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하면 실족하게 하지 않습니다. 눅17장 1-4절 2017.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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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하면 실족하게 하지 않습니다. 눅17장 1-4절 2017.8.202018-12-03T23:31:33+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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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서하면 실족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7장 1-4절 2017. 8.20

    여러분은 오늘 읽은 누가복음 17장 1-4절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사실 본문이 몇 구절이 안 되지만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1-2절에서는 ‘실족’에 대하여 말씀하다가, 갑자기 3-4절에서는 ‘용서’에 대해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본문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는 것일까요?
    다시 1-2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본문에서 ‘실족하게 한다’는 것은 헬라어로 ‘스칸달리조’인데, 죄의 올무에 걸려 신앙을 버린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실족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가 있다고 하시면서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맷돌을 사용해 본 사람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저는 농촌에서 자랐기 때문에 어렸을 때에 직접 맷돌로 콩이나 쌀을 간 적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맷돌은 지름이 약 40-60cm 정도인데, 본문에 등장하는 ‘연자맷돌’은 가정에서 사용하는 맷돌보다 훨씬 커서 지름이 120-150cm나 되고, 무게는 약 1톤이나 되었기 때문에 짐승이 돌렸습니다. 그런 것을 사람의 목에 맨 채로 바다에 던져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주 깊은 곳으로 가라앉게 되어 고기밥이 될 것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처형이 유대인 사회에서 시행되었다는 증거는 없지만 고대 시리아, 로마, 그리스, 마케도니아에서는 극악한 죄를 범한 자나 반역죄 또는 신성모독죄를 범한 자들을 이것으로 처형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우리가 읽어서 알고 있듯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실족하게 한 대상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입니다. 영어성경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one of these little ones’라고 번역하고 있듯이, 작은 자는 어린아이를 가리키고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는 어린아이 중의 하나를 가리킵니다. 당시 ‘어린아이’는 부모의 부속품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즉 아이의 인권은 완전히 무시되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 지극히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시키면 극악한 자나 반역죄 또는 신성모독죄를 범한 자들에게 내려졌던 것과 동일한 형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정말 지극히 작은 자 하나라도 실족시키면 이런 형벌을 받아야한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곳에 앉아 있을 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보다 더 큰 죄를 물마시듯이 짓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예수께서 이 말씀을 어떤 의미로 하셨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실족시켜도 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실족하게 하는 자에게 무서운 형벌이 주어질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실족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실족시켜도 되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실족하게 하는 자들도 하나님께서는 소중히 여기시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중심적으로 사고하기 때문에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신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미워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도 미워하신다고 생각하고 그를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찮게 생각하고 심지어 원수로 생각하는 자를 사랑하시고 소중히 여기십니다.
    얼마 전, 박찬주 육군대장 부부가 공관병들에게 갑질을 한 일로 한동안 언론의 뭇매를 맞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그 사건은 종결되지 않았습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박찬주 대장은 교회 장로이고 부인은 권사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마땅히 공관병들을 다른 장성들과는 다르게 공관병들을 잘 대해 주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왜 갑질을 했을까요? 사실 군에서 별 네 개를 단다는 것은 마치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입니다. 재직 중에 자신도 잘해야 하지만 부하직원이 사고를 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통수권자의 눈에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높여주셔야 합니다. 성경은 “무릇 높이는 일이 대저 동쪽에서나 서쪽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쪽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시 75:6-7)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높은 자리에 오르자 하나님께서 그들 자신만 사랑하시고 공관병들은 그들만큼 사랑하시지 않는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박찬주 대장 부부에게만 있는 것일까요? 우리도 돈이 많아지고 높은 지위에 오르면 하나님께서 자신만 사랑한다고 착각하여 그렇지 못한 자들을 무시하거나 하찮게 여기는 경향이 없지 않습니까? 이는 마치 유대인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민으로 삼으신 것을 인하여 그들만 사랑한다고 착각하여 이방인들을 우습게 여겼던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모든 사람을 대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시지만 육신으로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정도로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이런 자세로 모든 사람을 대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낮은 자들을 하찮게 여겨도 우리는 예수님처럼 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한 영혼도 멸망치 않고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타종교를 믿는 자도 사랑하시고 심지어 성소수자도 동성애자도 사랑하십니다. 따라서 그들을 우습게 여기지 말고 그들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하고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매어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하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즉 실족하게 하는 실체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어서 알 수 있듯이 본문에는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해석할 때에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문맥입니다. 따라서 좌우문맥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먼저 누가복음 실족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17장 1-2절을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와 연결시켜서 해석해야 할지, 아니면 뒤에 나오는 3-4절과 연결시켜서 해석해야 할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만일 실족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누가복음 17장 1-2절을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와 연결시켜서 해석한다면 상대방을 실족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인색함’입니다. 반면에 3-4절의 말씀과 연결시켜 해석한다면 실족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누가복음 17장 1-2절을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보다는 누가복음 17장 3-4절과 연결시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번역본에서 1-2절의 ‘실족하게 한다’는 동사를 ‘죄를 짓게 한다’라고 번역하고 있고(“죄 짓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죄짓게 하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 어린아이 하나라도 죄짓게 하면 차라리 자기 목에 연자 맷돌을 달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눅 17:1-2, 쉬운 성경), 3-4절이 죄를 범한 후 회개하면 용서하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실족하게 하는 것과 죄를 용서하는 것은 상관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께서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목에 매고 깊은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고 말씀을 하시면서 죄 용서에 대해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뱃지는 용서입니다. 용서하지 않고 있다면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실족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상대방의 죄를 용서할 수 있을까요? 3-4절은 그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본문을 다시 읽습니다. “만약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본문은 우리에게 용서하는 과정을 크게 두 가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먼저 죄지은 자를 책망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절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하여 어떤 형제가 죄를 범할 경우 가장 먼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경고입니다. 그런데 경고해야 할 대상이 누구입니까? 죄를 범한 ‘네 형제’입니다. 여기서 ‘네 형제’가 육신의 형제를 가리키는지, 영적인 형제를 가리키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형제’라는 단어는 가까운 사이를 가리키므로 가까운 사람이 죄를 지으면 먼저 경고부터 하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먼저 경고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가까운 사람이 죄를 범해도 경고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이 죄를 범하는 것을 보면 당연히 경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자신 이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각자의 신앙을 챙기기는 것도 버거워하는데 다른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가까이 있는 형제가 죄를 범하는 것을 알고도 그냥 내버려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는 계속해서 죄를 짓습니다. 그래서 형제가 죄를 범했는데도 경고하지 않으면 결국 형제를 실족하게 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회개하면 용서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형제가 잘못했다고 회개하는데 용서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아무리 잘못해도 회개하면 용서해주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잘못했다고 빌어도 용서하지 않는 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잘못했다고 빌어도 용서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상대방이 동일한 죄를 짓고 용서를 빌 경우 과거에 잘못한 것은 기억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동일한 잘못을 저지른 경우 과거에 한 것을 기억하고 “이번이 몇 번이냐”고 합니다.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용서하지 않은 것입니다. 잘못했다고 빌어도 용서해주지 않으면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주님께 용서받았다고 말하면서 왜 용서해주지 않지, 저 사람이 주님께 죄 사함 받은 것이 맞는 거야?” 그리고 말씀과 삶이 다른 것을 보고서 실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회개하면 용서해주라’는 말씀과 관련해서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로, 상대방이 회개한 경우만 용서해주라는 말씀이냐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상대방이 회개하지 않으면 용서해주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들립니다. 정말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은 회개를 강조한 것이 아니라 용서를 강조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용서를 받았습니까? 우리가 먼저 회개했기 때문에 주님께서 용서해주셨습니까? 아닙니다. 주님께서 먼저 용서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회개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 가장 먼저 제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제자들이 먼저 회개했기 때문에 그들을 용서하시고 찾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회개하기 전 먼저 용서하시고 그들을 찾아가신 것입니다. 스테반을 보십시오. 그가 복음을 전하던 중 돌에 맞아 죽을 때에 무리들이 회개했기 때문에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지만 먼저 그들을 용서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상대방이 회개했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용서해야 합니다.
    둘째로, 형제가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그 때마다 돌아와서 잘못했다고 하면 용서해주어야 한다’는 말씀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형제가 한두 번 죄를 짓고 잘못을 비는 경우는 용서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루에 일곱 번이나 잘못하고서 용서를 비는 경우는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주님께서도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용서하는 자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상대방이 우리에게 어떤 잘못을 했어도 용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말할 수 없이 큰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종종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얼마나 큰 죄를 주님께 용서받았습니까? 반드시 한번은 죽어야 하고 죽은 다음에는 심판받아 지옥에 던져져 영원히 고통을 당해야 할 정도로 큰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상대방이 어떤 잘못을 해도 용서해야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삶속에서 용서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마귀가 용서하지 못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상대방을 용서하기 위해 노력할 뿐 아니라 주님께 도움을 청해야 하는 것입니다. 혹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상처를 입힌 일로 원한을 품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혼자서 노력만 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단지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만 기도하지 말고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기도하시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정말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면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용서치 못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지극히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자신에게 상처를 준 자들을 용서하기로 결단하고 그렇게 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복음의 능력을 맛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복음에는 그 어떤 죄를 범한 자도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사람과 더불어 좋은 관계를 맺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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