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훈련은 꼭 받아야 합니다. 왕상 17^1-16 2013.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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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훈련은 꼭 받아야 합니다. 왕상 17^1-16 2013.7.282018-12-03T20:35:39+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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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목사님이 주일낮 예배 후 새가족을 맞이하면서 “앞으로 계속해서 주일에 빠지지 않고 신앙생활을 잘 하시면 세례도 주고, 집사도 드리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신입교인은 목사님의 말에 귀가 번쩍 뛰어 “아니 목사님!, 정말 신앙생활을 잘하면 집사줍니까?” “그럼요, 목사가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이 신입교인은 남의 집에 세를 들어 살고 있었기 때문에 목사님의 말에 소망을 갖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주일이면 꼬박 빠지지 않고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만 1년 만에 세례를 받고, 3년이 되던 신년 초에는 서리집사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그 해 가을, 그 집사는 전세방을 면하고 자기 집을 구입한 후, 목사님을 초청하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그 집사는 목사님과 여러 교우들 앞에서 한 가지 고백할게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처음 제가 교회에 나왔을 때 예수만 잘 믿으면 집 사주신다고 해서 열심히 교회에 다녔는데, 목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제가 집사 직분도 받고 이렇게 집을 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면 영육 간에 복을 받습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 가운데 각 분야에서 세계적인 인물들이 나오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훈련을 잘 받고 신앙생활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바르지 않으면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어떤 훈련을 하시고, 또 그를 통하여 어떤 기적을 베푸셨는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날 갑자기 ‘그릿 시냇가’에 머물고 있던 엘리야에게 그곳을 떠나 ‘사르밧’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그릿 시냇가가 말랐기 때문”(7절)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물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릿 시냇가에 물이 마르자 그를 ‘사르밧’으로 가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할 뿐, 또 다른 이유가 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사르밧’이라는 단어를 연구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르밧’은 ‘훈련’이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더욱 더 크게 사용하시기 전, 그를 훈련하시기 위해 ‘사르밧’으로 보내셨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대표적인 기도의 사람을 손꼽으라 하면 우리는 서슴치 않고 ‘엘리야’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가 어느 정도로 기도의 능력이 있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가 갈멜산에서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싸울 때에 제단을 쌓고 기도하자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서 도랑의 물을 모두 핥아버렸습니다. 또한 그가 기도하자 3년 6개월간 비가 오지 않다가 다시 기도하자 오지 않던 비가 내렸습니다(약 5:7-8). 그러나 그가 이렇게 기도의 능력을 갖게 되기까지 어떤 훈련을 받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께 쓰임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훈련을 받지 않고서는 성공할 수 없고, 하나님께 온전히 쓰임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겉으로는 화려하게 보여도 그들 가운데 눈물의 빵을 먹는 훈련을 하지 않았던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제가 분당에서 경매로 교회 문을 닫은 후 계속되는 연단과정에서 매우 힘든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주님! 제 친구들, 특히 오정현목사나 장경동 목사는 세계적으로 쓰임을 받고 있는데 저는 이게 뭡니까?” 그때에 주님께서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크게 사용하기 위해 지금도 훈련 중이다.” 혹 여러분 가운데 큰 고통가운데 계신 분이 있습니까? 낙심하지 마십시오. 고통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지난 주에는 하나님께서 준비한 만큼만 사용하신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오늘은 어떤 훈련을 받아야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엘리야처럼 쓰임을 받으려면 어떤 훈련을 받아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자신을 죽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가라고 하신 사르밧은 이스라엘 지경에 있는 땅이 아니라 시돈 땅에 속해 있는 땅입니다. 시돈은 그 당시 이스라엘과 싸움을 하고 있는 적국이었고 바알신을 섬기는 우상의 본거지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만을 섬기는 엘리야에게 사르밧은 죽기보다 가기 싫은 곳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엘리야가 사르밧에 가는 것을 싫어하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왜 그곳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을까요? 그것은 엘리야에게 자신을 죽이는 훈련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훈련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훈련은 자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죽이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라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수난예고, 즉 자신이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것을 말씀하시고,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듯이 자신을 죽이지 않고서는 주님을 따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다운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날마다 자신을 죽여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주라고 고백하는 것은 예수께서 자신의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을 주로 섬긴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겠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믿는 자는 반드시 자신을 죽여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을 죽여야 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자신의 존재를 부정해 버리라는 것입니다. 즉 자신을 죽은 자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에 이미 죽은 자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우리 안에 두 생명, 즉 옛 생명과 새 생명이 공존합니다. 그러나 한 육체에 새 생명과 옛 생명이 공존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새 생명이 살려면 옛 생명은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새 생명을 살리려면 자신은 죽어야 하고 그리스도께서 사셔야 한다고 고백한 것입니다(갈 2:20). 그렇습니다. 내 생각, 내 경험, 내 자아, 내 정욕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실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 온전히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배추가 소금에 절여져야 김치를 담그는데 사용될 수 있듯이, 우리가 잘 죽어야 주께서 마음대로 사용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크게 사용하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그냥 사용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는 애굽에서 왕자로 40년간을 살았기 때문에 자기의 힘과 권력을 믿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부족했고 혈기가 많고 교만했습니다. 자기 동족이 매를 맞는 것을 보고 애굽을 돌로 쳐 죽일 정도로 그는 혈기가 왕성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상태에서 모세를 사용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를 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죽이는 훈련을 하신 후에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을 스스로 죽이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시기 위해 친히 찾아오셔서 우리를 죽이십니다. 어떻게 우리를 죽이십니까? 우리가 원치 않는 고난을 허락하셔서 낮추십니다. 예를 들어, 물질을 거두어 가시든지, 사업에 어려움을 당하게 하시든지, 직장을 잃게 하시든지, 건강에 적신호를 보내시든지 등등 우리를 낮추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일이 생기면 자신을 죽이라는 것인 줄 알고 스스로 자신을 죽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이 비밀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했던 것입니다(고전 15:31). 혹 자신이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 궁금하신 분들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자존심을 건드려보면 압니다. 누군가에게 부당하게 취급을 받거나 억울한 일을 당할 때에 혈기를 내고 길길이 뛰면 아직도 죽지 않았다는 증거이고,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죽은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마치 죄인처럼 채찍에 맞으시고 온갖 고난을 당하셨을 때에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협하시지 않았습니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이 잠잠히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전부터 삶 속에서 죽은 자로 살아가셨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죽이신 주님을 본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돈을 많이 가졌다고 우리를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외모가 탁월하거나 인격이 훌륭하다고 사용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좀 부족해도 자신을 죽일 때에 사용하십니다. 개인적으로 똑똑하고 능력이 있어도 자신을 죽이는 훈련에 성공하지 못하면 주님께서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따라서 주님께 온전히 쓰임 받기를 원한다면 자신을 죽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자임을 깨닫고 실제로 죽기로 결단합시다. “주여, 이제부터 죽겠습니다. 잘 죽을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둘째로, 주님만 계속해서 의지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릿시냇가에서 머물고 있던 엘리야를 시돈 땅으로 보냈는데 그곳의 누구에게 보내셨습니까? 사르밧 과부에게 보냈습니다. 요즘이야 돈 많은 과부가 많지만 그 당시 과부는 고아와 함께 사회에서 가장 가난하고 소외받는 계층의 대명사였습니다. 사르밧 과부가 얼마나 가난했던지 먹을 것이 없어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을 가지고 떡을 만들어 먹고 아들과 함께 죽으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하필이면 엘리야를 돈 많은 사람에게 보내시지 않고 극도로 가난한 과부에게 보내서 섬김을 받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엘리야로 하여금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데 이런 훈련은 이미 그릿시냇가에서 6-7개월이나 받았습니다. 엘리야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는 그릿시냇가에서 까마귀를 통하여 떡과 고기를 공급받으면서 오직 주님만 의지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왜 그를 또다시 사르밧 과부에게 보내서 주님만을 의지하는 훈련을 받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한 두 번의 훈련으로는 오직 주님만을 바라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있기 때문에 웬만큼 훈련해서는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얼마동안은 주님을 의지하는 것 같지만 얼마 되지 않아 사람을 의지하고 물질을 의지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가치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한 두 번의 노력으로는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복해야만 얻을 수 있습니다. 인생에 성공한 사람들은 분야에 상관없이 모두 끊임없이 반복훈련을 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반복하지 않고서는 정상에 오를 수 없습니다. 김연아가 피겨여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동작 하나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3천 번이나 반복적으로 훈련했기 때문입니다. 남자가 군에 입대하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오랫동안 받는 훈련이 있습니다. 그것이 제식훈련입니다. 군인들이 가장 따분하게 생각하는 것이 제식훈련입니다. 왜 따분하게 생각합니까? 동일한 행동을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제식훈련을 통해서 자연인이 군인이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계속해서 반복할 때에 몸에 배이게 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군인정신이 스며들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이 광야를 통과할 때에 하늘에서 40년간이나 만나를 내려주신 것은 만일 그렇게 하시지 않으면 온전히 주님만을 바라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응답을 받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번 5일간 특새를 했는데 그것은 5일 동안만 기도하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특새를 통하여 잠자는 기도를 깨우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도록 하기 위해서 한 것입니다. 따라서 5일간 기도해서 응답을 못 받았다고 포기하면 안 됩니다. 응답을 받을 때까지 계속 하나님께 매어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계적인 조각가 미켈란젤로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세계적인 조각가가 되었는지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가 세계적인 조각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스승 디 지오바니로부터 특별한 훈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디 지오바니는 미켈란젤로의 나이 열네 살 때에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디 지오바니는 어린 제자의 천재성을 인정하지 않고 아주 기초적인 것부터 수없이 반복하여 가르쳤습니다. 어느 날 미켈란젤로가 스승 몰래 작품 하나를 만들어놓고 스스로 자화자찬을 하고 있었습니다. “음, 이걸 스승께서 보시면 아마 놀라실 걸! 장난으로 만들어도 이 정도인데!” 그런데 스승이 나중에 그걸 보더니 칭찬은커녕 단 번에 조각품을 깨뜨려 버리면서 미켈란젤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켈란젤로! 잘 들어! 재능이란 값싼 것에 불과한 거야. 네가 지금 재능만 믿고 최선을 다해 배우지 않는다면 너의 재능을 뛰어넘는 작품을 결코 만들 수 없단다.”

      저는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가지고 성경을 연구하던 중 그 답을 사도행전 5장 42절 말씀을 통하여 얻었습니다.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초대교회가 매일 반복해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고 전도하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스테반이 나가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순교를 하였고, 빌립은 나가서 복음을 전할 때에 예수님처럼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쳐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반복해서 가르치고 배울 때에 우리의 삶이 바뀌는 것입니다. 따라서 반복을 포기하거나 귀찮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반복을 포기하는 순간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과 능력을 의지하는 순간 성령께서는 더 이상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계속해서 주님을 의지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제가 정말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안다고 생각하고, 또 조금 알고 있는 것을 다 아는 것으로 착각해서 반복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 영혼 깊숙이 심겨지지 않으면 절대로 삶의 변화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것은 말씀대로 살라고 주신 것이지, 단지 머리로만 알고 있으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지식은 실천을 위한 준비 단계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그래서 머리에만 머물고 있는 지식은 교만하게 할 뿐 백해무익합니다. 하나님을 머리로만 의지하지 말고 삶 속에서 의지해야 합니다. 주님을 의지하는 훈련을 계속하여 주님께 온전히 쓰임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다른 사람과 더불어 일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시돈 땅의 사르밧에서 일어난 기적은 엘리야 혼자만의 믿음과 순종으로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사르밧 과부와 함께 동역함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사르밧과부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였습니다. 더군다나 그녀는 곧 통에 있는 가루 한 움큼과 병에 있는 기름을 가지고 음식을 먹고 죽을 생각을 가지고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따라서 그토록 절망에 빠진 여인을 설득시켜서 믿음을 갖도록 해서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대로 순종하게 하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에 가장 어려운 점이 무엇입니까? 누군가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기도하고, 찬송하고, 말씀을 읽는 것입니까? 물론 이런 것도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정말 어려운 것은 믿음 없는 사람을 설득시켜 믿음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가 가장 어려운 것입니다. 전도는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불신자와 반드시 동역해야 합니다. 상대방에게 “예수 믿으세요. 행복합니다. 천국에 갑니다”라고 말 한마디 던진다고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차례 만나서 예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지를 잘 설득하고 권면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시하고 거역을 해도 온유한 마음으로 그들을 대하고 끝까지 설득해야 합니다. 제가 마포구 상수동에서 목회할 때에 홍익대 전자공학부에 다니는 강동우라는 청년을 만나 전도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 차례 만나서 설득하는 과정에서 홍대 주변에 있는 백암순대국밥집에 가서 식사도 대접했습니다. 그런데 주일에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한다고 해서 그것을 핑계 삼아 주일에 안 나올 것 같은 생각이 들어 토요일에 이삿짐을 날라주겠다고 하자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목요일에 미리 전화를 해서 이사 갈 준비가 잘 되어 가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토요일에 이사를 하지 않겠다며 오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마귀가 방해하여 그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음이 감지되었습니다. 그래서 또 강하게 설득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제가 토요일에 비정규직철폐 시위장에 함께 가면 대가로 주일 날 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목회자가 그런 집회에 참여하는 것은 제 목회철학에 맞지 않아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하자 교회에 오지 않겠다고 해서 결국 전도하지 못했습니다. 어디, 전도만 다른 사람과 같이 해야 하기에 힘이 듭니까? 가정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가 믿음의 수준이 같은 경우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경우는 매우 힘이 듭니다. 헌금을 해도, 봉사를 해도 눈치를 봐야 하고 보통 불편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상대방을 설득시켜 같이 믿음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정말 쉬운 게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불신 남편을 설득시키거나 아내를 설득시켜서 예수를 믿게 하고 그들을 집사와 권사와 장로로 세운 분들은 정말 존경받아야 할 분들입니다.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를 준비하거나 기도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혼자서 준비해서 전하거나 기도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정말 힘이 드는 것은 불순종하고 거역하는 자들을 설득시켜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을 갖게 하고 그들을 주의 일군이 되도록 훈련하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모세를 위대한 지도자라고 할까요? 모세와 이스라엘백성들은 같은 민족이었지만 서로 신분이 달랐고 자란 배경이 전혀 달랐습니다. 모세는 왕자로서 바로의 궁에서 자랐지만 이스라엘백성들은 애굽에서 400년 간이나 종살이를 했습니다. 그래서 모세와 이스라엘백성들과는 인생관과 가치관과 세계관이 전혀 달랐습니다. 모세는 주인의식이 있었고 이스라엘백성들은 노예 근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그런 자들을 잘 설득시켜서 결국은 그들을 가나안땅으로 인도하였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근본적으로 누군가와 함께 하지 않으면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듭나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교회 공동체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과 더불어 생활하는 것을 훈련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랑의 인내가 요구됩니다. 인내가 없이는 결코 신앙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인생에 한방은 없습니다! 훈련을 받은 만큼만 주님이 사용하십니다. 진짜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원한다면 자신을 훈련해야 합니다. 자신을 죽이고,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의지하고, 다른 사람과 함께 일하는 것을 훈련해야 합니다. 훈련을 받지 않고는 크게 쓰임받을 수 없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복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계속되는 훈련을 잘 받아 이 시대에 엘리야처럼 귀하게 쓰임을 받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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