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사람은 본받고 저런 사람은 본받지 마세요 딤후 4:9-18 2012.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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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람은 본받고 저런 사람은 본받지 마세요 딤후 4:9-18 2012.12.162018-12-03T20:05:28+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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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고민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믿으면 우리의 삶이 변화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이런 고민을 할까요? 생각만큼 우리가 잘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수십 년 예수님을 믿지만 주님을 닮아가지 않고 마귀의 자녀처럼 살 때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씀을 드립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변화될 수 있습니다. 아니 변화 되어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성경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기 때문에 우리는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디모데와 바울을 비롯하여 데마, 그레스게, 디도, 누가, 마가, 두기고, 알렉산더 등 9명이 등장합니다. 이들 중에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본받지 말아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먼저 본받지 말아야 할 사람들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데마와 같은 사람입니다. 바울은 데마를 소개하기를 ‘이 세상을 사랑하여 자신을 버린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데마가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 아십니까? 성경은 그를 마가, 아리스다고, 누가등과 함께 바울의 동역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몬 1:24).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데마는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왜 믿음을 저버리고 바울을 떠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본문은 그 이유를 한 마디로 ‘이 세상을 사랑했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데마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예수께서 친히 제자훈련을 시키신 가룟 유다까지 예수님을 배신하고 주님을 떠났습니다. 제가 금호동에서 교회를 섬기고 있을 때였습니다. 추운 겨울에 새롭게 입주하는 아파트 현장을 샅샅이 뒤지고 있을 때였습니다. 전도를 하던 중 사랑의교회를 다니던 집사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저에게 오정현 목사에게 직접 제자훈련을 받았다고 자랑을 했습니다. 그런데 충격적인 것은 지금은 교회에 다니지 않고 절에 다닌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순간 이것을 어떻게 정리해야할지를 몰랐습니다. 일반 교회라면 몰라도 제자훈련의 대명사인 사랑의교회에서 집사직분을 받고 제자훈련까지 받은 사람이 어떻게 주님을 떠나 타종교로 갈 수 있을까? 저는 전도를 마치고 교회의 사무실에 앉아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저에게 한 가지 깨닫게 하시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떤 자세로 주님을 따르느냐에 따라 주님을 끝까지 따를 수도 있고 중도에 주님을 떠날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주님을 믿습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병 고침을 받고 망한 사업이 잘되고 이 세상에서 성공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주님을 믿습니다. 즉 주님께서 자신의 뜻대로 소원을 이루어주실 것을 기대하고 따릅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으면 이런 결과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이유로 주님을 따르면 데마와 같이 될 확률이 높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마도 데마는 예수님을 믿으면 사람들에게 대접을 받고 물질적으로 부요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을 보니까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자 병든 자가 고침을 받고 사람들이 헌금도 하고 대접하는 것을 종종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바울과 함께 다니면서 보니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현상에 불과하고 실제적으로는 너무 어려움을 많이 당하고 있었습니다. 때로는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맞기도 하고 먹을 것이 없어서 굶기도 하는 등 바울의 삶은 고달프기 그지 없었습니다. 데마가 기대했던 세상적인 번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바울을 따라 다녀봤자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하고 미련 없이 바울의 곁을 떠났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예수께서 가신 길을 좇아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어떻게 사셨습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위해 자신의 생각을 버리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대신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라는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이름을 내세우고 자기의 영광을 위해 주님을 따르는 것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처럼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자세로 주님을 따르지 않으면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데마처럼 주님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고 떠났는지 아십니까? 그는 12제자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는 재정을 담당할 정도로 공동체에서 인정을 받았고 능력도 갖춘 자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생각한 대로 예수님이 정치적인 메시아로 움직이시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다고 하자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아버렸던 것입니다. 우리는 데마처럼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주님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다음은,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와 같은 사람입니다.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에는 알렉산더라(사람들의 통치자)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신약 성경에만 알렉산더라는 이름이 5회나 등장합니다. 왜 알렉산더라는 이름을 이렇게 흔한 것일까요? 그것은 당시 알렉산더가 마케도냐의 영웅이었기 때문에 부모들은 자기의 자녀들이 그런 통치자가 되기를 소망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알렉산더의 부모도 자신의 아들이 위대한 정치가 되기를 기대하고 그렇게 이름을 지어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통치자가 되지 않고 구리로 만든 제물을 만들어 파는 구리 세공업자가 되었습니다. 당시 구리로 만든 물건은 거의 다 숭배의 대상인 우상들이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에베소교회의 성도가 되어 있었습니다(딤전 1:3).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종인 바울에게 많은 해를 입혔고 그를 크게 대적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믿는데 예수님의 신실한 종인 바울에게 많은 해를 입히고 그를 크게 대적했을까요? 그것은 알렉산더가 무엇으로 먹고 살았는지를 생각하면 알 수 있습니다. 저명한 세계적인 신학자 ‘예레미아스’는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구리 세공업자는 보통 사람들의 수준을 벗어난 부류에 속하였다고 합니다. 즉 알렉산더는 돈 꽤나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상 숭배입니다. 따라서 알렉산더는 예수님을 영접했기 때문에 우상숭배에 사용되는 물건을 만드는 일을 접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럴만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그 일을 쉽게 포기하지 못하고 여전히 그 일로 돈벌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설교시마다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고 가르치자 그를 대적하고 바울의 복음사역에 크게 해를 끼쳤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알렉산더가 바울의 복음사역에 해를 끼친 것은 바울이 자기 마음에 드는 설교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도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와 같은 모습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설교자가 자기 마음에 맞는 설교를 해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 성도들이 가장 듣기 좋아하는 설교는 축복에 대한 설교이고 가장 싫어하는 설교는 전도와 헌금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설교를 왜 들어야 합니까?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 생각과 뜻대로 살면 반드시 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대로 하면 만사가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6-7)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자신의 생각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설교를 자주 듣지만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지 않고 자기의 생각에 맞는 설교만 들으려고 하기 때문에 삶의 변화가 없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구미에 맞지 않는 설교를 했다고 바울을 공격한 구리세공업자 알렉산더와 같은 자가 되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은 우리가 본받아 할 사람들입니다.

      먼저, 누가와 같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누가의 직업은 의사였습니다. 그가 언제부터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건강이 좋지 않았던 바울을 따라다니며 주치의 역할을 했습니다. 2차 전도여행에도, 3차 전도여행에도, 가이사랴와 로마의 옥살이에도 바울 곁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의술로써 도움을 주었을 뿐 아니라 심적으로도 큰 위로와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순교 후에도 계속 복음을 전하다가 자신도 순교했습니다.

      누가는 의사였기 때문에 얼마든지 육신적으로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길을 포기하고 주님을 위하여 고난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신앙은 선택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 1:29)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우리는 주님을 위해 고난 받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제 여동생이 GNP라는 선교단체에 소속되어 대만에서 선교사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소속 선교단체(GMP)에 선교사들의 부모님을 돌보는 사역(MP)을 하고 있는 윤명곤 선교사가 있습니다. 제 동생으로부터 어느 날 그분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너무나 감동을 받아 그분과 직접 통화를 하고 제가 집필한 ‘YES’라는 책에 그분의 사역을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그분은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개인적으로 주님을 만난 경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머리로는 구원 받는 방법을 알고 있었지만 마음으로는 믿어지지 않아 이미 작고하신 CCC총재였던 김준곤목사님께 개인적으로 편지를 보내기도 했지만 별로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병원사업은 탄탄대로를 걷게 되어 개인병원을 개원하게 되었고 평생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정도의 재산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재산이 많아지자 자신도 모르게 교만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가만 두시지 않고 무섭게 징계를 하셨습니다. 그는 징계를 통하여 회개하고 죽기 살기로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던 중 주님을 가슴으로 만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남서울은혜교회에 참석하여 신앙훈련을 받으면서 홍정길 목사님의 영향을 받아 장차 선교사가 되기로 서원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물은 자신의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며, 자신은 청지기에 불과하고 자신이 죽을 때 한 푼도 가지고 갈 수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마침 밀알선교회에서 장애인을 위해 재단법인을 설립해야 하는데 10억의 현금이나 그에 상응하는 부동산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서는 즉시 대전에 있는 땅을 팔아서 밀알복지재단에 헌납을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평신도 의료선교사로 나가기 전에는 신축한 4층의 병원 건물을 모두 하나님께 드려 서울 문정동에 장애인들이 살 수 있는 거처를 마련해주었습니다. 당시 시가로 300억이나 되는 재산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윤명곤 선교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혹 우리 교회에도 이런 사람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저도 우리 성도들 중에 이런 분이 나와서 꿈꾸는 노인복지신앙생활공동체가 운영되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되겠다고 결단해야 합니다. 내가 헌신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육신적으로 편안한 길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희생의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누가처럼 희생과 헌신을 삶을 본받아야 합니다.

      다음은, 마가와 같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오순절에 120명이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다가 성령의 충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락방의 주인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가 바로 마가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전, 제자들과 함께 큰 다락방에서 유월절 만찬을 하셨는데 그 다락방의 주인, 역시 마가입니다. 마가는 바울의 동역자인 바나바의 조카였기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가 제1차 전도 여행을 할 때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마가요한이 선교현장에 가보니 불편한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고 힘들고 어려운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밤빌리아 버가라는 곳에서 중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제2차 전도여행을 계획하고 있을 때에 바나바는 마가요한도 데리고 가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1차 전도여행 도중에 집으로 돌아간 자를 어떻게 데리고 가냐며 그와 다투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갔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 지방으로 떠났습니다. 그래서 마가요한과 바울은 서로 불편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디모데에게 “마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 그를 데려오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마가는 바울의 초청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바울에게 돌아와 그와 함께 복음 전도를 하다가 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순교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한 번 다투면 웬만해서는 화해를 하지 않습니다. 평생 원수같이 지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어도 술을 마시든지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화해하는데, 진작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할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교회에서 주의 일을 하다보면 바울과 바나바처럼 의견이 서로 맞지 않아 다투고 헤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마가처럼 나중에는 화해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다툰 사람과 화해할 수 있을까요? 바울과 마가 요한이 화해를 하기 까지의 과정을 추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바울은 일 중심의 사람입니다. 일 중심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실수에 대해 관대하지 못한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5:12)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사람의 실수에 대해 관대하지 못한 것은 주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바울도 그 일로 마음이 편치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도 그 일에 대해 책망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마가 요한에게 화해의 악수를 청했던 것입니다. 반면에 마가 요한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가 어떤 이유로 밤빌리아 버가에서 되돌아갔는지 알 수 없지만 선교여행 도중에 집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그가 맡은 일에 책임감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불찰로 삼촌과 바울이 서로 다투고 갈라지게 된 것에 대해 일종의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 그 일에 대해 주님께 회개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바울이 화해의 손을 내밀자 그의 복음사역에 동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불편한 관계에 있다면 그 원인이 자신에게도 있지 아니한지 곰곰이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 성찰이 없이는 불편한 관계에 있는 사람과 영원히 화해할 수 없습니다. 2012년이 지나가기 전, 그동안 서로 생각이 맞지 않아 불편한 관계에 있던 사람들과 앙금을 풀고 화해하는 복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나쁘면 하나님께서 막힌 문을 열어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화해의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세상일 때문에 주님을 등진 데마와 같은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자신이 듣기 싫은 설교를 했다고 사도 바울을 대적한 구리세공업자 알렉산더와 같은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동안 데마와  알렉산더처럼 살았다면 금년이 다 지나가기 전에 회개해야 합니다. 아울러 주님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주님을 섬겼던 누가를 본받고 그의 희생정신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또한 서로 다투었을지라도 종국에는 화해하고 주의 일에 동역한 마가 요한을 본받아야 합니다. 본받아야 할 사람을 본받고 본받지 말아야 할 사람은 본받지 않음으로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고 예비하신 복을 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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