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성찬식입니다. 고전 11장 23-29절 2012.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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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성찬식입니다. 고전 11장 23-29절 2012.11.252018-12-03T20:04:17+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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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먼저 말씀을 전한 후 성찬식을 거행할 예정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시던 날 저녁,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지키셨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유월절은 430년간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로 애굽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을 애굽에서 특이한 방법으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이스라엘 각 가정마다 어린양 한 마리를 잡아 그 피를 자신들의 집 좌우설주와 문인방에 바르게 하시고 애굽의 모든 가정의 장자(長子)와 짐승의 첫 새끼를 다 죽이도록 하실 때에 죽음의 사자로 하여금 좌우설주와 문인방에 피를 바른 집을 그냥 넘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애굽 사람들의 장자와 짐승의 첫 새끼들은 다 죽임을 당할 때에 좌우설주와 문인방에 피를 바른 이스라엘 집의 장자와 짐승의 첫 새끼들은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그때부터 해마다 자신들이 구원 받은 날이 되면 유월절을 지키고, 그 다음 날부터 1주일 동안은 누룩을 넣지 않고 만든 빵인 무교병을 포도주와 함께 마시면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에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유월절 저녁식사를 하실 때에 떡을 가지시고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나눠주시면서 ‘받아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잔을 가지시고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예수께서 성찬의 떡을 떼어 주시며 떡을 자신의 몸이라고 하시고, 잔을 나누시며 그 잔을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유월절 떡을 주시면서 ‘내 몸이니 받아먹으라’라고 말씀하신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왜 예수께서 떡을 떼어주시면서 그 떡을 자신의 몸이라고 하셨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라는 성경해석의 원칙에 따라야 합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을 떡으로 표현한 곳에 있습니다. 그곳이 어디일까요? 요한복음 6장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는 예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놀라운 기적을 행하신 오병이어의 기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5천 명을 배불리 먹게 하신 기적을 일으키시자 그것을 직접 현장에서 체험했던 많은 사람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께서 모세가 예언한 종말에 오실 ‘그 선지자’가 아닌가라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억지로 자신들의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을 피하여 산으로 가셨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많은 사람들이 다시 또 그 떡을 얻어먹기 위하여 예수님께 찾아오자 예수께서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그러나 사람들은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또 다르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요 6:51).그러자 유대인들은 서로 다투며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고 했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인육(人肉)을 먹어야 죽지 않고 영생하게 된다는 말인데 그게 말이 됩니까? 또 혹 살을 먹는다 하더라도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이 먹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께서 자신의 살을 먹으면 영생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비유적 표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내 살을 먹으라”는 말씀은 음식을 몸 안으로 집어넣듯이, 예수님을 마음에 모셔 들이라는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예수님을 믿으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유월절의 떡을 자신의 몸이라고 하시고 그것을 떼어 주시며 그 살을 먹는 자가 영원히 산다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찬식에 참여하여 떡을 먹는 것은 단순히 떡을 먹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주님을 마음에 모셔들이는 것임을 알아야합니다.

      다음은, 예수께서 유월절 잔을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라고 말씀하신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눠주신 후, 잔을 가지시고 사례하신 다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7-28).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흘리시는 피를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신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언약의 피’는 고대 근동에서 언약을 체결할 때에는 피를 흘린데서 비롯된 말입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힘이 센 군주 왕과 힘이 약한 봉신 왕이 언약을 체결할 때에 서로가 지켜야 할 언약문서를 다 기록한 다음에 소나 양을 잡아 두 쪽으로 갈라놓고 피가 흐르는 것을 보면서 그 사이를 지나갔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만일 언약을 파기하면 이 짐승처럼 피를 흘리고 죽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체결하실 때에 이와 같은 방식을 취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4장 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 강림하여 율법을 주실 때에 짐승을 잡아 피를 흘리게 한 후에 언약을 체결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율법)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 24:8; 히 9:19-20).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언약의 피’라고 하시지 않고 ‘새 언약의 피’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왜 바울이 그렇게 해석했을까요? 옛 언약에서는 짐승의 피로 언약을 맺었지만 예수께서는 친히 자신이 피를 흘림으로 언약을 맺으셨기 때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대신 피를 흘려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9장 22절은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짐승의 피는 한계가 있습니다. 죄를 지을 때마다 짐승이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짐승의 피는 우리의 죄를 영원히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죄 없으신 예수께서 단 번에 영원한 속죄제사를 드림으로 우리의 죄를 영원히 해결해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찬에 참여하여 잔을 마실 때에 예수께서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피 흘리셨음을 깨닫고 그분의 은혜에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성찬에 참여하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 24, 25절은 각각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기념하라’의 원어는 ‘아남네신’ 인데, ‘기억하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쓴 나물을 먹고 누룩을 넣지 않은 무교병을 만들어 먹도록 하신 이유는 조상들이 애굽에서 고통을 받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인도해 내신 것을 기억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성찬을 행하여 예수님을 기념하라고 하신 것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아무리 많이 기억해도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인이 죄 사함을 받는 은혜보다 더 큰 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노르웨이(Norway)에 ‘양의 교회’라는 아주 유명한 교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의 종탑 밑에는 어린 양의 형상을 그린 그림이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의 종탑 밑에 어린 양을 그려 놓은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교회를 건축할 때였습니다. 종탑을 만들기 위해 인부가 높은 곳에 올라가 일을 하다가 그만 실수를 하여 밑으로 떨어졌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죽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죽지 않고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그 인부가 추락하는 찰나에 마침 한 무리의 양떼가 교회 밑으로 지나가고 있었는데 그 인부가 바로 그 위로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인부가 살아난 그 자리에는 양 한 마리가 죽어 있었습니다. 양이 죽고 인부가 살아난 것입니다. 이에 교회는 사람의 목숨을 대신하여 죽은 양을 기념하기 위해 교회 이름을 ‘양의 교회’라고 개명을 했고, 종탑 밑에 양 한 마리를 그려 넣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망각적인 동물입니다. 특별히 자신이 받은 은혜를 쉽게 잊어버리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도 잊고, 부모님께 받은 은혜도 잊고, 다른 사람에게 받은 은혜도 쉽게 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용서는 모래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라”는 말이 있고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라”는 말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잊을지라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주신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것을 잊지 않고 기억할 때 주님께서 베푸시는 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인생의 무거운 짐이 벗겨지고 염려와 근심이 떠나간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에게 죄보다 더 크고 중대하고 시급한 문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의 가장 크고 시급하고 중대한 짐이 벗겨졌는데 그 어떤 것이 우리를 짓누를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세상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지만 감사가 없고 불평과 원망가운데 살아가는 것은 당면한 문제가 크고 많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께서 자신을 사랑하셔서 대신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신 구원의 은혜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찬식을 통하여 잃어버렸던 그 은혜를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예수께서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을 ‘전해야’ 합니다. 본문 26절입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전하는 것이니라’의 원어는 ‘카당겔레데’로서 ‘선포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선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주의 죽으심’을 선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죄 때문에 죽어야 하는데 예수께서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주셨다는 사실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것을 선포해야 합니까?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비신자들이 복음을 들을 수 없고, 복음을 듣지 않으면 믿을 수 없고, 믿지 않으면 구원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금번 성탄절에 비신자를 초청하여 함께 예배를 드리려고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죄 사함을 받을 수 없고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수없이 많이 성찬에 참여를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몇 번이나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피 흘리셨다고 선포를 하셨습니까?

    우리는 이번 성찬을 통하여 예수께서 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는지를 선포하는 삶을 살 것을 결단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비신자들에게만 선포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사람에게도 선포해야 합니다. 지금 바로 옆에 계신 분에게 선포하시겠습니다. “예수께서 당신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셨습니다.’

      셋째로, 성찬의 정신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본문 28-29절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변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여기 ‘살피고’라는 원어 ‘도끼마제도’는 ‘검사하다, 시험하다’라는 뜻입니다. 즉 우리가 성찬에 그냥 참여하지 말고 먼저 자신을 검사하고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으로 자신을 검사해야 할까요? 영혼의 거울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의 현미경으로 자신을 살펴보면 얼마나 부족하고 미련하고 죄를 범하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특별히 우리는자신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만이 진실한 크리스챤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지 않는 사람은 명목상의 크리스찬에 불과합니다. ‘쿼바디스’라는 영화를 보면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핍박을 피해 예루살렘을 빠져 나옵니다. 그 길목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주님과 마주 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향해 ‘쿼바디스 도미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하자, 그때 주님께서 “네가 십자가를 지기 싫어 예루살렘을 빠져 나오기 때문에 나는 다시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는 길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지 않을 때에 주님은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현대 크리스천은 너나나나 할 것 없이 부담 없이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어려운 일은 못 본체하고 신앙생활을 익명으로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마음은 주님께서 주시는 마음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을 감당하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의 아픔과 고난에 동참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특별히 부담감을 갖고 주님을 섬겨야합니다. 헌금을 드려도 부담을 갖고 힘을 다해 드리고, 봉사를 해도 부담을 가지고 힘을 다해 봉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쓸 것 다 쓰고 남는 돈을 헌금하고, 우리의 일에 시간을 다 쓰고, 남는 시간으로 봉사한다면 주님께서 기쁘게 받으시지 않습니다. 지난 금요일성령집회 시간이었습니다. 낯 설은 젊은 분이 눈에 띄였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그분과 이야기를 하려고 기도회를 마친 후 1층 로비에서 기다렸습니다. 어떻게 교회에 오셨느냐고 묻자 ‘오승우전도사’님 때문에 왔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오전도사님이 가끔 알바를 하는 회사의 대표였습니다. 그분을 제방으로 초대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분이 우리 교회의 예배에 참석하게 된 구체적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오승우 전도사님이 궂은 일에 앞장 서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찬을 통하여 이런 자세로 주님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성찬식은 단지 절기 행사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살 찢기시고 피 흘리신 것을 기억하며 복음을 전하기로 결단하고, 자신의 신앙을 살핌으로 새롭게 거듭나는 시간입니다. 오늘 성찬에 참여함으로 주님을 새롭게 만나는 은혜와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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