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상황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출15:22-27 20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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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상황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출15:22-27 2015.3.12018-12-03T22:42:09+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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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22-272015. 3.1()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10가지 재앙을 통하여 400년간 종살이를 하다가 애굽에서 해방되었고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는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들이 홍해를 건넌 후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사흘 길을 걸었지만 물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또 그곳에서 마라로 갔는데 물을 발견했지만 써서 마실 수 없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군인들이 특별 훈련을 할 때 완전 무장을 해서 하루 12시간 40-50km를 행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흘 간 걸은 거리가 약 54km니까 1/3의 수준으로 하루에 17km를 행군한 셈입니다. 그런데 젊은이라면 몰라도 부녀자들과 아이들을 데리고 하루에 17Km를 걷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추위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상태에서 광야를 걷는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이 악조건에서 물을 발견할 수 있다는 한 가지 소망을 가지고 걸었습니다. 그런데 사흘이나 걸었지만 마실 물을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처음으로 마라에서 물을 발견할 때에는 기쁨과 희망이 넘쳤으나 마실 수 없는 물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곧 절망의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더군다나 모세는 40년 간 광야에서 지냈기 때문에 광야의 구석구석을 잘 알고 있었던 전문가였습니다. 그의 지시를 따라 물 있는 곳을 정탐하러 나섰으나 어디에도 물을 발견하지 못하자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이 원망을 한 진짜 이유가 다른데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겉으로는 사흘 길이나 걸어도 물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원망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것이 진짜 이유가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이유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오직 마실 물을 찾는 데만 급급했지 어떤 상황에서도 물을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바라보았다면 결코 원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시고 홍해를 가르실 정도로 기적을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바라보았다면 광야에서 물을 내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을 것이고 원망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얼마든지 물이 없는 상황이라도 마실 물을 마시게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도 종종 어려운 상황을 만나 원망과 불평을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한 실수를 똑같이 하기 때문입니다. 상황만 보고 그 상황을 마음대로 바꾸실 수 있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하찮은 일을 가지고 쉽게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은 우리의 시선을 하늘에 두지 않고 땅에 두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조금만 어려우면 즉각적으로 반응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것보다 하늘의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면 이 세상에서 어떤 일어나도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면 상황만 바라보고 반응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땅에 속한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만 바라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천국백성이기 때문에 상황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인간을 헬라어로 ‘안드로포스’라고 하는데 이 말은 하늘에 뿌리를 박고 사는 존재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모든 생물을 땅에 뿌리를 박습니다. 그러나 인간만은 하늘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그리스도인은 위로부터 거듭난 자이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로 원망과 불평이 가득차 있습니까? 그렇다면 잠시만이라도 하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늘을 보면 자신이 얻은 구원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어 감사가 넘치게 됩니다. 사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엄청난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지옥에 던져져 영원히 고통 당해야 하는데 죄 사함 받아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거지였다가 로또에 당첨되어 하루아침에 수천억 원을 가져도 엄청난 일인데 우리가 얻은 구원은 그런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원을 사는 자라는 것을 알고 수시로 변하는 상황만 바라보면서 원망과 불평속에 살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절망적인 상황이 닥칠 때는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싸인으로 알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마실 물이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 누구의 인도로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2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 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움직이는 모세가 백성들을 인도했는데 마실 물이 없었을까요? 모세가 하나님의 음성을 잘못 듣고 인도했기 때문일까요? 얼마든지 그럴 가능성은 있습니다. 모세가 아무리 위대한 지도자라 할지라도 인간이기 때문에 잘못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모세가 잘못해서 이런 상황이 만들어졌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모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인도했는데 마실 물을 얻지 못했을까요? 26절을 읽으면 힌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이르시되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이 하나도 임하지 않게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순종할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 그들을 물을 마실 수 없는 상황으로 이끌어 가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얼마든지 하나님께서 좋은 상황에서 순종하라고 하실 수 있는데 왜 고통의 상황에서순종하라고 말씀하셨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은 배가 부르고 등이 따듯하면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잘 먹고 잘 살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잘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들은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그들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4:7)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돈이 많아질수록, 지위가 높아질수록, 형통할수록 하나님을 멀리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너무 잘 아시기 때문에 우리가 고난 당할 때에 말씀에 순종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고난의 때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고난의 때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말씀대로 살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시편기자가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고 고백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우리는 고난의 대명사로 욥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욥에게 친히 말씀하신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그가 동방에서 가장 부자로 살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하루아침에 열 자녀를 잃고, 모든 재산을 잃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악창이 나서 긁고, 위로하러 온 친구들로부터 조롱당하는 등 고통의 상황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인도를 받아 동신교회를 사임하고 상수동에 더처치를 개척했습니다. 지금은 소망이 넘치고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너무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런 과정을 통하여 엄청난 은혜를 받았습니다. 제가 받은 은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제 안에 주님을 닮아가고 싶은 마음이 뜨겁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 주님을 사랑했던 마음이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가신 길을 그대로 걷고 싶은 마음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주께서 가신 길은 한 마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육신의 생각과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삶 속에서 순교하는 것입니다. 제가 집필하는 책 중에 ‘백색순교’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쓰다가 더 이상 쓸 자신이 없어서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육신의 생각과 죄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이것을 아시고 이번 고난을 통하여 죄에서 자유하게 하셨고 육신의 생각을 날마다 죽이는 전환점이 되게 하셨습니다. 저에게 고난의 과정이 없었다면 ‘D3왕의사역’으로 세계복음화를 이루는 일이 불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고난은 저에게만 유익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따라서 고난이 오면 원망하지 말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절호의 찬스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할 때 모세는 어떻게 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아무 대응을 하지 않고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나 모세나 모두 동일한 하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혀 다른 행동을 하였을까요? 무엇이 그들이 나가는 방향을 정 반대로 향하게 했을까요? 그것은 ‘믿음’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고, 모세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어떤 상황을 만나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에 대한 기대가 커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기대와 소망이 넘치는 사람은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기대와 소망이 이뤄지도록 기도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문제 앞에서 기도하지 않고 원망하고 있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욥은 엄청난 시험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끝까지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지 아십니까 ? 그가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정도로 큰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마귀는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욥을 세 번이나 시험했습니다. 첫째로, 물질을 모두 잃게 했습니다. 스바 사람이 소를 빼앗아 갔고,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서 양을 살랐고, 갈대아 사람이 낙타를 빼앗아 갔습니다. 둘째로, 열 자녀가 죽는 시험을 당했습니다. 열 자녀가 함께 모여서 음식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데 거친 들에서 큰 바람이 불어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집이 자녀들 위에 덮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께 찬송을 돌리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마귀는 욥을 치면 하나님을 원망할 것이라며 그의 몸을 직접 칠 수 있도록 요청합니다. 그래서 세 번째로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는 시험을 당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아내는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 이 때에 욥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하면서 이 모든 일에 입술로 범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실 물이 없다고 원망했지만 모세가 처음부터 끝까지 원망하지 않고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큰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서 믿음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은 것이고 믿음을 가지면 모든 것을 가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믿음이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점검하고 잃은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모세가 기도하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25절을 읽겠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25). 성경은 모세가 기도하자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한 나무를 어떤 방법으로 가리키셨을까요? 모세가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곧바로 그에게 한 나무를 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아니면 그가 기도한 후 앞을 보니 생각지도 않은 나무가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지시한 나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저는 후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응답하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일반적으로 응답하시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께 기도하면 직접 응답하신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특별한 상황에서만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응답 받기 위해서는 기도만 하지 말고 기도한 대로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한 후에 떠오르는 지혜를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고, 기도한 후에 생각나는 사람을 찾아가기도 하고, 기도한 후 떠오른 성경말씀이나 설교말씀을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으로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결코 기도하는 것으로 그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쓴물을 단물이 되게 하시고 어떻게 하셨습니까? 25절-26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특별히 25절 후반절에 “그들을 시험하실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마라의 쓴 물을 단물로 바꿔주시면서 그들을 시험하셨습니다. 그들을 시험하신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애굽에서 겪었던 질병을 하나도 겪지 아니하도록 약속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여호와 라파’ 즉 ‘치료하시는 하나님’이 등장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느냐 안 하느냐 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이 시점에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을 말씀하셨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지금 그들이 시험 당한 시기가 언제인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시험을 당한 때는 애굽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즉 여행 초기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몸에 배지 않으면 광야 40년의 긴 여정을 버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해방시킨 것은 그들에게 좀 더 자유롭고 풍족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런 사실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애굽에서 해방되면 잘 먹고 잘 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애굽에서 나왔지만 마실 물조차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원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겨우 3일 길에 물이 없다고 원망하는 그들이 어떻게 40년 광야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지 안 하는지를 시험하고 계십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체가 항상 시험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험을 이기는 비법이 있습니다.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최고의 것을 주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순종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헌신하라는 명령에 순종하면 영원히 썩지 않을 몸을 주시고, 물질을 드리라는 명령에 순종하면 더 큰 재물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얻은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셨을 때에 아브라함이 즉시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아들보다 더 나은 아들을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얻은 아들은 항상 시험거리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아들이 없을 때는 하나님만을 사랑했는데 아들이 생기자 하나님보다 아들을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 문제로 아브라함이 고민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다음날 모리아 산으로 가서 이삭을 번제물로 바쳤습니다. 그제서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정하시고 이삭 대신 양을 죽이시고 이삭을 아브라함에게 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모리아산 번제 사건이후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말씀에 순종하는 것만이 우리가 가장 큰 복을 받는 길이고 생명의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 마지막 구절을 읽겠습니다. 출애굽기 15장 27절입니다.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샘 열둘과 종려 칠십 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이 마라라는 장소에서 엘림까지는 불과 11km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11km 정도는 아주 가까운 거리입니다. 그런데 멀지 않은 엘림에 무엇이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물샘 열둘과 70그루의 종려나무가 있었습니다. 사막에서 단 하나의 샘물도 소중한데 그 샘물이 무려 열두 개나 있었습니다. 또한 종려나무도 70그루나 있었습니다. 얼마나 풍성한 오아시스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에는 엘림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한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엘림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존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라를 통과하는 자들에게 엘림을 준비해 주십니다. 우리는 마라 건너편에 엘림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지금은 마라에 있을 지라도 곧 하나님께서 엘림으로 인도하실 것을 믿고 고통가운데서도 감사의 조건을 찾아 감사해야 합니다. 혹 기도의 응답이 더뎌서 마라에 주저앉아 계시지는 않습니까? 조금만 참으십시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곧 엘림에 도달할 것입니다. 청교도들이 그들의 믿음 때문에 오해를 당하고 핍박을 받고 소외당하는 고통의 삶을 살아가던 때에 만들어진 멘트가 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삶이 힘드십니까? 그렇다면 이렇게 자신에게 외쳐 보십시오.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어떤 문제를 만나도 원망하지 말고 모세처럼 주님께 기도하므로 기적적으로 문제를 해결 받고 주님께서 예비하신 엘림을 맞이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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