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과 절대적 의존관계로 살아가야 합니다. 눅18:15-17절 2017.10.22

//주님과 절대적 의존관계로 살아가야 합니다. 눅18:15-17절 2017.10.22
주님과 절대적 의존관계로 살아가야 합니다. 눅18:15-17절 2017.10.222018-12-03T23:34:45+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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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읽은 본문은 어린이 주일에 자주 설교본문으로 등장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매우 익숙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본문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특별히 본분에서 어린아이들처럼 받들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조금 후면 지금까지 본문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본문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우리가 본문을 읽어서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어성경은 본문을 And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영어 성경이 본문을 And로 시작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과 지난주에 살펴보았던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가 연속선상에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말씀하신 다음에 오늘 읽은 본문을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본문의 말씀도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의 내용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어린아이의 만져주심을 기대하고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다고 말씀합니다. 당시는 부모들이 존경하는 랍비에게 찾아가서 자신의 아이에게 손을 얹고 축복기도를 부탁하는 것이 일상적인 것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부모들의 자녀에 대한 사랑은 크게 변함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직접 만나기 쉽지 않았기 때문에 부모들은 모처럼 만에 쉽게 가까이서 뵐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너도나도 아이들을 주님께로 데리고 나아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에 제자들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15절을 다시 읽습니다.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제자들은 사람들이 자기 아기를 데리고 예수님께로 오는 것을 보자 그들을 꾸짖었습니다. 왜 제자들이 이를 보고 꾸짖었을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세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어 질서 유지 차원에서 그렇게 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아기를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온 자가 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고 ‘사람들’이라고 말씀한 것으로 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렸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중에는 우는 아기도 있었을 것이고, 사람들이 먼저 안수를 받으려고 한꺼번에 몰려들었기 때문에 혼잡한 상황이 빚어졌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자들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들을 꾸짖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께서 그들에게 그런 상황에서 질서를 유지한다는 미명하에 그들을 꾸짖을 권리를 주셨느냐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을 책망하신 것으로 봐서는 예수께서 그들에게 그럴 권리를 주셨다고 볼 수 없습니다. 사실 제자들에게는 아기를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을 꾸짖을 권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들이 아기를 데리고 제자들에게 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로 갔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향하여 비판하거나 책망할 때에 자신에게 그런 권리가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 스승과 제자 사이, 직장의 상사와 부하, 선후배 사이에서는 얼마든지 책망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런 관계를 제외하고는 누군가를 함부로 책망할 자리에 있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한다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처사입니다.
    둘째로, 예수께서 그들을 꾸짖는 것을 좋아하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제자들이 아기를 안고 예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을 꾸짖을 때에 어떤 생각으로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마도 예수께서 잘했다고 칭찬하실 것을 기대하지 않았을까요?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복잡한 상황에서는 누군가가 나서서 상황을 정리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주님께 칭찬을 받기는커녕 책망을 받았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질까요? 자기의 생각과 주님의 생각이 같을 것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사고 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도 좋아하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반대로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도 싫어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은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9).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이처럼 우리의 생각과 주님의 생각 사이에는 항상 갭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한 여인이 옥합을 깨어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사건(막 14:3-9, 참조 요 12:1-8, 마 26:6-13)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유월절을 앞두고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실 때였습니다. 마리아가 매우 값진 향유 곧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러자 이를 본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그런데 예수께서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가만 두라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마리아를 책망한 자들의 말은 매우 합리적이고 논리적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마리아의 행동은 돈을 허비한 행동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마리아를 칭찬하셨습니다. 칭찬하신 정도가 아닙니다. 마리아가 행한 일을 복음을 전파되는 곳에는 그녀가 행한 일도 말하여 사람들이 기억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왜 예수께서 마리아를 이토록 칭찬하셨을까요? 마리아가 주님의 뜻을 알고 행동하였기 때문입니다. 즉 마리아의 생각과 주님의 생각이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다윗을 우습게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말씀하시고 그를 통하여 자신의 뜻을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우리도 주님과 같은 생각을 품으므로 주님께 합한 자가 되어 마지막 때에 주님께 쓰임을 받아야 합니다.
    셋째로, 사람들이 자신들을 거치지 않고 예수님께 직접 안수를 받으려고 해서 기분이 나빴기 때문입니다. 당시 제자들이 항상 예수님을 따라다녔기 때문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려면 제자들을 통해서 만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우리도 어떤 사람을 만날 때에 직접 만나지 않고 그 사람과 가까이 있는 사람을 통해서 만나는 경우가 종종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기들을 데리고 부모들이 자신들을 거치지 않고 예수님께 직접 나아가려고 하자 불쾌한 생각이 들었을 것이고 그들을 책망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그런 권한을 주셨느냐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결코 제자들에게 그런 권한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자신을 통하지 않고 예수님께 직접 나아간 사람들을 꾸짖은 것은 그들이 교만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모든 권한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려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일을 자신이 알아야 하고 자신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모르게 어떤 일이 진행되면 불쾌하게 생각하고 화를 냅니다. 물론 자신이 그럴만한 지위에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문제는 그런 자리에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한다는 것은 교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교회 안에 이런 사람들이 많으면 날마다 분쟁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교회를 자기 뜻대로 움직이려고 하기 때문에 자신의 뜻과 다른 일이 진행되면 가만히 있지 않고 떠벌려댑니다. 초대교회에도 디오드레베가 그렇게 했습니다. 그는 교회에서 으뜸 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교회에서 각종문제를 만들어냈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지체이기 때문에 교회를 세우는 자가 되어야지 무너뜨리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욱 더 겸손해져서 자신의 권리를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헌신을 많이 했어도 부흥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어도 자기 목소리를 내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는 주님의 목소리만 크게 들려져야 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꾸짖는 것을 보시고 어떻게 하셨습니까? 16절입니다.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누가복음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마가복음에는 예수께서 “분히 여기셨다”(막 10:14)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왜 분히 여기셨을까요? 그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반하는 행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방금 전에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통하여 무엇을 가르치셨습니까?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낮추면 하나님께서 높이시기 때문에 자신을 낮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것을 잊고 교만하게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르침을 받았어도 변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분하게 여기십니다. 특별히 우리가 겸손하라는 말씀에 불순종하면 분노하십니다. 따라서 기회만 되면 높아지려는 마음을 누르고 더욱 더 낮아져야 합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6절).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잠시 낮아지면 천국에서는 영원히 높여주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제자들의 행동을 분히 여기시면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다시 16절을 읽습니다.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어린 아이들이 예수님께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15절을 보면 ‘어린 아이들’이 아니라 ‘어린 아기’로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15절). 영어로 어린 아기는 ‘infants’이고 ‘어린 아이’는 ‘little children’입니다. 그런데 ‘infants’는 영유아를 말하고 ‘little children’은 어린 아이를 뜻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데리고 온 아이들은 아마도 젖먹이 아기부터 서너 살배기 어린아이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 이런 어린아이를 가까이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여기서 ‘이런 자’는 어린아이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어린아이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어린아이의 어떤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린아이의 어떤 면이 하나님의 나라와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합니까? 사람들은 어린아이의 깨끗하고 순진함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과연 어린아이가 깨끗하고 순진할까요? 물론 어른보다는 상대적으로 깨끗하고 순진하다고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를 깨끗하고 순진하다고 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고 악하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 안에는 어린아이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어린아이를 깨끗하고 순진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볼 때에 합당치 않습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어린아이의 어떤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15절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15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여기서 우리는 어린 아기가 예수님께 어떻게 나아갔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어린 아기가 스스로 예수님께 가지 않았습니다. 부모들이 데리고 갔습니다. 즉 어린 아이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내세우지 않고 부모가 이끄는 대로 순종했습니다. 바로 예수께서 이런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이런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부모의 곁은 떠나면 죽는다고 생각하고 부모를 놓치지 않으려고 하듯이,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아버지를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자가 차지하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자기의 재물과 학력과 능력을 자랑하는 자를 거부하고, 오직 주님을 붙잡고 주님의 손에 이끌리어 온전히 순종하는 자를 환영합니다. 날마다 자신을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자가 들어가는 곳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너무 똑똑해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한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이성을 너무 앞세운 나머지 하나님께 대적하고 하나님과 맞장을 뜹니다.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십니까? 그렇다면 어린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지혜와 명철을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의 재물, 명예, 학력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어린아이가 부모의 이끌림에 온전히 순종하듯이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저와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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