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함께 은혜받은 자답게 살아가요 고전15:8-10 2013.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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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함께 은혜받은 자답게 살아가요 고전15:8-10 2013.5.262018-12-03T20:30:46+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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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영국에서 비교종교학자들이 모여서 여러 종교를 앞에 놓고 서로가 열띤 논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기독교가 다른 종교에 비해 다른 독특한 점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토론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성육신의 교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지만 다시 살아나셨다는 ‘부활의 교리’를 기독교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교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비슷한 교리가 타 종교에도 있기때문에 그런 것을 근거로 기독교의 독특성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기독교의 독특성에 대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 때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캠브리지대학교의 C.S. 루이스가 그 방에 들어왔습니다. 비교종교학자들이 기독교의 독특성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것을 보고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뭘 그런 문제를 가지고 난리를 피웁니까? 기독교의 독특성은 한 마디로 ‘은혜’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만이 가지는 유일한 독특성은 ‘은혜’입니다. 왜 그럴까요? 타종교는 모두 자기의 노력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지만 기독교는 오직 하나님의 힘과 능력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한 번 불교나 힌두교나 이슬람교나 유대교 등의 가르침을 살펴보십시오. 그들은 모두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직 기독교만이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즉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는데 우리의 행위는 0.0001%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하심이라”(엡 2:8-9)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우리 안에 선한 것이 있거나 뭔가 잘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단지 우리로 하여금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를 받으면 수없이 많은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저는 오늘 읽은 본문을 중심으로 우리가 은혜를 받으면 어떤 삶이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라는 말은 ‘팔삭둥이’라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10개월 만에 출생하는데 8개월 만에 났다는 것은 자신이 뭔가 부족하다는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과대평가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히려 자신을 부족한 사람이라고 고백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으면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면 아직 주님의 은혜를 온전히 받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자신이 부족한지를 깨달아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하거나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로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므로 어떤 일에도 우리의 지식과 능력을 전혀 필요로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말씀 한 마디로 이 세상을 창조하실 정도로 대단한 능력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지식과 능력을 눈꼽만치도 필요로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듯이 하나님께서 홍해를 어떻게 가르셨습니까? 모세의 손에 들려진 막대기로 가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시기 위해 필요한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지를 절감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붙잡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사람을 사용하는 기준과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기준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일정한 학력과 실력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한 마디로 스펙을 보고 선택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스펙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펙은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데 걸림돌이 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무능하며 자격이 없음을 깨닫고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와 함께 하시고 그를 통하여 일하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 젊은 나이가 아니라 힘이 없는 75세에 부르셨고, 애굽에서 400년간 종살이하던 이스라엘백성을 구원하는 일에 살인자가 되어 40년간 광야에서 양을 치던 모세를 선택하셨고,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일에 전쟁 경험이 전혀 없는 목동 소년 다윗을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지구를 만드셔서 어디에 두셨는지 아십니까? 성경은 “그는 북편 하늘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공간에 다시며”(욥 26:7)라는 말씀하고 있듯이 지구를 공간에 달아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공간에 다셨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지구를 아무 것도 없는 곳에 떠 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지구를 아무 것도 아닌 곳에 달아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구가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들이 살고 있는 곳입니다. 한 두 명도 아니고 70억이나 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행성 중에 가장 중요한 행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토록 소중한 지구를 허공에 달아 놓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을 통하여 크고 위대한 일을 행하십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베드로도, 아볼로도, 바울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크고 위대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자신을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고 생각하고 자신을 낮추는 자를 통하여 크고 위대한 일을 행하십니다. 우리 모두 주님께 은혜를 받은 자답게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주님만 의지함으로 주님께 크게 쓰임을 받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교회의 직분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기 때문에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9절)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교회의 직분중 하나입니다(고전 12:28). 그런데 그가 “사도라 칭함을 감당치 못할 자로다”라고 한 말이 무슨 뜻입니까? 자신이 주님께 사도라는 직분을 받은 것을 황송하게 생각하고 감격한다는 것입니다. 즉 사도의 직분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교회에서 받은 직분을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바울도 은혜를 받기 전에는 사도라는 직분을 우습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을 잡아죽이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은혜를 받아 구원을 받고 보니 사도라는 직분은 그가 감당치 못할 만큼 귀한 직분임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도 예수를 믿기 전에는 목사라는 직분을 우습게 생각했습니다. 심방을 다니는 목사님을 바라보면서 남자가 오죽 못났으면 여자들 몇 명 데리고 이집 저집을 찾아다니며 음식을 얻어 먹을까 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목사안수를 받고 난 후에도 목사라는 직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세상에 나가서 할 일이 너무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목사라는 직분이 너무 귀하다는 것을 깨닫고 이제는 목사밖에 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제대로 은혜를 받으면 교회의 직분을 이 세상의 그 어느 직분보다 더 귀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시편기자가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 84:10)라고 고백한 것처럼 교회에서 받은 직분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전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의 신앙에 대하여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는 대통령직보다 교회의 직분을 더 귀히 여겼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우리나라에 왔을 때에 박정희 대통령에게 복음을 전했고 미국에서는 주일이면 비행기를 타고 자신이 섬기는 교회에 가서 주일학교 교사의 일을 했습니다.

      우리는 은혜 받은 자답게 교회에서 맡은 일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 일이 교회 청소이든 주방봉사이든 차량운행이든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모든 일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교회 청소를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까? 이 교회가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차량 운행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까? 차를 타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주방봉사를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이 먹을 음식을 준비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청소하는 일이나 운전하는 일이나 주방에서 일하는 것은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하여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소중하고 가치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교회에서 받은 직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정말 감당치 못할 만큼 귀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무거운 짐짝으로 여기고 있습니까?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구원을 받은 자라면 자신이 교회에서 하는 일이 아무리 작은 일 일지라도 귀하게 여기고 감사해야 합니다.

     

      셋째로,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나의 나된 것은 주님의 은혜”(고전 15:10)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고백한 것은 나름대로 자신의 독특성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열 자녀가 한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와도 각각 다르듯이 우리가 다 같이 하나님의 자녀일지라도 각각 다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늘의 별처럼 많지만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다르게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는 각자 ‘나의 나됨’을 인정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엡 2:10)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만드신’이라는 말이 헬라어로 ‘포이에마’인데 여기서 파생된 단어가 Poem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시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시는 각각 달라야 합니다. 그래서 영어성경에서는 이 단어를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우리가 파고 살 수 있는 물건 중에는 상품과 작품이 있습니다. 상품은 속성상 비교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상품을 구입할 경우에는 서로 비교해 보고 난후 가장 싸고 좋은 품질을 구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작품은 속성상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헨델의 메시아가 낫느냐 베토벤의 운명이 더 낫느냐는 서로 비교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작품에는 작가 고유의 혼과 정신이 깃들여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분의 작품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과 서로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유명한 예술가의 작품도 서로 비교할 수 없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만드신 걸작품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습니까? 비교는 마귀가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비교의식을 심어주어 우월감과 열등감을 갖게 하고 서로를 이간시켜 다투게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마귀의 사주를 받아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므로 열등감에 빠져 낙심하기도 하고 우월감에 빠져 교만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열등감은 인간됨의 실존’이라는 말이 있듯이, 인간치고 열등감이 없는 자는 없습니다. 일류대학을 나오고 외모가 잘 났으면 열등감이 없을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열등감 속에서 사는 것은 서로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면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자녀와 다른 집의 자녀를 비교하지 마십시오. 비교해서 좀 못하다는 생각이 들면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집의 아내와 남편을 여러분의 아내와 남편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아내나 남편이 무능하다고 생각되면 결혼생활을 행복하게 할 수 없습니다. 개척교회와 큰 교회를 비교하지 마십시오. 우리교회보다 큰 교회가 더 좋다고 생각하면 만족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윗이 어떻게 골리앗의 싸움에서 승리를 할 수 있었는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스라엘백성들은 골리앗 앞에서 벌벌 떨고 있었을 때에 어린 소년 다윗이 골리앗에게 나아가 그와 싸워 이겼고 그의 목을 베었습니다. 어떻게 목동 다윗이 블레셋의 장군을 쓰러뜨릴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자신과 골리앗을 비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신장이나 무기를 골리앗의 그것과 비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독특성을 크게 인식하고 골리앗과 싸우러 나갈 때에 “네가 칼과 단창을 가지고 나오지만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간다”고 했습니다. 만일 다윗이 골리앗 앞에서 비교했다고 해보십시오. 그렇다면 그는 백전백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무기인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가지고 나갔기 때ㅔ문에 골리앗과 싸워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넷째로, 주님께 죽도록 충성해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지만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 자신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5:10). 이 말은 자신이 다른 사도들보다 더 열심히 일을 한 것은 자신이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는 주님께 충성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죽어야 마땅한 죄인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구원해 주시고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충성은 그 마음의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겉으로 아무리 충성하는 것같이 보여도 그 중심에 다른 동기가 있다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충성은 될 수 없습니다. 목회자나 다른 성도들에게 칭찬과 인정을 받기 위하여 열심히 봉사하는 것은 바른 충성이 아닙니다. 그런 이유로 충성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으면 불평하게 되고 봉사를 그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께 충성을 하기 위해서는 바른 자세를 가져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이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온전히 깨닫는 것입니다. 어떤 여자 분이 인물도 없고, 가진 것도 없고, 나이도 많아 혼기를 놓쳐서 결혼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아주 훌륭한 목사님이 청혼을 해서 아주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늘 사모는 남편 목사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목사를 위하여 최선을 다해 섬기고 있다고 간증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에 대한 관계에서 이 사모처럼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신랑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신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신부가 되기 전 어떻게 살았습니까? 더럽고 추악한 삶을 살았습니다. 소망도 없고 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먼저 찾아오셔서 우리를 사랑하셨고 자신의 신부로 맞아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주님께 죽도록 충성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사람에게 은혜를 받아도 그 사람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데 주님께 은혜를 받은 우리가 그분께 충성을 다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지 않습니까?

      옛날 한 성악가가 개 한 마리를 얻어다가 자식처럼 키웠습니다. 그 개는 주인이 성악연습을 할 때마다 옆에 쭈그리고 앉아 노래를 경청했습니다. 그 성악가가 나중에 레코드 취입으로 크게 성공했지만 그만 과로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그 개는 더 이상 주인 곁에 있을 수가 없어 거리를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거리를 방황하다가 한 레코드 가게 앞에서 주인의 노랫소리가 들려오자 그 자리에 멈추었습니다. 그리고는 가게 앞에 쪼그리고 앉아 주인이 나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죽은 주인이 나타날 리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 개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개도 자기를 사랑하는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는데 주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주시고 신부로 삼아주셨는데 그분께 충성을 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마다 충성하는 대상이 있습니다. 혹자는 자기 자신일 수 있고, 혹자는 부모일 수 있고, 혹자는 가족일 수 있고, 혹자는 연인일 수 있고, 혹자는 직장일 수 있고, 혹자는 자기 사업일 수 있고, 혹자는 국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 어떤 대상보다도 주님께 충성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충성의 대상은 우리를 배신할 수 있지만 우리 주님은 결코 배신하시지 않고 반드시 보상해주시기 때문입니다. 보상을 하시되 충성한 것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넘치게 갚아주십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구원 받은 것에서 은혜를 멈추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은혜 받은 자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자인지를 깨닫고 겸손한 마음을 갖고, 교회의 직분에 감격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삶을 살지 말고, 불러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주님께 죽도록 충성해야 합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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