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마누엘의 확신은 어려울수록 빛난다 출 3장 1-12절 2013.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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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의 확신은 어려울수록 빛난다 출 3장 1-12절 2013.1.272018-12-03T20:21:28+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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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로부터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자식들에게 용기와 담력을 키워주기 위해 아주 독특한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자식들을 숲 속에서 야생동물들과 함께 밤을 지내게 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숲 속에서 긴 밤을 보내니 얼마나 두렵고 무섭겠습니까? 그런데 날이 밝아오면서 그들은 아버지가 가까운 나무 뒤에서 화살을 당긴 채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는 것을 보고서 큰 안도감을 가졌습니다. 아버지는 자식에게 위험이 닥치지 않도록 그가 모르게 밤새도록 곁에서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려운 상황에서 혼자 있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떤 상황에 있을지라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는 것을 ‘임마누엘 확신’이라고 합니다. 저는 오늘 ‘임마누엘의 확신은 고난 중에 빛난다’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모세는 애굽에서 자기 동족을 학대하는 애굽 사람을 때려 숨지게 하고 그 일이 탄로가 나자 광야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드로의 양을 치며 40년간을 보내며 결혼도 하고 자식들을 낳았습니다. 이제 그의 나이 80이 되었습니다. 그가 80이 되던 어느 날 장인 이드로의 양을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습니다. ‘호렙’이란 히브리어로 ‘황폐한 땅’이란 뜻을 갖고 있는데 ‘시내산’ 또는 ‘모세의 산’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 모세가 그의 나이 80세가 되어 양을 이끌고 호렙 산으로 갔을까요? 성경은 그가 왜 양을 이끌고 호렙 산으로 갔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호렙 산의 높이’를 통하여 그 이유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호렙 산은 미디안 광야에서 제일 높은 산입니다. 산이 높을수록 정상에 올라가면 멀리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산이 높다는 것은 전망이 좋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 모세는 애굽을 떠난 지 40년이 지나 노인이 되었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외로움과 고독감을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특별히 애굽에 있는 공주 어머니와 젖을 먹이던 친모가 생각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을 갈 수 없는 현실이었기에 멀리서나마 애굽을 바라보기 위해서 호렙 산에 올라가서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왜 이북에서 내려오신 분들이 통일 전망대를 자주 찾습니까? 그곳에 가면 북녘 땅을 훤히 내다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곳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북녘 땅을 바라보면서 그곳에 두고 온 부모 형제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외로움을 달래기도 하는 것입니다. 모세도 애굽으로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호렙 산에서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호렙 산에 이르자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났습니다(2절). 여호와의 사자가 호렙산에서 모세에게 나타났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찾아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세가 다른 곳에 있을 때에 찾아오시지 않고 호렙 산으로 갔을 때에 찾아오셨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조금 전에 제가 왜 모세가 양 무리를 이끌고 호렙 산으로 갔다고 말씀을 드렸습니까? 그가 고향을 떠나온 지 40년이 지났지만 보고 싶은 공주와 모친을 만날 수 없기에 멀리서나마 애굽을 바라보며 자신의 슬픔을 달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때에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특별히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에 더욱 더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느 상황에 처해 있습니까? 혹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있습니까? 소망이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있습니까? 외롭고 힘든 상황입니까?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더욱 더 가까이 하시는 때임을 믿어야 합니다. 아시는 분이 있지만 아직 모르는 분을 위해 읽어드립니다. (두 발자국) “어느 날 밤 꿈을 꾸었네. 주와 함께 바닷가 거니는 꿈을 꾸었네. 하늘을 가로질러 빛이 임한 그 바닷가 모래위에 두 짝의 발자국을 보았네. 한 짝은 내 것 또 한 짝은 주님의 것 거기서 내 인생의 장면들을 보았네. 마지막 내 발자국이 멈춘 곳에서… 내 삶의 길을 돌이켜 보았을 때 자주 내 삶의 길에 오직 한 짝의 발자국만 보았네. 그 때는 내 인생이 가장 비참하고 슬픈 계절이었네. 나는 의아해서 주님께 물었네. “주님 제가 당신을 따르기로 했을 때, 당신은 저와 항상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지요. 그러나 보십시오. 제가 주님을 가장 필요로 했을 때 그 때 거기에는 한 짝의 발자국 밖에는 없었습니다. 주님은 저를 떠나계셨지요?” 주님께서 대답하시었네. “나의 귀하고 소중한 아이여, 나는 너를 사랑하였고 나는 결코 너를 떠나지 않았단다. 네 시련의 때 고통의 때에도… 네가 본 오직 한 발자국 그것은 내 발자국이니라. 그 때 내가 너를 등에 업고 걸었노라.”시인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때에 주님께서 자신을 떠나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정반대였습니다. 오히려 시련의 때에 하나님께서 더욱더 자신과 함께 하셨습니다. 시련이 클수록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확신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성공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더욱 더 그들과 함께 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공의 자리는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자리는 하나님을 멀리하고 배신할 수 있는 자리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내 백성은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한다”(호 4:7)고 말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최고의 위기는 고난의 때가 아니라 성공의 때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그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왕에게 쫓겨 다닐 때에는 하나님을 의지하자 하나님께서 그와 항상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왕이 되고나서 사방을 평정하자 하나님을 멀리하고 죄를 범하였습니다. 반면에 베드로는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고기를 잡지 않으려고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그가 그물을 씻었다는 것은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에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게 하셨습니다. 실패가 성공의 기회로 바뀐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이 가까이 하는 때와 하나님께서 가까이 하시는 때가 전혀 다름을 알아야합니다. 사람들은 출세하고 유명해질 때에 찾아옵니다. 그래서 권력을 쥐면 ‘문전성시’를 이루지만 권력을 잃으면 ‘문전작라’하는 것입니다. ‘문전작라’라는 고사 성어가 만들어진 것은 전한 7대 황제인 무제(武帝)때 급암과 정당시(鄭當詩)라는 두 현신(賢臣) 때문이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한때 각기 구경(九卿:9개 부처의 각 으뜸 벼슬)의 지위에까지 오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둘 다 개성이 강한 탓에 좌천, 면직, 재 등용을 되풀이 하다가 급암은 회양 태수 (淮陽太守)를 끝으로 벼슬을 마쳤습니다. 이들이 각기 현직에 있을 때에는 방문객이 늘 ‘문전성시’를 이루었으나 면직되자 방문객의 발길이 뚝 끊어져 문 앞에 새 그물을 칠 정도라는 뜻에서 ‘문전작라’라는 고사성어가 생겼습니다. 사실 이런 현상은 세상에서 다반사로 일어납니다. 심지어 가족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같은 형제라도 세상적으로 잘 나가면 집안에서 대우를 받고 능력이 없으면 천대를 받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러했습니다. 예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행하실 때에는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심문을 받으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게 되자, 제자들마저 주님의 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자신을 배신한 제자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여 벌벌 떨고 있을 때에 오히려 그들에게 찾아가셔서 부활의 소망을 심어주셨습니다. 혹 이런저런 일로 어려운 상황가운데 처한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주님께서 더욱 가까이 찾아오시는 때인 줄 아시고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사자가 모세에게 찾아오실 때에 어떻게 찾아오셨습니까?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나타났습니다. 즉 불을 대동하고 나타나셨습니다(2절). 왜 여호와의 사자가 모세에게 나타날 때에 그냥 나타나지 않고 불꽃 가운데서 나타났을까요? 그것은 모세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가 곧 하나님이심을 알리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렇습니다. 불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구약시대에는 동물을 죽여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으셨는지 안 받으셨는지를 무엇으로 확인했습니까? 불이 내려와서 제물을 태우면 하나님께서 받으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받으시지 않은 것으로 알았습니다. 열왕기상 18장에 보면 엘리야가 850명의 바알 선지자들과 일대 전쟁을 합니다. 엘리야는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가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하소서.”라고 기도를 마치자, 즉시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번제물과 주변에 있는 돌과 흙을 태워버렸습니다. 그러자 바알 선지자들도 하루 종일 “바알이여 바알이여!”하며 외쳤습니다. 그러나 불커녕 아무 것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이를 지켜본 백성들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땅에 엎드려 “오직 여호와만이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모세에게 나타날 때에 불을 대동한 것은 그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가 곧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얼마든지 신비한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환상을 볼 수도 있고, 이상한 음성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신비하다고 다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생각하면 큰일 납니다. 마귀는 자신을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기 때문에 마귀는 자기의 음성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음성으로 믿도록 속이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우리는 다미선교회 이장림 목사가 1992년 10월 28일에 주님이 재림하신다고 주장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왜 그가 그렇게 주장했습니까? 그것은 계시를 받는 아이들 5명이 모두 10월 28일에 예수께서 오신다고 예언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께로부터 온 음성이 아니라 마귀로부터 온 음성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영적인 체험을 할 경우는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를 먼저 말씀으로 분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기준 또는 규범’이라는 뜻을 가진 ‘캐논’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장림 목사가 5명의 아이들이 예수께서 특정한 날짜에 오신다고 주장했을 때에 그것을 말씀으로 검증했어야 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주님께서 세상의 종말의 때 즉 자신의 재림의 날에 대하여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날과 그 시는 아무도 모르고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섯 명이 아니라 수십 억 명이 예수께서 특정한 날에 오신다는 음성을 들었을지라도 그것은 주님의 음성이 아니라 마귀의 음성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해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요일 4:1).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5절) 하나님께서는 가장 먼저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고 하셨습니다. 신은 세상의 온갖 구석을 다니느라 더렵혀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신을 벗으라’고 하신 것은 회개하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회개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장소를 예배당이라고 합니다. 예배당이 무엇 하는 곳입니까?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곳에 오면 가장 먼저 회개부터 해야 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살피고 잘못된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자신을 살피지 않으면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신을 벗는다’는 것은 회개하라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 못지않게 다른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권리를 모두 포기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룻기 4장 7-8절). 그래서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보아스가 룻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나오미의 가정에 책임과 의무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찾아가서 그 의무를 이행할 것을 요구하자, 그 사람이 신발을 벗어 자신의 권리를 포기했기 때문에 그녀를 자신의 아내로 맞이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고 하신 것은 그의 모든 권리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갈 때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작정하신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고 하신 후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 귀에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들리고 또한 애굽 사람이 내 백성을 괴롭게 하는 것을 보았으니 이제 너는 바로 왕에게 가서 내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라”(9-10절). 한 마디로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는 사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80이나 되어 노인이 된 모세가 어떻게 애굽에서 400년간이나 종노릇하던 이스라엘백성들을 구원해 낼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모세는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11절)라고 반문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는 40년 전에 사람을 죽인 죄로 타국으로 도망을 갔던 자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뭐라고 답변하셨습니까?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12절). 무슨 말입니까? 네 힘으로는 안 되지만 내가 너와 함께 하면 그 일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스라엘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는 일은 모세가 애굽에서 바로의 궁전에 있을 때부터 하려고 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동족이 애굽 사람에게 얻어맞는 것을 보고 애굽 사람을 돌로 쳐 죽여서 모래에 파묻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바로왕의 귀에 들어가게 되어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가 80이나 되어 늙고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때에 하나님께서 직접 그 일을 사명으로 주시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그것을 이루게 하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일은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자기의 힘과 능력으로 이스라엘백성들을 구원하려고 할 때에는 실패했지만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고 그가 하나님께 순종하자 그들을 애굽에서 해방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라고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능력을 주시면 우리는 그 어떤 일도 해낼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 장학위원회 위원장이신 유제봉집사과 조영희 집사님의 딸인 유지현양이 있습니다. 그 자매가 유럽에 가서 경영학석사인 MBA를 따겠다며 독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일반적으로 미국으로 MBA를 따려고 가는데 그 자매는 유럽으로 간다고 해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독일로 가기 전날 전화를 걸어서 축복기도를 해주면서 그 자매에게 간단히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그 핵심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너보다 거기 먼저 독일에 가 계신다. 그리고 네가 공부하는 동안 힘들과 어려울 때에 너와 항상 함께 하신다.” 저 역시도 한국에서 영어로 석사과정을 할 때에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포기하려고 했지만 이 말씀을 붙잡고 승리했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께서 앞서 행하시고 함께 하심을 믿으시고 힘들고 어려운 세상에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영국의 한 광고회사가 큰 상을 내걸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서 런던까지 가장 빠른 시간에 갈 수 있는 방법을 묻는 퀴즈를 내었습니다. 워낙 상품이 컸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응모했습니다. 비행기가 가장 빠르다느니, 기차를 타고 가다가 어느 시점에서 버스로 갈아타는 게 가장 빠르다느니, 새벽에 지름길로 승용차로 가면 가장 빠르다느니 등등 사람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해내어 응모를 했습니다. 그런데 누가 일등 상을 탔는지 아십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간다”라는 답을 써낸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아무리 먼 길이라도 아주 가깝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거리 계산법’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과 함께라면 우리의 인생길이 아무리 멀고 험한 길이라도 즐거운 마음으로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가지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닥쳐도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면 이 세상살이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모세는 비록 양을 치는 목동으로 고독한 인생을 살았지만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고, 애굽에서 종노릇하던 이스라엘백성들을 인도해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무식하고 사회적으로 별 볼일 없는 자들이었지만 “세상 끝날까지 항상 내가 너희와 함께 하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믿고 세상을 뒤집어 놓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임마누엘의 확신으로 현재의 고난을 넉넉히 이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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