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는 심판중에도 긍휼을 베푸십니다. 눅 21:20-28 2018.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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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는 심판중에도 긍휼을 베푸십니다. 눅 21:20-28 2018.3.182018-12-03T23:44:17+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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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지난주 말씀과 연속선상에 있습니다. 즉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의 멸망과 성전파괴에 관해 말씀하셨는데 이와 관련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예루살렘 성이 멸망당할 때에 나타날 징조들 중의 하나입니다. 20절을 다시 읽습니다.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이 말씀은 예루살렘이 군대에 에워싸이면 곧 멸망될 것으로 알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들으며 어떤 생각이 듭니까? 저는 갑작스레 왜 예수께서 지극히 당연한 것을 말씀하셨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역사를 살펴보면 강대국에게 포위를 당하는 것이 곧 멸망을 의미하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번 그 실례를 들어볼까요? 하루는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다 함께 모여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요단강을 건너와서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쳤습니다. 수적으로 이스라엘이 절대적으로 불리했기 때문에 적에게 멸망을 당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기드온이 이끄는 300명이 그들을 물리치고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또한 블레셋 사람들이 에베스담밈에 진을 치고 골리앗 장군을 앞세워 이스라엘에게 전쟁을 걸어왔습니다. 그러자 사울 왕과 온 이스라엘은 이를 보고 두려움 가운데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스라엘이 목동 다윗을 통하여 골리앗을 쓰러뜨림으로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또한 아람군대가 수많은 군사와 말과 병거를 거느리고 이스라엘을 완전히 에워쌌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운명은 마치 풍전등화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군대를 통해서가 아니라 엘리사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이 군대에 에워싸인다고 곧 예루살렘이 멸망당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그런 상황에 있어도 대적과 싸워 이기게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예수께서 로마 군대를 통하여 예루살렘을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예루살렘 성을 버리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성이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의 눈이 항상 그곳에 머물고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한 곳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그 성을 로마군대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작정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끝까지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민족은 여러 차례 지구상에서 없어질 뻔했습니다. 그런데 끈질기게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우수한 민족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자기들이 잘 나서 그런 줄 알고 목이 뻣뻣하고 교만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수없이 많은 선지자를 보내서 말씀하셨지만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끝내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까지 보내셨지만 듣지 않고 배척했습니다. 그리고 곧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계획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들을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을 심판하시로 작정하신 것을 통하여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회개하면 언제나 용서해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용서하시지 않고 심판하십니다. 따라서 이 말씀 앞에서 혹 하나님의 심판을 부르는 행동을 하고 있지는 아니한지를 살펴보고 돌이켜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군대에 의해 에워싸임 당하는 것이 예루살렘의 멸망의 징조라고 말씀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21절입니다.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갈 것이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 것이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징벌의 날이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에워싸는 것을 보면 곧 성이 파괴되니까 다른 곳으로 피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루살렘 성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A.D 70년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서 멸망당했습니다. 역사가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당시 학살된 사람의 수가 약 110만 명이나 되었고 포로로 끌려간 수가 97,000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요단 동편의 펠라 지역으로 피신했기 때문에 로마 군인들이 예루살렘 성을 함락시키고 시민들을 무참히 살해할 때에 성안에서 죽은 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사실 로마 군대가 성을 에워싸는 상황에서 성내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여 성안에 있다가 나간 자들과 성내로 들어가지 않은 자들은 모두 죽음을 피했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무엇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환난 중에도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형통할 때만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대로 살면 조롱을 당하거나 박해를 받는 상황에서도 순종해야 합니다. 일이 잘되든 안 되든 사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만이 우리가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 하루는 순 임금이 신하들에게 망태기에다 물을 길어다 부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신하들은 수군거리며 임금님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충성스런 한 신하는 하루 종일 물을 길어다가 망태기에 부었습니다. 망태기에 물을 부어봤자 모두 새어나갔지만 계속해서 퍼다 부었습니다. 그러자 우물 바닥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물 바닥에 번쩍거리는 큰 황금 덩어리가 눈에 띄었습니다. 그래서 신하는 그것을 임금님께 가지고 가서 자초지종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임금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순종하는 자를 위하여 숨겨 둔 상금이니 그대가 가지시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반드시 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중에도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의 보호와 은혜를 받습니다.

    예수께서 계속해서 예루살렘의 멸망과 함께 임할 재앙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로, 23절입니다.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큰 환난과 진노가 있을 때에 아인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아이 밴 여자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는 것을 상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한 번의 칼날에 아이를 밴 자와 젖먹이는 아이가 죽임을 당하는 것보다 끔찍한 장면은 없습니다. 또 왜 젖을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임할까요? 젖먹이는 자들은 다른 곳으로 쉽게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그날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도 없기에 가장 끔찍한 날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24절입니다. “그들이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유대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인종을 차별하던 민족입니다. 그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나누고 이방인을 서로 상종하지 못할 자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만드신 것은 지옥의 땔감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정반대로 그들이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짓밟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멸시하던 자들에게 오히려 무시를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25절입니다. “일월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성난 소리로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일월성신에 징조가 일어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하늘의 해와 별과 달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요세푸스가 A.D. 75년경에 출간한 유대전쟁사에는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 위에 칼 모양의 별이 나타났고, 혜성이 1년 내내 하늘에 머물러 있었고, 약 30분 동안 아주 커다란 빛이 나타나 제단과 성전을 대낮처럼 환히 밝혔다.” 일월성신의 징조가 일어나면 세상이 암흑으로 변하고 세계 곳곳에 재앙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즉 그들의 잘못으로 온 세상이 화를 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한 사람의 잘못은 한 사람의 잘못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고통을 줍니다. 예수님 한 분으로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는 길이 열렸듯이, 저와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이 영육간의 유익을 얻도록 해야 합니다.
    넷째로, 26절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므로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린다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 이는 베드로후서 3장 10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즉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린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하늘세계가 붕괴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지구의 종말이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심판하시는 날이 지구의 종말입니다. 세상의 시작이 있듯이 마지막이 있습니다. 우리는 마지막을 향해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은 저와 여러분에게 구원의 날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런 일이 무엇을 위한 징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27절입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예수께서 구름을 타시고 이 세상에 오실 징조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초림의 예언 보다 재림하신다는 예언이 무려 8배나 많이 나옵니다. 성경에 한번만 기록되었어도 반드시 이루어지는데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는 말씀이 318번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께서 반드시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는 슬며시 오시지 않습니다. 많은 징조들을 대동하시고 오십니다. 왜 예수께서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오시지 않고 이런 징조와 함께 오실까요?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재림을 맞을 준비를 하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이 집에 손님을 맞이한다고 합시다.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준비하는 데에 차별을 둘 겁니다. 만일 여러분의 집에 인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상급자가 찾아온다면 어떻게 합니까? 하지 않던 청소를 하고 집안을 깨끗이 정리 정돈하는 등 손님 맞을 준비를 단단히 할 것입니다. 이번에 김정은과 트럼프 대통령이 5월에 만나기로 약속을 했는데 양국은 이를 위해 어마어마한 준비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시는데 준비 없이 만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이런 징조들을 보면서 주님께서 곧 다시 오신다는 약속을 붙잡고 주님의 재림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마음과 힘과 뜻과 정성을 다해 준비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28절입니다.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속량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이 말씀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두 가지 질문에 답을 해야 합니다. 첫째로,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는 말씀이 무슨 의미이냐는 것입니다. 머리를 들라는 말은 우리의 시선을 땅이 아니라 하늘을 향하라는 것입니다. 즉 앞으로 하늘에서 일어날 일에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장차 하늘에서 일어날 일 중에 가장 큰 일이 무엇입니까? 별과 해와 달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만왕의 왕이신 주님께서 구름을 타시고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어나 머리를 들라는 말은 주님의 재림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주님의 재림에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방향이 제대로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도 주의 재림에 시선을 고정하지 않으면 헛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둘째로, “너희 속량이 가까웠느니라”는 말이 무슨 의미냐는 것입니다. ‘속량’의 사전적인 의미는 “몸값을 받고 종을 놓아주어 양민이 되게 함”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와 전혀 다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함께 에베소서 1장 7절을 읽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한마디로 성경은 속량을 죄 사함을 받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미 죄 사함을 받은 자에게 ‘속량이 가까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을 믿는 순간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실제로 죄의 성품이 그대로 우리 안에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이미 죄 사함을 받은 자가 다시 주께서 재림하실 때에 속량을 받는다는 것은 죄의 성품이 완전히 없어지고 온전히 거룩해지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계 21:5).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항상 우리의 마음을 괴롭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 문제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재림하시면 이런 고통에서 완전히 해방이 됩니다. 우리는 그날을 바라보며 주의 재림을 사모해야 합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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