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주의 긍휼이 필요합니다. 호11:8-9 2013.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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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주의 긍휼이 필요합니다. 호11:8-9 2013.8.112018-12-03T20:37:14+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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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에는 시중에 소비자의 기호에 맞는 우유들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검정깨 우유’, ‘검정콩 우유’, ‘호두 우유’, 심지어 ‘현미발아 우유’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어떤 우유를 마시든지 몸에 잘 받지를 않아 별로 우유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와 같이 우유가 몸에 잘 받지 않는 사람도 마실 수 있는 우유를 제가 개발했습니다. 이 우유는 체질과 상관이 없이, 남녀노소 누구나 다 마실 수 있고, 많이 마실수록 몸에 좋습니다. 그리고 돈을 내지 않아도 얼마든지 마실 수 있습니다. 그 우유가 뭔지 아십니까? ‘아이러브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전, 옆의 분에게 ‘아이 러브유’라고 인사하기기 바랍니다.

      오늘 설교제목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주의 긍휼이 필요합니다”입니다. 아멘이십니까? 우리는 주님의 긍휼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긍휼이라는 말을 들을 때에 가장 먼저 어떤 생각이 떠오릅니까? 저는 예수님이 생각이 납니다. 예수님은 긍휼의 원조이십니다. 예수님과 긍휼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긍휼을 빼면 남는 것은 ‘심판’만 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긍휼을 베푸시는 주님을 새롭게 만나게 되시기를 먼저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8절은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본문에서 ‘에브라임이여’라고 하다가 ‘이스라엘이여’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에브라임은 이스라엘을 다르게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이 분열되면서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나뉘었습니다. 그런데 북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지파가 므낫세 지파이고 그 다음이 에브라임 지파입니다. 하지만 므낫세 지파는 요단강 동쪽에 절반이 있어서 요단강 서쪽에서는 에브라임 지파가 가장 큰 지파로 북 이스라엘의 중앙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에브라임은 곧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에브라임이여, 이스라엘이여라고 부르시면서 그들에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더 이상 이스라엘에 진노를 내리시지 않고 버리시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속에 ‘불붙는 긍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멈추고, 불행이 행복으로 바뀌고, 화가 복으로 바뀌게 됩니다. 대표적인 두 가지 사례를 신구약에서 들어보겠습니다. 먼저 구약성경에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창세기 29:31~35절에는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한 레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야곱이 라헬을 사랑했지만 라반이 레아를 아내로 주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또 다시 7년간을 라반을 위해서 일해주기로 약속하고 라헬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이때부터 레아는 동생과 한 남편을 두고 무한 경쟁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레아는 첫째 부인임에도 불구하고 야곱과 잠자리를 같이 하려면 라헬의 허락을 받아야 했고 합환채같은 임신촉진제를 주어야 남편과 동침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결과가 빚어졌습니까? 야곱이 사랑한 라헬보다 레아가 더 자녀를 많이 낳았고. 메시아의 계보를 이어갈 유다를 생산했습니다. 또한 남편 야곱과 함께 열조의 무덤에 묻힌 여인은 라헬이 아니라 레아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께서 라헬보다 레아에게 더 큰 긍휼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레아를 긍휼히 여기시자 그녀의 운명이 바뀐 것입니다. 라헬이 남편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 하여 겉으로는 라헬이 더 행복한 것 같이 보였지만 진짜 복을 받는 자는 레아였습니다. 다음은 신약성경에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적이 어떤 상황에서 일어났습니까? 예수께서 세례요한이 목 베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셔서 빈들로 가셨습니다. 그러자 무리들이 예수께서 빈들에 계시다는 말을 듣고서는 여러 마을로부터 걸어서 그곳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을 품으시고 그들 가운데 있는 병자를 고쳐주셨고 저녁에 되었지만 빈들이라 빵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에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던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것은 먹을 것이 없이 방황하는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라헬보다 레아에게 긍휼을 베푸셨고 무리들에게 긍휼을 베푸셨냐는 것입니다. 레아가 라헬보다 남다른 행동이 있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무리들이 예수님을 기쁘시게 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무슨 이유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셨느냐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실 자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대로 긍휼을 베푸시지만 우리가 주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을까요?

     

      첫째로, 회개하고 주님께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재산 상속은 부모의 사망과 함께 이루어지지만 이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간섭을 받지 않기 위해 미리 유산을 받아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가서는 허랑방탕한 삶을 살다가 그 많던 돈을 다 허비하였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나라에 흉년까지 들자 먹을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돼지 치는 집에 머슴으로 들어가서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했지만, 그것마저도 없어서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그는 “아버지 집에는 먹을 양식이 많은데 왜 내가 여기서 이렇게 살지!”라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하지만 막상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염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살 길은 오직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길이라 생각하고 아버지께로 돌아갑니다. 그러자 아들이 돌아오기만 바라고 기다리는 아버지가 먼저 멀리서 돌아오는 아들을 발견하고서는 달려가 그를 안아줍니다. 그리고 그가 집에 온 것이 너무 기뻐서 종들을 시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어떻게 자신의 뜻을 거역하고 집을 나가 가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을 보고 아버지가 먼저 달려가서 안아줄 수 있었을까요? 성경은 그 이유를 집을 나간 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오자 그를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눅 15:20). 그렇습니다. 우리가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가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집을 나간 아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에 아버지가 이유를 묻지 않고 긍휼히 여겼듯이,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그 이유를 묻지 아니하시고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의 긍휼을 받기 위해 가장 시급하게 해야 할 것은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한 만큼 주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습니다. 정말 긍휼히 여기심을 받고 싶다면 회개할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서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회개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근원적으로 살펴보면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교만입니다. 모든 죄는 교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래서 교만은 죄중의 죄입니다. 교만이 무엇입니까? 자신을 높이 평가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위치를 모르고 자기 마음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죄인이기 때문에 죽어야 하고 심판을 받아 지옥에 던져져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 죄와 사망과 심판과 지옥에 법에서 건져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우리의 주인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종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다 주님의 뜻대로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입으로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뜻과 생각대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자신의 뜻과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뒤에서 불평하고 원망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탕자가 집에 다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어서 미리 유산을 챙겼는데 고통을 당하는 과정을 통하여 그것이 잘못이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자기 생각대로 모든 것을 움직이려고 하는 것이 큰 죄인 줄 알고 회개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스스로 무엇을 잘하기 때문에 긍휼을 베푸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못을 깨닫고 돌이키는 것을 기뻐하시고 긍휼을 베푸십니다. 제가 지난 주에 밤늦게 귀가하여 딸을 혼낸 일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가 회초리를 들고 마음에 편치 못해 잠을 잘 수 없었을 때에 어떻게 해서 침대에서 일어나 딸에게 찾아가서 안아주고 서로 울고 용서할 수 있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까? 딸이 정말 잘못을 회개한다는 카톡을 보는 순간 딸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주일 날에는 딸이 용돈을 달라고도 하지 않았는데 제가 먼저 불러서 돈을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잘못을 회개할 때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십니다. 회개와 긍휼히 여기심을 받는 것은 비례합니다. 많이 회개하시고 주님께 긍휼을 많이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주께서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런 소식을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듣고 그를 위하여 특별히 선교헌금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헌금을 바울에게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는 자동차나 비행기를 탄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기 때문에 많은 돈을 가지고 먼 길을 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거의 도보에 의존하던 시대라 언제 어디서 강도의 습격을 받을지 알 수 없으므로 헌금을 전달하는 자는 육체적으로 심적으로 큰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에바브로 디도가 헌금을 갖고 로마에 도착했을 때에 그는 병에 걸려 죽게 되는 위기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죽게 되는 상황에서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었습니까? 성경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저를 긍휼히 여기셨고 저 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빌 2:27).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목숨을 걸고 헌금을 전달하는 사명에 충실한 에바브로 디도를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에 그가 죽을 병에서 고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맡은 사명에 충실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주님의 일을 하다보면 죽을 병에 걸릴 수도 있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를 위하여 끝까지 충성하면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주십니다. 맡은 사명을 끝까지 잘 감당하므로 주의 긍휼을 입게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예수께서 산상수훈에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사람을 긍휼히 여기면 하나님께 긍휼히 여기심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두득두의 법칙에 따라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면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습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과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주시는 것은 서로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될 수 있는 대로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혹 여러분 중에 자신은 긍휼을 베풀 상대가 없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불쌍히 여겨야 할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죽은 다음 반드시 심판을 받아야 하고 지옥에 던져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잠시 동안 고통 당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고통은 다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정말 불쌍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기 때문에 지옥에 던져져 영원히 고통을 당하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신지를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장 불쌍한 자들임을 알고 그들을 찾아가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가난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외모로 보고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래서 외모나 학력이나 재력 면에서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보면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을 주님을 대하듯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들을 불쌍히 여길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38).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보다 훨씬 갚아주십니다. 우리가 작은 긍휼을 베풀면 하나님께서 큰 긍휼을 베풀어주십니다. 지금 북한이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죽는 자들이 있을 정도니 얼마나 어려운 상황입니까? 같은 동족이 아닐지라도 도와야 하는데 동족이니 더욱 더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동안 줄곧 우리에게 행했던 소행을 생각하면 그들을 도울 마음이 선뜻 생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6.25사변으로 우리가 얼마나 큰 피해를 입었습니까? 수백만 명이 죽거나 다쳤고, 수많은 전쟁고아가 발생했고, 또 산업시설이 파괴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재산과 집을 잃고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고, 약 500만 명의 이산가족이 발생했습니다. 아직도 전쟁이 끝난 상태라 총을 겨누고 있습니다. 몇 해 전,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폭격으로 우리 젊은이들이 많은 희생을 당했습니다. 핵무기로 우리를 지금도 협박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들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들을 긍휼히 여길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 2:13). 그렇습니다. 우리가 원수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에게 해를 끼친 자를 심판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형법은 누군가가 폭행을 가해도 그 사람에게 폭행하는 것을 금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긍휼을 베푸는 것입니다. 유명한 성 프란시스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그가 말을 타고 길을 가는데, 웬 거지가 추위에 떨며 구걸했습니다. 프란시스는 말에서 내려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거지가 너무 춥다고 대답하자, 그는 자기가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입혀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거지는 계속해서 떨면서 프란시스에게 옷을 입어도 추우니 나를 꼭 안아 주실 수 없느냐고 요구했습니다. 프란시스는 거지가 문둥병 환자인 줄 알고 있었지만 자신에게 병이 옮기는 것은 생각지도 않고 진심으로 그를 끌어안았습니다. 그러자 사랑으로 꼭 끌어안았던 거지가 갑자기 사라지는 기이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그 때에 하늘로부터 이런 음성이 들렸습니다. “네가 나를 이토록 사랑하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그 후로 그는 부잣집 아들로서의 상속을 다 포기하고 수도원으로 들어가 전도자가 되어 유명한 성인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자신에게 아픔을 주고 고통을 주는 자들을 심판하려고 하지 말고 긍휼을 베풀려고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께서 더 크신 긍휼을 베풀어주십니다.

     

      넷째로, 주님의 긍휼을 사모하며 간구해야 합니다. 성경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 14:14)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무엇이든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의 긍휼을 원한다면 주님께서 긍휼을 베풀어주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주님께 긍휼을 구해서 응답받은 사례가 많이 등장합니다. 마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실 때에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와 귀신 들린 딸 문제를 해결 받은 기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녀가 평생 해결 받지 못한 딸 문제를 어떻게 해결 받았습니까? 예수님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간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긍휼을 구하자 주님께서 긍휼을 베푸심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또 마태복음 20장에는 길에서 구걸하던 두 맹인이 예수님을 만나 두 눈을 뜨는 기적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두 눈을 뜨는 기적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까? 그들이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간청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18장에서 바리새인과 세리가 각각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정 반대였습니다. 의롭게 살고 있다고 자랑한 바리새인은 응답을 받지 못하고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한 세리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주님의 긍휼을 구하는 자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의 내용을 바꾸어야 합니다. 자신의 고통을 하소연하지 말고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저는 종종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저는 정말 부족합니다. 저는 무지합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그렇게 기도하면 주님께서 저와 함께 하심을 늘 경험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문제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까? 더욱 낮아져서 주님께 불쌍히 여겨달라고 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면 우리가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든지 해결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엡 2:3)였습니다. 우리가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는 말은 진노 외에는 기대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자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까?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이 하나님의 진노에서 우리를 건져내는 데서 멈추게 해서는 안 됩니다. 계속해서 우리의 삶에 임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구석구석마다 주의 긍휼이 넘치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잘못을 회개해야 합니다. 특별히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하는 교만을 회개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해야 합니다.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분들과 자신보다 가난하고 어려운 자들을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주의 긍휼을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교회와 직장과 사업장에 하나님의 ‘불붙는 긍휼’이 넘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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