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는 죽음이후도 준비하신다 눅 23장 50-56 2018.8.12

//주님께서는 죽음이후도 준비하신다 눅 23장 50-56 2018.8.12
주님께서는 죽음이후도 준비하신다 눅 23장 50-56 2018.8.122018-12-03T23:53:41+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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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본문은 아리마대 요셉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예수님의 시신을 빌라도에게 요청하여 새무덤에 장사지내기까지의 과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당시는 예수님의 시체를 장사지낼 수 있도록 내어달라고 하는 말을 쉽게 꺼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유대 관원들로부터 신성 모독죄로 고발당해 저주를 상징하는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셨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신성 모독죄를 가장 큰 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장 잔혹한 처형 방법인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처형당하신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유대교 종교지도자를 뿐 아니라 백성들로부터 핍박을 당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기꺼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했습니다.
    더군다나 당시 아리마대 요셉의 신분이 어떠했습니까? 공의회 회원이었습니다. 공의회 회원은 오늘날로 말하면 국회의원에 해당되는 신분으로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큰 부자였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다가 장례를 치렀다는 것이 알려지면 지금껏 쌓아온 명성과 재물을 한 순간에 다 잃을 수도 있었을 뿐 아니라 자칫 예수와 한 패거리로 몰려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만일 예수께서 살아 계시다면 그렇게 할 경우 보호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이미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셨기 때문에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체를 요구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그 답을 51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하나는, 용기와 결단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이 말은 공회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자고 결의할 때에 찬성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당시 공회원은 70명인데 만장일치로 결의를 했습니다. 그런데 아리마대 요셉만 그것을 반대한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가 그렇게 할 경우 어떤 대가를 지불할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대단한 용기와 결단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어떻게 이런 용기와 결단력을 갖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훈련했기 때문입니다. 말씀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 세상의 가치와 다른 것을 추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의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쉽겠습니까? 그것은 마치 물을 역류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마치 노아가 비가 오지 않는데 홍수를 대비하여 배를 지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당시 노아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계속해서 배를 지을 수 있었던 것은 용기와 결단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훈련을 통하여 용기와 결단력을 키워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아리마대 요셉이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누가는 그 이유를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마태복음을 읽으면서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마태는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제자’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마 27:57).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따라서 그가 스승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은 당장 이렇게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12제자들도 예수님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는데 그들은 왜 예수님을 배신했느냐?” 그것은 예수님께 가르침을 받았지만 그들이 추구한 방향은 아리마대 요셉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즉 아리마대 요셉은 하나님의 나라에 무게 중심을 두었지만, 12제자들은 이 세상 나라에 무게 중심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어디에 무게 중심을 두느냐에 따라 전혀 다릅니다. 주님을 믿지만 무게 중심을 이 세상의 성공에 두는 사람은 기복신앙을 가진 자이고, 하나님의 나라에 두고 살아가는 자는 종말신앙을 가진 자입니다. 같은 하나님을 믿지만 기복신앙을 가진 자와 종말신앙을 가진 자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큽니다. 기복신앙은 이 땅에 소망을 두기 때문에 세상의 성공을 위해 시간과 물질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종말신앙을 가진 자는 천국의 상을 위해 시간과 물질을 사용합니다. 따라서 종말신앙을 가진 자는 이 세상에서 명예를 잃거나 물질을 잃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요구하면 명예와 재물을 다 잃을 수 있어도 그가 그렇게 한 것은 바로 종말신앙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이렇게 아리마대 요셉이 용기와 결단력이 있는 사람으로 말하고 있지만 요한복음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8절을 읽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 가니라.” 여기서 ‘이 일 후’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후입니다. 즉 요한복음은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전에는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밝히지 않고 숨겼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누가의 기록과 요한의 주장이 상반됩니다. 이런 상이점을 어떻게 이해하면 될까요? 요한복음은 아리마대 요셉이 공회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기로 결의할 때에 예수님의 제자라고 신분을 밝히지 않고 반대한 것을 클로즈업 시켰기 때문이고, 누가는 아리마대 요셉이 신분을 밝히는 것과 상관없이 홀로 공회의 결정이 옳지 않다고 말한 그 자체를 클로즈업 시켰기 때문입니다. 즉 요한은 아리마대 요셉이 공회에서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라고 밝히고 그들의 결정이 잘못되었다고 말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으로 기록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공회원이었고 부자였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했다는 점입니다. 성경은 그가 공회원이 되기 전에 무슨 사업을 했는지, 무슨 장사를 해서 돈을 많이 번 부자가 되었는지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는 부자였고 높은 신분을 가졌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어떤 상황에서 종말을 사모합니까? 즉 어떤 상황에서 예수께서 재림하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까? 경제적으로 힘들거나, 질병에 걸렸거나,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고통당할 때입니다. 그러나 아리마대 요셉은 정 반대였습니다. 한 마디로 이 세상으로 아주 잘나가고 있었지만 천국을 기다렸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의 신앙을 본받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하는 일이 잘 되어도 또 명예를 얻고 높은 자리를 차지해도 천국을 사모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곳이 그곳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잘 나가도 영원히 있을 곳이 아닙니다. 현대 크리스천의 신앙의 위기는 한마디로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천국을 예비해놓으시고 그곳에 우리를 데려다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지만(요 14:1-3) 천국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좋아도 천국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처럼 이 세상에서 잘나가도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해야 합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에게 찾아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한 시기가 언제입니까? 52-44절을 읽습니다. “그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이 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한 시기가 언제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안식일 전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안식일 전에 예수님의 시신을 요청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안식일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전에 시체를 내리지 않고 그대로 두면 날짐승의 밥이 되어 장례를 치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보존하려고 했던 것은 예수께서 평소 죽으신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시신을 가져다가 즉시 세마포로 쌌습니다. 세마포로 시신을 감는 것은 유대인의 전통적인 시신 처리 방법입니다. 세마포는 가는 베를 말합니다. 요즘에 세마포는 옷감으로도 잘 쓰이지 않지만 예수님 당시에 세마포라고 하면 얼마나 매우 귀한 옷감입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요한이 밧모섬에 가서 주일날 기도하는 중에 하늘이 열려 천국의 환상을 봤는데 성도들이 전부 입었던 옷이 세마포로 된 옷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천국에 간 성도들이 세마포로 된 옷을 입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천국에서는 이 세상처럼 옷을 입는 곳이 아닙니다. 성경은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하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와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마 22:30). 그런데 왜 요한은 환상가운데 천국에서 성도들이 세마포 옷을 입었다고 기록했을까요? 성도들의 영광을 다른 방법으로 설명하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이토록 귀한 세마포로 예수님의 시신을 직접 쌌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 판 무덤에 넣어두었습니다. 유대인과 우리의 장례는 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땅을 파고 그 곳에 관을 내리고 봉분을 하면 끝이 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위를 파서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 거기에 모시고,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도 거기에 모시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도 거기에 모시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도 거기에 모십니다. 자신도 죽으면 거기에 들어가고 아내도 죽으면 거기에 장사됩니다. 그러다 뼈가 꽉 차면 봉해 버립니다. 이것을 ‘묘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셉은 사람을 장사지내지 않은 새 무덤에 예수님을 안치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자기 부모까지 꽉 차서 이제 자신부터 죽으면 묻힐 무덤을 새롭게 판 것입니다. 바로 그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을 넣은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새 무덤, 즉 자신이 묻힐 새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을 안치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자신의 소유권을 예수님께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은 자신의 것을 주님께 드리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소유권이 주님께로 이전되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 예수께서 자신의 주인이심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말미암고 주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것이 없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아리마대 요셉만 예수님의 장례식에 함께 한 것이 아닙니다. 54-56절을 읽습니다. “이 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따라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를 보고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더라.” 갈릴리에서 예수님과 함께 온 여인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둔 곳만 보고서는 돌아가서 향유와 향품을 준비하고 안식일에는 쉬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준비하더라’ 와 ‘쉬더라’에 주목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무덤에 안치하기 전 향품과 향유를 바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미 무덤에 안치된 상황인데 여인들이 예수님의 시신이 있는 곳을 확인하고 돌아가서 향품과 향유를 준비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했을까요? 그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6시간 만에 운명하신 후 곧바로 무덤으로 옮겨졌기 때문에 예수님이 시신에 향품과 향유를 넣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보기만 하고 그대로 돌아가서 무엇을 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안식일에 쉬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과 향유를 바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는 죽은 후에도 말씀을 지키셨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가 살펴본 대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자 곧 바로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다가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주인공은 아무래도 ‘아리마대 요셉’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이십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의 시신을 빌라도에게 달라고 해서 인계를 받으려면 그럴만한 힘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공회원인 아리마대 요셉을 준비하셨고, 또 다른 사람과 함께 묻혀서는 안 되는데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빈 무덤을 준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장사지내시기 위해 ‘아리마대 요셉’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위해서만 이삭 대신 바칠 양을 준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서도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필요한 모든 것을 예비해 놓으셨을 뿐 아니라 사후에 영원히 거할 천국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 하나님은 영영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라”(시 48:14)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주님께서 준비하신다는 것을 믿고 여호와 이레를 찬송하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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