날마다 교만의 벽을 헐고 겸손의 벽을 쌓아야 합니다. 높아진 마음을 완전히 낮춤으로 주님께서 행차하셔서 다스리시기에 조금도 불편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셋째로, ‘굽은 길’은 곧게 하고 ‘험한 길’은 평탄케 해야 합니다. ‘굽었다’는 것은 마음이 비뚤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험하다’는 것은 마음이 거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비뚤어져 있거나 거친 것은 마음에 상처가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마음의 상처가 있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말을 왜곡하기 때문에 대인관계에 있어서 많은 문제를 만들어냅니다. 몇 사람 모여서 얘기를 나누는 중에 어떤 사람이 창세기에 나오는 ‘인간창조’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그 갈빗대 하나를 뽑아 여자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이를 듣고 있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도둑이구만! 왜 남자를 잠재워 놓고 갈빗대를 훔쳐가?” 그러자 또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 도둑이라면 매일 들어도 좋겠다. 갈빗대 하나만 가져가고 대신 여자를 남겨 두었으니까?” 그렇습니다. 동일한 사건을 두고도 어떻게 이처럼 전혀 해석이 나올 수 있습니까? 한 사람은 마음의 상처가 없기 때문이고 다른 사람은 마음의 상처가 크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비뚤어진 마음, 까칠한 마음은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의 마음은 다스리시지 않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기 위해서는 ‘굽은 마음’은 펴서 곧게 해야 하고, ‘거친 마음’은 다듬어서 온유한 마음이 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기에 그분은 우리의 주인이시고 왕이십니다. 그런데 주인과 왕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주인과 왕이시기 때문에 그분 마음대로 우리를 다스리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언제 주님께서 우리를 마음대로 다스리실까요? 그분께서 왕 노릇하실 수 있도록 멍석을 깔아드릴 때입니다. 즉 우리가 용서하고 마음을 낮추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받아 주님께서 실질적으로 우리의 주인과 왕이 되실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바꿀 때입니다. 그동안 미워했던 자를 용서하므로 관계를 회복하고, 높아졌던 마음을 낮추고, 비뚤어진 마음을 곧게 하고, 험한 마음을 온유한 마음으로 바꿔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므로 예수께서 우리를 직접 통치하시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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