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의 날은 믿음으로 맞이해야 합니다. 눅17장 22-37절 2017.9.24

//인자의 날은 믿음으로 맞이해야 합니다. 눅17장 22-37절 2017.9.24
인자의 날은 믿음으로 맞이해야 합니다. 눅17장 22-37절 2017.9.242018-12-03T23:33:30+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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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지난주에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예수께서 바리새인이 함께 나누신 대화를 살펴보았습니다. 바리새인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느냐”는 질문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예수님과 바리새인의 생각이 달랐다고 말씀을 드렸지요? 그것은 바리새인들이 구약성경의 메시아 예언을 잘못 해석했기 때문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성경을 아전인수로 해석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해석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누구에게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22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22절).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상이 바리새인이 아니라 제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22절이 ‘And’로 시작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20-21절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 갑자기 말씀의 대상을 바리새인에서 제자들에게로 바꾸셨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자들도 바리새인들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잘못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제자들도 하나님의 나라를 정치적인 메시아가 다스리는 현세적인 것으로만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그렇게 생각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사도행전 1장 3-6절을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시기전 40일 동안 이 세상에 계실 때에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하시자, 제자들이 뭐라고 물었습니까?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제자들이 이렇게 질문한 것을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의 세례를 받는다고 하신 것은 성령께서 임하시면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하고 지속적으로 누릴 것을 말씀하신 것인데, 그들은 이를 이스라엘나라가 로마제국의 억압에서 해방되는 것으로 잘못 이해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제자들마저도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것을 통하여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지만 말씀을 하나님의 뜻대로 깨닫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하늘과 땅만큼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실례를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요? 주님의 지상명령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마지막에 무엇을 당부하셨습니까? “가서 제자 삼으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적어도 하나님의 자녀라면 다른 것은 몰라도 이 명령에는 순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명령에 제대로 순종하는 목회자나 평신도를 찾아보기란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주님께서 “가서 제자 삼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단지 성경공부를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를 삼아야 가장 효과적으로 전도할 수 있기 때문에 제자 삼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올바로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것조차도 잘못 알고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눈으로 성경을 읽지 말고 주님의 눈으로 읽기 위해 몸부림쳐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개혁 500년을 맞이한 우리들의 자세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셨습니다. ‘인자’라고 하셨습니다. 사복음서에 ‘인자’라는 말이 81회나 나올 정도로 예수께서 이 칭호를 즐겨 사용하셨습니다. 왜 예수께서 ‘인자’라는 칭호를 사용하셨을까요? 그것은 다니엘서 7장 13-14절과 누가복음 17장 25절을 함께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다니엘서 7장 13-14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단 7:13-14). 여기서 ‘인자’는 영어로 ‘the Son of man’입니다. 즉 사람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자에게 무엇을 주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었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다스리는 나라는 영원히 멸망치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장차 인자가 다스리는 나라는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누가복음 17장 25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바 되어야 할지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세상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즉 인자가 먼저 죽어야 영원히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리는 영광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다르게 말씀하고 있는 것을 통하여 인자가 어떤 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먼저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죽은 후 하나님의 나라를 영원히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인자’라는 칭호를 사용하신 것은 단지 영광의 주이실 뿐 아니라 수난의 종이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바 되어야 한다는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고난이 없으면 영광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장차 천국에서 영원히 왕 노릇하기 위해서는 먼저 십자가를 지는 자기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인자로 소개하시면서 ‘인자의 날’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2절, 24절, 30절, 31절에 ‘인자의 날’이 나옵니다. 입니다. ‘인자의 날’이란 예수께서 마지막에 다시 심판주로 오시는 날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인자의 날’을 어떻게 소개하셨습니까? 그 날 하루를 보고자 해도 볼 수 없고, 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인자가 순간적으로 오시기 때문에 저기 있다 여기 있다 해도 가지도 말고 따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인자의 날이 우주적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하기 위해 특정한 장소를 찾아다녀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즉 우리의 삶의 현장이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는 장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단들은 한결같이 어떻게 말합니까? 특정한 장소와 때를 안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와 장소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았는데 특정한 장소와 때를 말하는 것은 전부 잘못된 것입니다. 왜 마귀가 이단들에게 이런 주장을 하게 하는지 아십니까? 재림신앙을 갖지 못하게 해서 주님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다시피 이장림 목사를 중심으로 1992년 10월 28일 세계가 종말을 맞이한다는 예언이 빗나간 이래 교회가 재림신앙을 잃어버리고 이 세상을 바라보자 점점 교회가 무력하게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인자의 날이 언제이고 그 장소가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그날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날이 다가올수록 ‘가서 제자 삼으라’는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인자의 날에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26-30절입니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눅 17:26-30).
    무슨 말씀입니까? 한마디로 인자의 날은 “노아와 롯의 때에 일어난 일이 그대로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노아와 롯의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다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롯의 때는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멸망을 당했습니다. 우리는 알다시피 노아의 때와 롯의 때에 사람들이 얼마나 악을 행했는지 모릅니다. 특히 성적인 범죄와 불의와 부정과 부패가 온 세상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들이 이런 죄악으로 멸망을 당했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들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다가 멸망을 당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노아와 롯의 시대에 사람들이 이렇게 하는 것이 죄를 지은 것입니까? 그것은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의 가진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렇게 해야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 노아와 롯의 때에 사람들이 그렇게 하다가 멸망을 당했다고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육신적인 삶만 관심을 가지고 살았지 믿음으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노아의 때는 ‘시집가더니’ 롯의 때는 ‘짓더니’ 멸망을 당했습니다. 즉 그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육신의 일에만 몰두했기에 그들을 심판하셨던 것입니다. 반면에 노아와 롯이 당대 사람들과 같이 살았지만 그들이 멸망을 당하지 않았던 것은 그들에게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노아도 그들처럼 먹고 마시고 자녀들도 시집 장가를 보냈지만, 그는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방주를 만들었고, 롯도 당대 사람처럼 먹고 마셨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믿음으로 소돔을 떠났기 때문에 당대의 사람들과 함께 멸망을 당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마지막 인자의 날이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어떻게’ 하라고 당부하셨습니까? 31-35절을 읽습니다. “31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32 롯의 처를 기억하라 33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3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35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지붕에 있다가 세간을 가지로 집 안으로 가지 말고, 밭에 있는 자도 그렇게 하지 말라는 말씀이 무슨 의미입니까?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앞만 보던지 뒤도 돌아보던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는 다른 것에 신경 쓰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두 가지에 집중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도 사랑하고 저 세상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사랑하고 재물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환난 중에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했습니다. 그들은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뒤를 돌아보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께서 이것을 교훈하시기 위해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롯의 처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롯의 처가 어떻게 최후를 맞이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가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말을 듣지 않고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지 않고 이 세상 것에 미련을 두고 그것에 마음을 두면 최후가 비참하게 됩니다. 다른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하는 사람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즉 같은 지붕 밑에서 사는 부부일지라도 한 사람은 들림을 받지만 다른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같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일지라도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지만, 다른 사람은 버려짐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그런데 마지막 날에는 그런 일이 현실이 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37절 말씀을 살펴보고 마치겠습니다.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어디오니이까 이르시되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인자의 때와 장소는 모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더니 제자들은 뭐라고 질문했습니까? “주여 어디 오니이까?” 한마디로 제자들은 동문서답을 했습니다. 만일 저라면 제자들의 동문서답에 버럭 화를 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겉으로는 예수께서도 동문서답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주여 어디 오니이까”라는 질문에 답을 주신 것으로, 주검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이는 것처럼 때가 되면 그들의 의문이 풀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언제 오실지,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에 대해 궁금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머지않아 때가 되면 모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를 고민하지 말고 마지막 그 날에 주님께서 다시 오심을 믿고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종말론적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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