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함께 이런 교회 만들어요 느 11:1~2, 25-36 2014년 7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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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함께 이런 교회 만들어요 느 11:1~2, 25-36 2014년 7월 27일2018-12-03T21:52:34+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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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지난 주 느헤미야 10장을 통하여 우리가 어떻게 하면 변화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좇고, 하나님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주일성수를 하고, 비신자와 결혼을 하지 않고,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겠다는 등의 구체적인 삶의 결단을 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만으로 삶이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기 때문에 성령충만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한 주간 어떻게 사셨습니까? 변화의 삶을 도전해보셨습니까? 정말 행복한 인생의 주인공이 되려면 변화해야 합니다. 변화한 만큼만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솔개가 40살에 자기갱신을 통하여 70세까지 살 수 있듯이 지속적인 성공을 위해서는 반드시 변화해야 합니다. 개인과 교회와 나라도 지속적으로 변화하지 않으면 미래가 없습니다. 저는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우리가 어떤 교회를 만들어야하는지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영적지도자들이 본을 보이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보았듯이 이스라엘백성들이 말씀을 읽던 중 그들의 잘못을 깨닫고 안식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드리고,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살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그들이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당시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은 되었지만 사람들이 안전하고 편안하게 살만한 곳은 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성이 훼파된 지 오래되어 황폐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은 그런 곳에 살겠다고 자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어떤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111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백성들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였고 가장 먼저 예루살렘성에 살겠다고 한 자들은 백성들의 지도자였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도자가 먼저 희생의 본을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무슨 공동체든 지도자가 본을 보이지 않으면 건강하고 행복한 공동체는 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섬김을 가르치셨고 섬김의 삶을 실천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곧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가 되어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서 나아와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러자 예수께서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10:36)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곁에서 다른 제자들이 두 제자가 예수님께 요청하는 것을 듣고서는 버럭 화를 냈습니다. 예수께서 이 광경을 보시고 모든 제자들을 불러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10:42-45). 예수께서는 이렇게 사셨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십자가는 섬김의 극치입니다. 섬김의 완성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교회에서 이렇게 자신을 희생하고 섬김의 본을 보여야 할 영적지도자는 누구일까요? 교회에서 직분을 받은 자들입니다. 즉 목회자를 비롯하여 장로, 안수집사, 권사, 평신도사역자, 목자, 교사 등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분을 주신 것은 성도들을 섬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시 랍비라고 칭함을 받으셨지만 제자들 위에 군림하시지 않고 그들을 섬기셨습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직분을 받은 분들은 자신을 희생하고 섬기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좋은 신앙의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목회자를 비롯하여 장로, 권사 등 중직자들이 교회에 헌신적으로 봉사를 했습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을 위하여 목숨을 던졌습니다. 성도들은 자신들은 먹지 못하면서 주의 종을 섬겼고 논과 밭을 팔아 교회를 섬겼습니다. 이런 헌신이 있었기에 사람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의 부흥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도 이렇게 예배당을 가지고 좋은 환경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도 이런 헌신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사명감을 갖고 헌신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듯이 예루살렘성에 거한 사람들은 백성의 지도자만이 아니었습니다. 일반 백성들도 거주하였습니다. 그런데 일반 백성 중에서 예루살렘 성에 거주한 자들은 일반 백성들 중에 1/10일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백성들 중에서 1/10이 그곳에서 살 수 있었습니까? 제비뽑기를 통해서였습니다. 성경에는 제비뽑기를 한 예가 여러 곳에 등장합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에 땅을 분배할 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세워달라고 할 때에도, 가룟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선택할 때에도 제비를 뽑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제비뽑기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16:33). 무슨 말입니까? 제비로 뽑히는 사람은 하나님께 선택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제비뽑기를 통하여 예루살렘에 살기로 결정된 사람들은 그곳에 살도록 하나님께 선택을 받은 자들입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성에 거주한 1/10 백성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택함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사명감을 갖고 예루살렘성에 살았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 선택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지금 동신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은 것 같고 동신교회를 선택한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를 섬길 때에는 사명감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같은 일을 해도 어떤 마음을 가지느냐에 따라 자세가 달라집니다. 주님께서 특별히 선택해서 맡기신 일이라고 생각하면 신나고 즐겁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매주 교회에 나와 청소를 하고 주방에서 음식을 조리하거나 기타 여러 곳에서 봉사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주방은 조를 짜서 봉사하고 청소는 자원해서 하고 있습니다. 짜여 진 대로 봉사하든, 스스로 봉사하든 봉사한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봉사할 때는 불평도 나오고 시험에 들기도 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요즘처럼 더울 때는 주방봉사를 하거나 청소를 할 때에 짜증도 나고 화도 날 것입니다. 바로 이럴 때에 우리가 꼭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특별히 선택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그 일에 사명감을 갖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로 일하면 비록 힘들고 어렵지만 자랑스럽고 감사한 마음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바울이 복음 전도를 위하여 얼마나 수고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면서 수없이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는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태장을 세 번이나 맞았고, 돌로 한 번 맞았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고, 여행하면서 여러 번이나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했습니다.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르고 굶고 춥고 헐벗었습니다(고후 11:24-27). 그런데 어떻게 그가 이런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 그 길을 계속해서 걸을 수 있었는지 아십니까? 그가 고백한 말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0:24). 무엇 때문에 그토록 위험을 무릎 쓰고 전 세계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까? 복음 전하는 사명을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명은 생명보다 귀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자로서 주님의 몸된 교회에 헌신할 사명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명감을 가지고 헌신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장로, 권사, 안수집사 등 각종 직분을 주신 것은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더 잘 감당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셋째로, 서로를 축복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일반 백성들 가운데 예루살렘성에 거주자로 뽑힌 사람들은 십분의 일이었고 나머지 십분의 구는 예루살렘성 밖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에 사는 자로 선택을 받지 못한 자들이 시험에 들거나 기분이 상해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를 자원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1:2). 어떻게 예루살렘에 살도록 선택을 받지 못한 자들이 오히려 그곳에 사는 자들을 축복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신 이유가 그들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하기 위한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들이 복을 빌어주는 자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3:9).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다른 사람에게 복을 빌어주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나만 복을 받겠다는 욕심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런 마음은 주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야곱은 죽었다고 생각했던 그의 아들 요셉이 애굽의 총리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리로 내려가서 고센지역에서 그의 남은 노후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아버지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왕 앞에 섰을 때에 바로를 축복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47:7-10). 그가 남의 나라에 와서 빌어먹는 신세에 어떻게 당대 최대 강대국의 왕을 축복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자신을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아버지 이삭이 자신을 축복하는 것을 보고 들으면서 자신도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자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축복하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축복하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에게 복을 빌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그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시면서 그에게 약속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12:2-3). 이 말씀이 무슨 의미입니까?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복을 받고 저주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복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 시대의 아브라함이 누구입니까?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입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이 이 시대의 아브라함입니다. 따라서 복을 받으려면 서로를 축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옛말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우리 그리스도인과는 상관없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은 손해를 보더라도 다른 사람을 잘 되도록 복을 빌어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얼굴만 봐도 기분이 나쁜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도 복을 빌어줄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시면서 어떤 집에 들어가면 먼저 평안을 빌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 빈 평안이 상대방에게 합당하면 그가 빈 평안이 그 집에 임하지만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그들에게 돌아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10:12-13). 이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내가 축복을 하든 저주를 하든 그 말이 상대방에게 합당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되돌아온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꼴 보기 싫은 사람도 축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빌어야 할 최고의 복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말을 전하는 것입니다. 즉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1956년 미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이 영화로 제작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몇 해 전에 상영된 적이 있습니다. ‘창끝이라는 영화입니다. 남미 에콰도르의 아우카족은 그 당시까지 접촉해서 살아남은 백인이 한 사람도 없을 정도로 사나운 부족입니다. 그러나 명문 휘튼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짐 엘리엇을 비롯한 5명의 젊은 크리스천들이 아우카족 선교를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들은 에콰도르의 전진기지에서 경비행기를 타고 아우카족이 살고 있는 정글 속으로 들어가 바구니에 성경책과 선물을 담아 내려주었습니다. 시간이 지난 뒤 그들은 아우카족 마을에 근접한 강가 모래톱에 비행기를 착륙시키고 아우카족이 살고 있는 마을로 향해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 후로 소식이 끊겼습니다. 가족들은 이들의 무사 귀환을 위해 눈물로 기도했지만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엘리엇과 친구들은 모두 아우카족의 창에 찔려 살해되었습니다. 그러자 미국 전역이 들끓었습니다. 언론은 이 무슨 낭비인가’(What a waist!)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했습니다. 전도유망한 청년들이 너무나 허망한 죽음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내들이 남편들의 뒤를 따라 아우카족에게 들어가기로 결심하고 정글 생존훈련 및 아우카족과 친해지는 방법들을 터득한 뒤에 아우카족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정성껏 부족들을 섬겼습니다. 추장을 비롯한 모든 아우카족들이 이들의 헌신에 감동했습니다. 하루는 아우카족 추장이 부인들에게 물었습니다. “당신들은 무엇 때문에 우리를 위해 이토록 고생을 하십니까?” 그 때에 짐 엘리엇의 부인 엘리자벳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편들은 하나님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곳에 왔습니다. 그러나 당신들이 그들을 죽여 뜻을 이루지 못했지요. 우리는 남편들이 그렇게도 당신들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을 들려주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 말이 무엇이냐고요?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입니다.” 그 말에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짐 엘리엇 등을 창으로 찔렀던 5명의 아우카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아우카족 전체가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가운데 4명은 목사가 되었고, 한 명은 전도자가 됐습니다. 복을 빌어주자 그곳에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기적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를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축복하고 세상에 나가서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넷째로, 서로 소중히 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느헤미야 113절에서 9절까지는 예루살렘에 거주한 지도자들의 이름이 기록되어있고, 10절에서 14절까지는 레위자손의 이름이 기록되어있고, 19절에서 24절까지는 성문지기의 이름이 기록되어있고, 25절에서 36절까지는 성 밖에 살게 된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문지기와 성 밖의 사람들의 이름이 성 안에 거하는 지도자와 레위자손들의 이름과 함께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그들 모두가 이스라엘공동체에 소중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에 필요하지 않은 분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우리는 그 몸의 각 지체입니다. 각 지체는 서로를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지체의식을 갖는 것과 신앙성숙은 비례합니다. 어릴수록 자기만 압니다. 갓난아이를 보십시오. 배고프거나 이런저런 일로 몸이 불편하면 부모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울어댑니다. 갓난아이는 다른 사람을 전혀 배려하지 않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만 알고 자기중심적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영아입니다. 우리는 지체의식을 갖고 다른 사람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아픈 사람이 있으면 함께 아파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즐거워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이렇게 될 때에 건강하고 행복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 정글을 탐험한 학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한 가지 실험을 통하여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곳에 사는 수많은 종류의 짐승들을 한 종류씩 없애 보기로 하고, 먼저 새를 없애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새소리가 없는 정글은 마치 공동묘지처럼 적막한 숲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다음에는 원숭이들을 쫓아내 보았습니다. 그들은 원숭이를 이가지 저 가지를 옮겨 다니며 나뭇가지를 꺾고 숲을 망가뜨리는 등 해만 끼치는 동물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원숭이를 쫓아내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나무들이 서로서로 엉키고 덮이면서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징그러운 뱀들을 다 제거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천적이 없어진 쥐들이 그 숲에서 판치며 날뛰기 시작했고 쥐들로 인해 해충을 잡아먹던 벌레들이 모두 없어짐으로 숲이 병들어 죽어 갔습니다. 이 실험을 통해 학자들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은 모든 것이 공존 할 때에 건강하고 질서가 잡힌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지상에서 천국을 경험하는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존재가치가 있음을 알고 서로의 필요를 인정해야 건강하고 행복한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고전 12:21-22). 여러분은 모두 주님이 필요로 하시는 소중한 지체입니다. 어느 한 사람도 쓸모없고 사명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한 번 교통사고나 전쟁 등으로 몸에서 떨어진 손, , 눈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모습이 아름다울까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웠던 손일지도 따로 떨어져 있다면 사람을 놀라게 하고 무섭게 할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서로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이간을 하여 헐뜯고 비방하는 공동체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말에  이빨이 없으면 잇몸으로 먹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잇몸으로 음식을 먹으면 고통스럽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치아를 보존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미워하는 사람이 없어지면 좋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없으면 좋겠다고 하는 사람이 나갔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사람이 혼자만 나갑니까? 아닙니다. 무엇보다 가족이 함께 나가고 그를 따르는 자도 힘께 나갑니다. 그러면 교우도 줄어들고 재정도 줄어들고 교회는 큰 손실을 입게 됩니다. 우리는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교회중심적으로 생각하고 교우를 대해야 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교회는 유기적 생명공동체입니다. 생명은 건강하고 행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가 건강하고 행복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지도자들이 희생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각자가 사명감을 갖고 충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를 축복하고 소중히 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교회가 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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