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의 고난을 하나님의 섭리로 해부하다 창 39:1-23 2014.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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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고난을 하나님의 섭리로 해부하다 창 39:1-23 2014.11.92018-12-03T22:34:49+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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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지난주 ‘두려움은 상황의 문제가 아니다’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먼저, 야곱이 위기상황에서 하나님께서 벧엘로 올라가라고 말씀하실 때에 어떻게 즉시 순종할 수 있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에 그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창 28:13-15). 그렇습니다. 위기상황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하는 힘은 임마누엘의 확신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임마누엘의 확신이 없으면 위기상황을 맞이해서 하나님을 찾거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위기극복의 열쇠는 임마누엘의 확신에 달려있습니다. 따라서 위기상황에 처하면 가장 먼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서 제단을 쌓으라고 말씀하신 의미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크게 두 가지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갚으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시면 반드시 벧엘로 올라가서 제단을 쌓겠다고 서원했는데 그것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서원한 것을 잊고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억하시고 추적하시기 때문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갚아야 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의미는 하나님을 만난 첫 사랑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벧엘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난 장소입니다. 그런데 야곱에게 벧엘로 가라는 것은 주님을 만난 첫 사랑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것은 잃을지라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만은 잃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 사랑하는 마음을 잃는다는 것은 주님을 잃는 것이고 주님을 잃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 앞에 예배 드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과연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만 말씀하셨는데 그가 가족과 식솔들에게 이방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고 명령한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죄를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 나아가기 전에 회개해야 할까요? 회개 없이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나아가기 전 회개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용서받았고 의인이 되었습니다. 또 실제적으로 특별히 죄를 지은 것도 없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죄를 회개해야 한다는 말이 마음에 와 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 문제를 영원히 해결 받았어도 육신으로 살아가는 동안에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회개해야 합니다. 마음과 생각으로 범한 죄까지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는 항상 자신을 죄인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격적인 관계에서는 자신을 낮추는 자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무리 깨끗하게 살아도 죄인의 자세로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넷째로, 야곱이 두려워하던 자들이 오히려 야곱을 두려워하게 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야곱은 두 아들이 세겜 족속의 남자들을 모두 죽이고 재물을 약탈한 일로 주변 족속들이 동맹하여 공격할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세겜을 떠나라는 명령에 순종하자 하나님께서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야곱을 두려워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통해 무엇을 알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까? 두려움은 상황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두려움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자에게 찾아오는 첫 감정입니다. 두려움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이 아닙니다. 따라서 두려운 마음이 든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꿈 많은 소년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온 후 그에게 어떤 일이 불어 닥쳤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본문을 중심으로 요셉이 당한 고난의 의미가 무엇이고, 우리가 고난 당할 때에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롤러코스터와 같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믿음의 조상 중에도 이삭을 제외한 아브라함과 야곱이 그러했고 요셉, 모세, 다윗 등 수많은 사람들이 험란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롤러코스터와 같은 삶을 살아간 자는 요셉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의 생애는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합니다. 그의 출발은 너무 좋았습니다. 요셉은 야곱이 그의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통하여 태어났을 뿐 아니라 임신하지 못하다가 태어났기 때문에 야곱은 그 어느 자식보다도 요셉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자식들은 양떼를 치도록 밖으로 내보냈지만 요셉은 집안에만 머물게 했고 다른 자식들에게는 입히지 않았던 채색옷을 입혔습니다. 그러던 요셉에게 운명이 뒤바뀌는 일이 발생합니다. 하루는 야곱이 요셉을 불러 형들이 양을 치는 곳으로 보내며 그들의 안부를 알아보고 오라고 합니다. 그러자 요셉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여 즉시 형들에게 갑니다. 그런데 그의 형들이 멀리서 요셉이 그들에게 오는 것을 보더니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져 죽이고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고 하자 그리고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보자”고 말합니다. 한 마디로 그를 죽여서 그의 꿈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장남인 르우벤이 요셉을 살리기 위해 죽이지 말고 구덩이에 던지자고 제안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요셉을 구덩이에 던집니다. 그리고 점심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이스마엘 사람들이 낙타에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가고 있는 것을 보자, 유다가 나서서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덮어둔들 무슨 유익이 있느냐며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자고 제안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려 이스마엘 상인에게 은 20냥에 팔아버립니다. 이 때에 요셉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오늘 읽은 본문은 이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에 요셉의 형제들이 식량을 구하러 와서 말한 것을 보면 당시 요셉이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42장 21절을 읽겠습니다.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음으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당시 요셉이 얼마나 두려움과 공포 속에 떨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생애 중 이처럼 절망적인 상황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하나님께서 요셉의 삶에 개입하셨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은 갑자기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39장 3절을 읽겠습니다.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또한 창세기 39장 23절을 읽겠습니다.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우리가 읽어서 알 수 있듯이 요셉이 종살이를 할 때나 억울하게 옥살이 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통하여 무엇을 추론할 수 있습니까? 요셉이 형들에게 구덩이에 던져지고 애굽으로 팔릴 때 살려달라고 외쳤을 때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던지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는데 요셉이 형들에게 구덩이에 던져지고, 애굽에 팔려가서 종살이를 하고, 억울하게 누명을 써서 옥살이를 할 때에 가만히 계셨느냐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요셉이 고난 당할 때에 뭔가 액션을 취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본문은 요셉이 고난 당할 때에 왜 하나님께서 침묵하셨는지에 대해 말씀하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평소 성경을 해석할 때 어떻게 해석해야 한다고 말씀 드렸습니까? 성경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다른 곳에서 요셉이 고난을 당할 때에 왜 하나님께서 버려두셨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시편 105편 17-19절을 읽겠습니다.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다.” 시편기자는 요셉이 구덩이에 던져져 종으로 팔릴 때에 하나님께서 침묵하신 이유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그를 단련하시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지만 고난당할 때 버려두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따라서 뜻하지 않은 고난을 당할 때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시지 않는다거나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면 왜 도와주시지 않느냐고 원망이나 불평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연단을 통하여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고난을 많이 당한 사람을 손꼽으라고 하면 욥을 떠올립니다. 그는 평소 본인의 신앙뿐만 아니라 자녀들의 신앙도 챙길 정도로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았습니다. 성경은 욥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 1:1). 그런데 하루아침에 열 자녀를 잃고, 모든 재산을 잃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악창이 나서 기왓장으로 긁을 정도로 참담한 상황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런데 욥이 그토록 엄청난 고난을 당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사람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는 자신이 당하는 재앙의 의미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을 연단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무슨 근거로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지 아십니까?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욥이 고난을 당했을 때에 엘리바스가 찾아와서 욥을 충고합니다. 그런데 이때에 욥이 그에게 뭐라고 말한 줄 아십니까?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욥은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난을 하나님께서 자신을 순금같이 되게 하시기 위해 연단하시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뜻하지 않은 고난을 당할 때에 하나님께서 욥처럼 자신을 연단하신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고난을 하나님의 연단으로 이해할 때에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연단에는 기한이 있다는 것입니다. 종전에 읽은 시편 105편 17-19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다.” 언제까지 연단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입니다. 그 기간이 얼마인지 아십니까? 요셉이 꿈을 꾼 시기는 17세이고 그의 꿈을 이룬 시기는 30세였으므로 13년을 연단 받았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연단에는 반드시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혹 지금까지도 연단으로 고생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조금만 더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요셉이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되고 110세 죽었기 때문에 80년간을 애굽의 총리로 일했습니다. 13년 동안 연단 받고 80년을 애굽의 총리로 살았습니다. 연단은 충분히 받을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고난을 당할 때에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고난이 하나님께서 연단하시기 때문에 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징계로 고난을 허락하실 때가 있습니다. 따라서 고난의 원인을 정확히 분석하여 대처해야 합니다. 저는 이번에 갑자기 가슴에 통증이 와서 병원에 가서 초음파를 비롯해서 여러 검사를 하는 과정에서 당뇨에 걸린 것을 알았습니다. 뜻밖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평소 당뇨 증상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을 받아들이고 왜 제게 당뇨가 왔는지를 생각했습니다. 겉으로는 운동부족과 이런저런 스트레스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근본적으로는 당뇨의 원인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고 그 원인을 주님께 여쭤보았습니다. 그때에 성령께서 저의 죄 때문인 것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회개하고 약을 복용하자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죄 때문에 당하는 고난은 유익이 없습니다. 죄 때문에 고난 당하지 말고 잘못이 없어도 고난을 통해 연단을 받으로 주님께 귀하게 쓰임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요셉을 연단하신 내용은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요셉을 연단하신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 아님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주인이라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생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원치 않는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자신이 원치 않았지만 형들에게 팔리고 억울하게 옥살이 하는 과정을 통하여 이것을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요셉이 총리가 된 후 자신들을 판 형제들을 만났을 때에 그들과 나눈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45장 7-8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매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자신을 애굽에 팔아넘긴 자는 그의 형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생의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통치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자신이 원치 않는 고난을 당하고 자신이 소원하는 대로 일이 잘 되지 않는 것을 통하여 이것을 깊이 깨닫고 주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몸부림을 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께서인생의 주인이심을 깨달아도 쉽게 삶이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고난이 지나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신을 주인으로 착각하고 자기 생각대로 인생을 계획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짧은 기간, 한 두번 고난을 당하지 않게 하시고 다양하게 오랜 동안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고난과 하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은 비례합니다. 고난을 크게 당하면 당할수록 인생의 주인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뼛속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동안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400년 동안이나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게 하셨는지에 대해 답을 얻지 못하고 있었습니다(창 15:13-14). 그런데 이번에 말씀을 준비하면서 그 답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400년이란 기간 동안 연단을 받지 않으면 오직 하나님만이 그들의 주인이심을 깨달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400년 동안이나 원치 않는 종살이를 하면서 대대로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알았기 때문에 오랜 동안 나라를 잃고 고난을 당했어도 지금까지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연단을 받을 때에 그가 한 일이 무엇인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창세기 39장 4-5절과 창세기 39장 21-23절을 읽겠습니다. 두 곳의 말씀을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가는 곳마다 총무의 일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종살이 할 때는 가정 총무가 되어 그 집의 모든 소유를 주관하였고 옥살이를 할 때는 옥중 총무가 되어 감옥의 제반 사무를 주관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가정 총무가 되게 하시고 옥중 총무가 되게 하신 것은 장차 애굽의 총리로서 해야 할 일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고난을 당하는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꿈을 이루시기 위해 그릇을 준비하시는 때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연단의 때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복을 담을 그릇을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우리가 준비한 만큼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의 인물이나 세속사의 인물이나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연단 없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그가 80세에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기 전, 40년 동안이나 미디안 광야에서 연단을 받았습니다. 그는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단지 양을 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할 지도자로 준비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간 양을 치면서 목자의 성품을 터득했습니다. 그가 연단을 받기 전에는 혈기가 충만해서 사람을 쳐 죽일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40년간 광야훈련을 통하여 지상에서 가장 온유한 자가 되었습니다(민 12:3). 따라서 우리가 연단 받을 때에 시간을 대충 대충 보내면 안 됩니다. 이 과정에서 얼마나 성실하게 훈련을 받느냐가 우리의 미래를 결정짓는 것입니다. 연단과정에서 요셉처럼 준비를 잘하여 하나님께 온전히 쓰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형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형통이라는 단어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말하는 형통과 성경이 말하는 형통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형통은 모든 일이 아무런 어려움 없이 잘 되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형통은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요셉이 형들에게 팔려 종살이를 하고 있을 때와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고 있을 때를 형통했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형통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창세기 39장 3절과 창세기 39장 23절을 읽으면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창 39:3)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포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창 39:23). 두 본문을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형통’과 ‘임마누엘’이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성경에서 말하는 형통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으면 세상에서 아무리 잘 되도 그것은 형통이 아닙니다. 반대로 아무리 어렵고 힘들게 살아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그는 형통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에게 최고의 복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보다 인간에게 큰 복은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시 73:28)고 말한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므로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 존재 의미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늘 점검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시느냐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뜻하지 않은 고난의 때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때가 아니라 연단을 받는 때입니다. 연단의 넓이와 깊이가 축복의 넓이와 갚이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그가 바로 형통한 자입니다. 항상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자가 되어 형통한 자로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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