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은 양의 비유를 통 누가복음 15장 1-7절 2017년 7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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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은 양의 비유를 통 누가복음 15장 1-7절 2017년 7월 2일2018-12-03T23:28:59+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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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소위 ‘잃은 양의 비유’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비유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신 배경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5장 1-2절을 다시 읽어보시겠습니다. “모든 세리들과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께서 ‘잃은 양의 비유’를 말씀하신 상황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모든 세리들과 죄인들과 더불어 식사를 하시는 것을 보고 비난할 때였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당시 유대백성들은 세리를 민족의 피를 빨아먹는 자로 백성들에게 죄인 취급했기 때문에 그들과 상종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식사를 같이 한다는 것은 단지 음식을 같이 먹는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상대방을 대화의 상대로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기 때문에 이를 두고 수군거리며 비난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잃은 양의 비유’는 한마디로 주인이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은 것 때문에 너무 기뻐서 잔치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 ‘잃은 양의 비유’를 자신을 비난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하셨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지금 자기와 함께 식사하는 세리와 죄인들이 잃었다가 다시 찾은 양과 같은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이 즐겁고 기쁘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는 스스로 죄 없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아니라 자신을 죄인으로 생각하고 예수님께 나아온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고 자신보다 도덕적으로 못한 자들을 정죄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도리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주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기뻐하십니다.
    혹 여러분은 잘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정죄하는 마음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자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통회하고 자복하는 마음을 갖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비유를 듣는 내내 자신의 마음을 낮춰야 합니다. 마음이 높아진 상태에서는 이 비유를 들어도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잃은 양의 비유’의 주인공이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언 듯 보기에는 잃은 양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잃은 양이 아니라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고 기뻐하는 목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잃은 양을 찾는 과정에서 드러난 목자의 태도를 통해서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첫째로, 목자는 잃은 양 한 마리를 귀히 여겼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잃은 양의 비유, 잃은 동전의 비유, 잃은 아들의 비유가 차례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잃은 양의 비유는 100마리 중에 한 마리, 잃은 동전의 비유는 10개중에서 하나, 잃은 아들의 비유는 두 아들 중에서 한 아들을 잃었다가 다시 찾았을 때의 기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세 비유가 각각 다른 이야기인 것 같지만 서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잃어버린 하나를 찾았다는 것입니다. 잃은 양의 비유에서도 양 일 백 마리 중 한 마리를 잃어버렸는데 그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나섰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를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주 하나의 소중함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8장 5절에 보면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또 마태복음 18장 6절에 보면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소자 중 한 사람만이라도 실족케 하는 것은 스스로 자기 목숨을 버려야 할 만큼 매우 큰 잘못을 범한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 40절에 보면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말씀들은 모두 지극히 작은 한 사람에게 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하는 것과 같을 정도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인류도 처음에는 아담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교회도 예루살렘교회 하나로 시작되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여럿을 낳아도 하나하나를 귀히 여기듯이 하나님께서 이 지구촌에 모래같이 많은 사람들이 있어도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히 여기십니다. 우리는 하나의 소중함을 깨닫고 한 영혼을 귀히 여기는 마음으로 영혼을 구원해야 합니다.

    둘째로, 목자는 경제논리로 잃은 양을 찾지 않았습니다. 본문을 보시면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하여 99마리를 들에 두고 찾도록 찾아다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경제논리로 보면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99마리 양을 남겨 둔 곳이 어딥니까? 들입니다. 따라서 언제 곰과 사자와 같은 맹수가 나타나서 그것들을 잡아먹을지 알 수 없습니다. 또한 목자가 없는 사이에 99마리의 양들이 제멋대로 다니다가 웅덩이에 빠져죽을지, 가시에 찔려 큰 상처를 입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잃은 양을 들에 두고 찾아 나설 경우는 99마리를 돌볼 사람을 고용해야 하기 때문에 많은 비용이 듭니다. 또 잃은 양을 찾았을 때에 어떻게 했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자 벗과 이웃을 불러 잔치를 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양 한 마리의 값은 기껏해야 20-30만원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벗과 이웃을 불러다가 잔치를 베풀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합니다. 양 한 마리의 값보다 더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잃었다가 다시 찾은 양 때문에 잔치를 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잃어버린 양의 생명을 물질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생명보다 귀한 것은 없습니다. 생명은 물질로 바꿔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 16:26)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생명이 경시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소중한 생명이 돈으로 거래되고 있습니다. 어쩌면 세상이 이렇게 돌아간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렇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조차도 돈의 논리에 의해 운영되고 있습니다. 얼마 전, 김기동 목사에 대한 비리가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방영되어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 더욱 더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방송을 보면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하나님께 정말 감사를 드리는 것은 더처치는 돈보다 생명을 더 소중히 여기는 사역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번 갈 때마다 적게는 5백 만 원에서 많게는 천만 원에 가까운 돈을 지출합니다. 그리고 동남아는 4-7시간, 아프리카는 16시간을 넘게 비행기를 타고 갑니다. 이번에는 나이로비공항까지 비행기를 탄 시간만 16시간이고 경유지에서 대기하는 시간을 포함하면 20시간이 넘었습니다. 그리고 나이로비공항에서 사역지까지 7시간이나 차를 타고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대형집회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아도 20명 내외의 사람들을 훈련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경제논리에는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합니까?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는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사역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정신으로 사역할 때에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물질보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것을 먼저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어떤 것보다 자신의 영적생명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돈이나 명예나 권세를 위해 내 영혼을 희생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것을 취하기 위해 자신의 영혼을 고사 직전까지 내몰아서는 안 됩니다. 돈과 명예와 권세보다 자신의 영혼을 귀히 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오수아 부친과의 대화). 그리고 자신의 영혼을 소중히 여기기에, 다른 사람의 영혼도 소중히 여기고 그들을 구원하는 일에 자신의 가진 모든 것을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목자는 잃은 양을 끝까지 찾았습니다. 4절을 다시 한번 읽어 보십시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잃은 양을 찾되 어떻게 찾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찾도록 찾아다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찾도록” 찾아다닌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잃은 양을 끝까지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잃은 양은 끝까지 찾아야 합니다. 사실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아나서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해야 합니다. 양을 찾는 과정에서 맹수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어두운 밤길에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잃은 양을 찾기 위해서는 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생명을 구한다는 것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무시를 당해야 하고, 천대받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여인이 아이를 낳다가 힘들다고 포기하면 어떻게 됩니까? 포기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산모와 아이 모두에게 위험합니다. 마찬가지로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다가 중간에 포기하면 자신이나 전도 대상자에게나 다 해롭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전도를 중도에 포기하면 열매를 맺지 못해 더 이상 전도하고픈 마음을 잃게 되어 주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삶을 살게 되고, 전도 대상자 역시 구원받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전도할 때에는 끝까지 해야 합니다. 마귀가 우리를 넘어뜨리지 않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유혹하듯이 우리도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별히 가족의 구원은 더 어렵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영혼구원을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포기하지 않으면 반드시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포기하지 않는 개구리가 버터를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전도하면 반드시 지옥을 향해 달려가는 영혼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기도의 사람 죠지 뮬러는 평생 친구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했는데 한 친구를 위해서는 무려 65년간을 기도해서 결국은 구원을 받게 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목회자요 강해설교자인 제임스 보이스 목사에게 어느 교인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우리 교회가 얼마나 성장하기를 원하십니까?” 이때 제임스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예, 저는 우리 동네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을 때까지 교회가 성장하기를 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든 민족이 주님께 돌아올 때까지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저는 이번에 케냐사역을 마치면서 더처치의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2030123007000’입니다. 2030년까지 12명의 단독선교사와 300명의 현지인 사역자와 7000명의 평신도사역자를 세우고 그들과 함께 D3로 전 세계를 복음화 한다는 전략입니다.

    그런데 잃어버린 영혼을 끝까지 전도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것을 가장 기뻐하신다는 것을 온전히 깨닫는 것입니다. 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르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우리가 전도하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전도란 잃었던 자녀를 다시 찾아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에게 잃은 자식을 다시 찾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잃었던 자녀를 다시 찾으실 때에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영혼을 구원하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아십니까? 7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 하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 99명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회개하고 돌아온 한 영혼을 인하여 더 기뻐하십니다. 이 말은 진짜 의인 99명보다 죄인 한 명이 주님께 돌아오는 것을 기뻐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잃어버린 영혼이 돌아오는 것을 이 정도로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에 핍박을 받고 또 상대방이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아도 그가 구원을 받을 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을 생각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전도해야 합니다.
    둘째로, 전도대상자가 누릴 축복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또 찾은 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목자는 잃은 양을 찾았을 때에 어떻게 했습니까? 그 양을 혼내거나 때리지 않았습니다. 즉시 어깨에 메었습니다. 목자가 양을 자신의 어깨에 메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양이 쉼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목자의 어깨에 메어져있기 때문에 더 이상 다리를 사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쉼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어깨’가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되어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즉 목자는 양을 찾았을 때에 한쪽 어깨에만 짊어지지 않고 양어깨에 짊어진다는 것입니다. 목자의 양 어깨에 메어져 있는 양은 편히 안식을 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안전을 보장받습니다. 목자의 어깨에 있는 양을 감히 어떤 짐승이 공격하겠습니까? 그래서 신명기 33장 12절은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는 그 곁에 안전히 거하리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날이 맟도록 보호하시고 그로 자기 어깨 사이에 처하게 하시리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에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비신자들이 이 세상에서 온갖 죄 가운데 방황하고 지치고 불안한 삶을 살지만 그들이 구원을 받고 주안에서 누릴 안식과 안전을 생각해야 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잃은 양이 너무 많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떠나 살기에 온갖 저주가운데서 살다가 지옥에 가서 영원히 고통을 당해야 할 불쌍한 자들입니다. 일 년에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겠다는 심정으로 그들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구원하는 자로 살아가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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