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는 죽음이 아닌 한 멈추지 않는다 사도행전 27장 9-26절 2020.9.6.

//전도는 죽음이 아닌 한 멈추지 않는다 사도행전 27장 9-26절 2020.9.6.
전도는 죽음이 아닌 한 멈추지 않는다 사도행전 27장 9-26절 2020.9.6.2020-09-06T10:14:34+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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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 사도행전 27장 1-8절을 통해서 몇 가지 주의 교훈을 들었습니다. 다시 한번 간단히 살피고 오늘 읽은 본문을 통하여 주의 음성을 듣겠습니다.

    첫째로, 누가와 아리스다고가 어떻게 바울과 함께 승선할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이는 당시 두 사람까지는 죄수의 종으로 함께할 수 있었기 때문인데 그들이 바울과 함께 승선한 것은 스스로 낮아졌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누군가를 섬긴다는 것은 낮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본받아 낮아지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둘째로, 누가와 아리스다고가 바울과 함께 승선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가 훌륭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완수하는 일에 목숨건 자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가까이할수록 허물이 보이므로 외모만 보지 말고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보고 함께할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셋째로, 바울이 탄 배에 몇 죄수가 함께 승선한 것을 통하여 무엇을 깨달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곧 사형당할 몇 죄수를 복음 전도자 바울과 함께 승선하게 하신 것은 그들에게 구원받을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곧 죽을 자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놀랍지 않습니까? 코로나19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언제, 어떻게 임할지 모릅니다.

    넷째로, 바울이 시돈에서 친구를 만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이 두로에서는 제자를 만났는데 시돈에서는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친구를 제자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도 친구를 제자로 만들어야 합니다. 친구를 가르치는 게 어려울 것 같지만 복음에 대해서는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다섯째로, 누가가 간신히를 반복한 것을 통하여 무엇을 깨달아야 하느냐입니다. 바울이 로마 황제 앞에서 복음을 전하기까지 많은 고난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 전도의 사명을 감당하는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에는 주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에 가장 가치 있고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바울의 일행이 루기아의 무라 시에서 아달리아로 가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탔는데 바람 때문에 간신히 미항이라는 곳에 도착하였습니다. 9-10을 읽습니다.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그들을 권하여,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하되”(9-10).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다’고 되어 있는데, 이 금식 절기는 욤 키푸르’(Yom Kippur), 즉 대속죄일을 뜻합니다. 욤 키푸르는 1973년 대속죄일 기간에 아랍과 이스라엘 간 벌어진 4차 중동 전쟁을 별칭하기도 합니다. 대속죄일은 9월 하순 경에 있었기 때문에 금식하는 절기가 지났다는 것은 그들이 항해한 때는 9월 이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9월 중순부터 3월까지는 지중해에 폭풍이 강하게 일기 때문에 항해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했습니다. 아예 11월부터 1월 말까지 3개월은 지중해 항해를 전면 금지했습니다. 바울도 전도 여행으로 지중해를 여러 번 항해한 적이 있었는데, 3번이나 파선을 당해 망망한 바다를 밤낮으로 꼬박 하루를 떠다닌 적이 있었습니다(고후 11:25). 그래서 바울은 지중해 항해에 관련 한 지식과 자신의 여러 경험에 근거해서 항해하지 말 것을 주장한 것입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선주와 선장의 말을 듣고 바울의 경고를 무시했습니다(11). 당시 선장과 선주들도 항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항해를 할지에 대하여 논쟁을 벌인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바울의 경고를 무시하고 그대로 강행했을까요? 12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쪽은 서남을, 한쪽은 서북을 향하였더라.” 이 말은 미항은 규모가 작아서 다음 해 봄이 오기까지 3개월 동안 겨울을 지내기에는 불편하기 때문에 뵉닉스로 가느니 마느냐로 논쟁했는데 가자는 쪽이 더 많아서 그렇게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더 많으니’를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그들이 미항에 있을 것인지 뵈닉스로 갈 것인지를 가지고 토론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토론을 하지 않았던 이유가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배에는 이집트의 곡물이 가득 실려 있습니다. 당시 대형 선박의 선장은 봉급제가 아니라 할당제였습니다. 즉 월급 받고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항해를 통해 얻은 총이익을 선주와 선장이 일정 비율로 나누어 가졌습니다. 그런데 만일 미항에 있다가 배가 부딪혀서 파손되면 출항을 할 수 없습니다. 혹 수리를 해서 떠나면 제 때에 물건을 팔지 못해서 손실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또 뵈닉스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배가 완전히 파선하면 배와 곡물을 다 잃게 되고 심지어 목숨까지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그 배에는 이들뿐 아니라 다른 화물 주도 많았습니다. 이는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항에 있을 것인지, 뵈닉스로 갈 것인지를 선장과 선주가 고민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열띤 토론을 통하여 내린 결론이 무엇입니까? 미항에 머무는 것보다는 뵈닉스로 가자는 사람이 많아 후자로 결정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가 이것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하려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단지 당시 상황을 소개하려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다수의 선택이라고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리는 다수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수를 따르지 말고 절대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특히 자신이 백부장과 선장과 선주처럼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는 자리에 앉아 있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왜 빌라도가 사도신경을 통하여 영원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저주를 받습니까? 총독이 내린 결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크게 의식하지 않고 다수의 뜻에 따라 무죄한 자를 죄인이라고 선고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미항을 출항한 후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13-14절입니다.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하더니 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니.” 마침 남풍이 순하게 불어왔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뵈닉스로 가기를 잘했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혹자는 바울이 항해 전문가도 아닌데 위험하다고 했다며 악평을 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섬 가운데로부터 광풍이 크게 일어났습니다. 이 광풍을 우리 개역개정판 ‘유라굴로’라고 하는데, 이것은 동풍을 가리키는 헬라어 유로스’(Euros)와 북풍을 가리키는 라틴어 아퀼로’(Aquilo)의 합성어입니다. 이를 Niv 성경은 ‘a wind of hurricane force, called the ‘northeaster’ 즉, 북동풍이라 불리는 광풍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큰 상선이나 크루즈도 태풍급 바람이 불거나 큰 파도가 몰아치면 위험하기에 출항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배들은 높은 파도와 강한 바람을 이기고 나아갈 수 없는 배들이었습니다. 아무리 경험이 많은 뱃사람들이라도, 강력한 두 개의 폭풍(북풍과 동풍)이 합쳐져서 몰아치는 강한 바람이 만든 파도를 뚫고 항해한다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파도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15절).

    그리고 어떻게 했습니까? 16-17절입니다. “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 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하여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바울이 탄 배는 바람에 계속 밀려가다가 가우다라는 섬 근처로 밀려가게 되었습니다. 가우다(Cauda)는 지금의 가우도스(Gavdos)라는 섬입니다. 크레타 섬에서 약 23마일 떨어져 있습니다. 계속 항해하기에 너무 위험해서 선원들은 배 뒤에 끌고 다니는 ‘거루’ 즉 작은 배를 끌어올렸습니다. 거루는 얕은 해안가에 상륙할 때 사용되는 작은 배인데 때로는 구명정처럼 사용되었는데, 바람이 너무 세니까 이 거룻배들이 날아와서 배에 부딪치면 거룻배들도 깨지고 모선에도 손상을 입히기 때문에 끌어올려서 밧줄로 꽁꽁 동여매었습니다. 그리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하여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갔다”고 말합니다. 스르디스는 크레타 섬의 남쪽 에게해 건너 북아프리카의 리비아에서부터 밀려드는 모래톱입니다. 즉 모래언덕을 뜻합니다. 선원들에게 모래언덕은 아주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한 번 걸리면 누가 와서 구해줄 때까지는 꼼짝없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망망대해에서 모래톱에 걸리면 거의 죽은거나 같기 때문입니다. ‘연장을 내렸다’는 것은 어떤 도구를 버렸다는 게 아니라, 바람에 빠르게 밀려가는 속도를 줄이기 위해서 내리는 일종의 닻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너무 빨리 밀려가니까 무거운 닻을 내려서 천천히 밀려가도록 한 것입니다. ‘그냥 쫓겨갔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파도에 밀려서 갔다는 의미입니다.

    큰 풍랑은 계속되었고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않자 구원의 여망마저 잃었습니다(18-20). 여망이라는 말은 ‘남을 여(餘)’에 ‘바랄 망(望)’, 즉 ‘남은 희망’이라는 뜻입니다. 즉 이제는 남은 희망도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해도 별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당시 뱃사람들이 해나 별을 보면서 방향도 알고 시간도 알았는데, 이제는 그것조차 볼 수 없다는 것은 최악으로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항에서 바울이 말하기를 시작합니다. 21절입니다.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이 말은 상대방이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강행해서 결과가 나빴을 때 종종 ‘내가 뭐랬어? 거봐. 내 말 안 듣더니 꼴좋다’라는 식으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뒤의 말을 강조하기 위해서 한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내 말을 듣지 않아서 이런 일을 당했지만, 이제 내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광풍을 만나 절망적인 상황을 맞이한 것은 백부장이 바울의 말을 듣지 않고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겉으로는 잘 될 것 같아도 머지 않아 실패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생각과 현재의 상황을 보고 결정하면 안 됩니다.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22-25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한마디로 생명에는 한 사람도 손상이 없으니 안심하라는 것입니다. ‘안심하라’로 번역된 헬라어는 기뻐하라는 뜻이 더 큽니다. 한마디로 절망적인 상황에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습니까? 25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믿으면 절망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주님의 말씀을 붙잡으면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절망이 더 느껴질수록 주님의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제가 왜 여러분에게 마태복음 28장 19-20절을 강조하는지 아십니까? ‘가서 제자 삼으라’는 명령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약속이 믿어져서 절망 중에서도 희망을 노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코로나19 상황에서 교회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주님께서 주신 약속을 붙잡아야 하는데 상황만 보고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서 제자 삼으라는 명령에 순종하면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약속을 믿고 코로나19 예방 수칙을 잘 지키면서 이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코로나19 예방수칙을 잘 지켜도 주님께서 막아주시지 않으면 피할 수 없습니다. 또 주님의 약속을 붙잡지 않으면 코로나19 예방추식을 잘 지켜도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났어도 배에 탄 자들이 모두 살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이 탄 배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가이사 앞에 서야 할 사명을 받은 바울이 승천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배에 바울이 타지 않았다면 파선하여 다 죽었을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매우 중요한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사명에 순종하는 자를 중심으로 역사를 이루어가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사명을 온전히 감당해서 주변에 있는 사람도 복을 받게 해야지 요나처럼 불순종하므로 함께 승선한 자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또 깨달아야 할 것은 사명이 끝나기 전에는 결코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명적 존재입니다. 그냥 존재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명을 위해 인생을 불살라야 하지 사명 이외의 것에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지 말아야 합니다.

    끝으로, 하나님께서 안심하라고 하시자마자 바람이 그치고, 파도가 잔잔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의 메시지를 말한 것은 풍랑이 인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고, 열나흘째 되던 날 밤까지 이리저리 바람에 밀려다니고 있었습니다. 즉 바울이 약속의 말씀을 듣고도 열흘 이상 풍랑이 멈추지 않았습니다(27절). 이를 통해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고 즉시 응답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취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립니다. 그래서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인내가 없이는 약속의 말씀을 받을 수 없습니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10:36-37).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19라는 인생의 광풍을 만나서 절망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신 사명 때문에 우리의 절망은 희망이 됩니다. 오히려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기적을 경험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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