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박한 심판을 피해야 합니다 눅3:7-14 2015년 7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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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박한 심판을 피해야 합니다 눅3:7-14 2015년 7월 26일2018-12-03T22:52:21+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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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지난 주 세례 요한이 디베료 황제가 통치하는 시기에, 빈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것을 통하여 어떤 교훈을 받아야 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음성을 들려주신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신다고 말씀을 드렸죠? 인간은 어려움을 당해야 하나님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려운 때일수록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를 주목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빈들에서 들은 하나님의 음성은 무엇일까요? 요단강으로 가서 ‘회개하라’고 외친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나라를 잃고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위로의 메시지가 아닌 회개의 메시지를 전달하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회개만이 진정으로 살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회개 없이는 예수님을 만날 수 없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고, 올바른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회개만 하라고 외치지 않고 주의 길을 예비하라고 말했습니다.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는 ‘모든 골짜기’는 메어져야 하고 ‘모든 산’은 낮아져야 하고 ‘굽은 길’은 곧게 하고 ‘험한 길’은 평탄케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골짜기와 산과 길에 관하여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교만한 마음, 비뚤고 거친 마음을 말한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기 위해서는 원수까지 용서해야 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하고, 온유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세례 요한이 자신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나아오는 무리를 향하여 외친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요한은 자신에게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를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라고 했습니다. ‘독사의 자식’이란 마귀의 자녀를 일컫는 말로써 저주스러운 욕설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런 독설을 들은 무리가 어떤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세례를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들’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세례는 죄를 씻는 것을 상징하는 예식입니다. 그런데 왜 세례요한이 죄 씻음을 받기 위해 나아오는 자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했을까요? 그 이유를 8절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세례를 받으러 온 자들이 진심으로 회개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겉으로만 하나님의 백성인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데는 관심이 없고, 단지 아브라함의 후손인 것처럼 보이기 위해 세례를 받으러 왔기 때문에 독사의 자식이라는 욕설을 퍼부었던 것입니다.
    세례는 한 번만 받는 것이기 때문에 두 번 다시 받을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세례를 받기 위해 요한에게 나아간다면 어떤 말을 들을까요? 아마도 우리도 똑같이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말을 들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세례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삶이 무엇입니까? 옛 사람에 대하여는 죽고 새 사람에 대하여 사는 것입니다. 즉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많이 드리지만 삶은 세상 사람들과 별다른 차이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세상 사람들보다도 못한 삶을 사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우리가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신 목적을 온전히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신 것은 자녀다운 삶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단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감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죄 사함을 받게 하는 세례를 받으러 온 무리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살라고 말하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었습니다. 누가복음 3장 11-14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부가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군병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세례요한의 설교를 들은 무리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무리들입니다. 둘째는, 세리들입니다. 셋째는 군병들입니다.
    첫째로 ‘무리들’에게 한 말은 무엇입니까? 옷 두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주고,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옷 한 벌로 더위에는 태양을 가리고 밤에는 이불로 사용했기 때문에 ‘옷을 두벌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가 부자라는 뜻입니다. 또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했기 때문에 먹을 것이 있다는 것 역시 그가 부자라는 뜻입니다. 요한이 부자들에게 나누어주는 삶을 살라고 한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회개에 합당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진 자’들이 나누는 삶을 살아가지 않는 것은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고 독사의 자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크리스챤 부자들은 돈이 좀 있다고 과시하거나 다른 사람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마음을 낮추고 가난한 자들과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둘째로, ‘세리들’에게 한 말은 무엇입니까? 그들에게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세리들이 정한 것외에 더 거뒀을까요? 당시는 정한 세금 외에 더 거둬들이는 것을 자신의 몫으로 챙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 세리들은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다는 말을 들었던 것입니다.
    셋째로, ‘군병들’에게 한 말은 무엇입니까? 그들에게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고 하였습니다. 즉 받는 월급으로 만족해야지 힘을 가졌다고 폭력을 행하고 거짓으로 돈을 탈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이 무리들, 세리, 군병들에게 각각 그들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을 말했지만 근본적으로는 다 같은 말입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욕심을 버리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욕심을 버리고 다른 사람을 돌아보는 삶을 살지 않으면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문제가 욕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욕심이 없으면 죄를 짓지 않습니다. 인류의 첫 조상 아담이 죄를 범한 것도 욕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욕심이 자라듯이 나눔도 자라기 때문에 욕심을 버리고 나눔을 실천하는 것을 훈련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후 6:6-10).

    혹 여러분 중에 ‘나눔’이라는 단어가 자신과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우리 중에 나눌 것이 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만 바꾸면 얼마든지 나눔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물질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제가 ‘예스’라는 책에서 밝혔듯이 예수께서 스스로 가난하게 되시고 나눔의 삶을 사실 수 있었던 것은 물질을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나눔의 대상으로 이해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인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물질은 소유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말고 나눔의 대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돈을 쌓아놓기 위해 벌지 말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벌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에 하나님께서 채워주시고 그분의 방법으로 부유케 하십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처럼 자신의 배를 채우지 않고 없는 가운데서도 나눔을 실천할 때에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고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부족한 중에서도 필리핀이나 캄보디아 등 어려운 지역에 복음과 함께 빵을 주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감동을 받으시고 우리를 더욱 더 풍성하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읽은 동화 중에 “의좋은 형제” 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고려 말 이성만과 이순 형제가 같은 마을에서 농사를 함께 지으면서 사이좋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함께 농사를 지어 가을이 되면 벼를 수확해서 사이좋게 나누었습니다. 그러던 중 동생이 먼저 결혼을 했습니다. 그 해도 이전처럼 똑 같이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형이 가만히 생각해보니 동생이 신접살이를 시작하면 생각지도 못하던 지출이 있을 것이 뻔한 데 추수한 벼를 너무 야박하게 나눈 것이 아닌가?”하는 마음이 들어서 그 길로 볏단으로 달려가 동생의 볏단이 자기 볏단보다 한 뼘쯤은 더 높아지도록 옮겨놓았습니다. 그런데 동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형님이 집안 대소사를 혼자 다 떠맡고 있는데 내 생각만 하고 형님이 주시는 대로 넓죽 받다니…”라는 생각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그길로 가서 자기 볏단에서 몇 짐을 형님의 볏단으로 옮겨 놓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형의 볏단이 더 높았지만 그 다음 날에는 동생의 볏단 더 높았습니다. 그 다음의 내용은 말씀드리지 않아도 여러분이 더 잘 아실 줄 압니다. 이 동화는 ‘동국여지승람’을 통해 전해져 왔는데, 실질적으로 1978년 충남 예산군에서 발견된 “우애비(友愛碑)”란 비문을 통해서 실화였음이 밝혀졌습니다.
    왜 우리가 이 이야기를 들으면 감동을 받는 것일까요? 우리가 하지 못하는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욕심을 내려놓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돈 앞에서 맥을 못 춥니다. 돈 문제가 개입되면 부모도 없고 자식도 없고 형제도 없습니다. 그런데 의좋은 형제는 돈보다 형제애를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혹 빙점이라는 책을 기억하십니까? 1990년도에는 KBS 2TV에서, 2004년도에는 MBC에서 드라마로 방영할 정도로 유명한 소실입니다. 그 책은 원죄에 관한 인간의 내면 의식을 치밀하게 다루고 있는데 그 책의 저자는 ‘미우라 아야꼬’입니다. 그녀는 아주 독실한 크리스챤 입니다. 그가 슈퍼를 개업했는데 손님이 많아서 무척 돈을 많이 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의 슈퍼 때문에 옆의 가게들이 장사가 안 되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옆의 작은 가게에 있는 물건들은 자기 슈퍼에 두지 않고, 그 물건을 찾는 손님을 옆의 가게로 정중하게 보내주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너무 바빴던 시간에 여유를 가지게 되어 평소 자신이 하고 싶었던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때에 쓴 글이 바로 ‘빙점’이라는 책입니다. 우리는 욕심을 버리고 나눔을 실천할 때에 회개에 합당하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9절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여기서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다는 말은 하나님의 심판이 매우 임박해 있다는 것입니다. 즉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으면 곧 하나님께서 곧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의 열매를 맺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사실 요즘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개독교’와 ‘먹사’ 라는 말을 듣고 온갖 비판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심판을 시작하셨다는 증거입니다. 빨리 돌이키지 않으면 어떤 심판이 우리에게 임할는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고 말했는데 왜 곧바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지 않으시냐는 것입니다. 즉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살고 있는데 왜 우리에게 심판을 신속히 행하시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누가복음 13장에 나오는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비유’를 통해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비유에는 과수원 주인과 과수원지기의 대화가 나옵니다.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는데 3년이 지나도 열매가 없자 과수원 주인이 땅만 버린다는 생각에 과수원지기에게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과수원지기는 주인에게 금년만 그대로 놓고 내년에 봐서 그 때도 열매가 없으면 찍어버리라고 사정합니다. 여기서 과수원 주인은 하나님을 의미하고, 과수원지기는 예수님을 의미하고, 무화과나무는 바로 저와 여러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열매 없는 삶을 보시고 심판하시려고 하지만, 예수님의 간청으로 아직도 찍혀 불에 던져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더뎌지고 있는 것은 중보자이신 예수께서 하나님께 심판을 말아달라고 간청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 늦어지기 전에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살기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며 살아왔던 삶을 돌이키고, 자신에게 있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해야 합니다.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누군가에게 아무 것도 줄 수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입으로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 말고 삶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을 보여주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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