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예수께서 운명하실 때에 성소휘장이 찢어졌는가? 눅 23:44-49 2018.8.5.

//왜 예수께서 운명하실 때에 성소휘장이 찢어졌는가? 눅 23:44-49 2018.8.5.
왜 예수께서 운명하실 때에 성소휘장이 찢어졌는가? 눅 23:44-49 2018.8.5.2018-12-03T23:53:12+09:00

Home 게시판 주일설교 왜 예수께서 운명하실 때에 성소휘장이 찢어졌는가? 눅 23:44-49 2018.8.5.

1 글 보임 - 1 에서 1 까지 (총 1 중에서)
  • 글쓴이
  • thechurch
    키 마스터
    Post count: 355

    본문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전에 무엇을 하셨고, 죽으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께서 운명하시기 전 무엇을 하셨는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46절입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예수께서 운명하시기전 기도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죽음 직전까지도 기도하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께서 그의 생을 기도로 마감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마지막에 남긴 말과 행동을 보면 그가 무엇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마지막 순간까지 기도하셨다는 것은 예수께서 기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기도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좀 더 무릎을 꿇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운명하시기 전, 기도하신 내용이 무엇입니까?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예수께서 이 기도를 하시기 바로 직전에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다 이루었다”(요 19:30). 즉 예수께서 사명을 마치시고 아버지의 손에 자신의 영혼을 부탁한다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무엇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첫째로, 사명을 마치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불러 가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명없이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죽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명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사명이 있습니까? 복음전도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에베소교회 장로들에게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4절)라고 말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운명하시면서 다 이루셨다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서 우리의 사명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그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둘째로, 죽음 이후의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운명하시면서 자신의 영혼을 주님께 맡겼다는 것은 우리의 인생이 죽음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죽은 후에 하나님께로 돌아가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죽음 그 이후를 준비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도 미래를 준비한 자와 그렇지 않는 자의 삶의 질이 다르듯이, 죽음 이후의 심판을 준비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삶이 다릅니다. 이 세상에서는 미래를 위해 아무리 준비를 잘 했어도 잠시 동안만 그것을 누리지만, 죽음 이후를 위해 준비한 것은 영원히 누립니다.

    예수께서 운명하실 때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44절입니다.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 예수께서는 유월절 절기 중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본문에서 제6시는 유대인식 표현인데 유대인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 차는 6시간입니다. 따라서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했다”는 것은 예수께서 오전에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정오 12시부터 해가 빛을 잃고 오후 3시까지 어두운 현상이 계속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오에 해가 빛을 잃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사실 해가 빛을 잃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모세가 애굽에서 10가지 재앙을 내릴 때는 흑암이 삼일 동안이나 애굽 온 땅에 있던 적도 있었습니다(출 10:21-22). 혹자는 달이 해를 가리는 일식으로 인해 잠시 해가 빛을 잃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유월절이 만월에 지켜지는 절기이므로 이런 주장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혹자는 구름이나 강한 먼지가 해를 가린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구름이 끼거나 강한 먼지가 일어도 칠흑같이 어두울 수 없습니다. 도대체 정오에 해가 빛을 잃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요한복음 12장 36절을 읽으면 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예수께서 자신을 빛이라고 하시고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면 빛의 아들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운명하시는 순간 해가 그 빛을 잃었다는 것은 빛이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기회를 잃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믿는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있을 동안에만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전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 포교의 자유가 없어질지 모릅니다.

    예수께서 운명하실 때에 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45절을 읽습니다.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곳은 골고다입니다. 그런데 휘장이 찢어진 곳은 성전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공관복음(共觀福音)인 마태, 마가, 누가 세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예수께서 운명하실 때에 해가 빛을 잃은 것과 관련하여 마태와 마가와 다르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예수께서 운명하신 후에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50-51절을 읽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도하며 바위가 터지고”(참조, 막 15:37-38절).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운명하시기 전에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누가복음 23장 44~46절을 읽습니다. “때가 제 육 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 시까지 계속하며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이처럼 동일한 사건을 상이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혹자는 이를 빌미로 성경의 오류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동시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마태와 마가는 예수께서 운명하신 것을 강조한 것이고, 누가는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그런데 멀쩡한 성소의 휘장이 이렇게 찢어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출애굽기 26장 1절을 보면 휘장을 무엇으로 만들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너는 성막을 만들되 가늘게 꼰 베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을 정교하게 수놓은 열 폭의 휘장을 만들지니.” 즉 휘장은 베실로 만들어졌습니다. 따라서 외부에서 힘을 가하지 않고서는 결코 찢어지지 않습니다. 일반 커튼도 칼로 베지 않으면 둘로 나눌 수 없는데 어찌 아무 힘도 가하지 않았는데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질 수 있겠습니까? 누군가 찢지 않으면 절대로 찢어질 수 없습니다. 또한 어느 누구도 성소의 휘장을 찢을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휘장을 찢는 순간 지성소를 보게 되어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소의 휘장이 찢긴 것은 사람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성소의 휘장을 찢으셨을까요? 그것은 성전의 구조를 이해하면 알 수 있습니다. 성전(聖殿)은 출애굽 후 광야에서 만들었던 ‘성막’(聖幕)과 그 구조가 같습니다. 물론 성전에는 부속물이 붙어있기 때문에 성막보다 크지만 기본 구조는 동일합니다. 성막의 구조에 관해서는 출애굽기 25-40장 등을 보면 됩니다. 성막은 사방으로 울타리가 세워져 있고, 동쪽에 출입문이 있습니다. 출입문으로 들어가면 마당이 있고, 그 안쪽에 장막(帳幕)이 나옵니다. 그 장막은 두 칸으로 되어 있는데, 첫 번째 칸을 성소(聖所), 두 번째 칸을 지성소(至聖所)라 부릅니다. 그리고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휘장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또 지성소 안에는 법궤(언약궤)가 놓여 있는데(출25:10-22 참조), 그 뚜껑 부분을 ‘속죄소’(贖罪所) 라 부릅니다. 속죄소는 피를 뿌림으로 속죄를 받고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속죄소 위에 정금으로 만든 그룹 천사 둘이 마주보고 있는데, 바로 그 사이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 인간을 만나 주십니다. 그런데 이 지성소에는 아무나 아무 때나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일반 제사장은 물론 대제사장도 자기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대제사장도 1년에 단 한 번만 ‘대속죄일’(大贖罪日)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운명하시는 순간 성소와 지성소를 갈라놓은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누구나 하나님께 직접 들어가는 길이 열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이제는 지성소를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도 직접 만날 수 없는데 우리가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보통 엄청난 사건이 아닙니다. 역사이래 이보다 더 큰일은 없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이 짐승을 죽여 그 피로 대속을 해야지만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유지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친히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기 때문에 직접 하나님께 나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를 근거로 루터가 만인제사장론을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구약시대처럼 레위지파에 속한 제사장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사실을 믿고 구원받았다면 누구든지 아무 때나 어디서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살아생전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고, 베드로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운명하신 것을 보고서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47절입니다.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이 백부장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총괄 지휘하는 사람으로 로마 군대의 백 명으로 조직된 단위 부대의 우두머리입니다. 성경에는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롱기우스’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나타난 현상을 보고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그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자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라고 말한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단순히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만한 죄를 짓지 않은 자라고 고백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동일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가복음을 보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5장 39절을 읽습니다.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백부장이 예수님을 향하여 의인이라고 말한 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백부장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는 일을 진두지휘하다가 구원의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이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처형하는 일을 총 책임을 진자가 구원받을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자신도 몰랐고 그 어느 누구도 몰랐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아무 것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핍박자 바울이 가장 복음을 전하는 복음전도가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어떤 반응이 있었습니까? 48절입니다.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가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운명하실 때에 일어난 상황을 보고서 가슴을 치며 돌아간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왜 가슴을 쳤을까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외치고 또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과정을 장난삼아 구경한 것이 얼마나 큰 잘못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슴을 쳤던 자들이 어떤 자들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무리’였습니다. 즉 수많은 자들이 그들의 잘못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그들의 생각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수의 생각이라고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민주주의 함정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다수의 판단이 옳은 것이라면 기독교는 이미 이 세상에 없었을 것입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지만 예수께서는 부활을 통하여 그들의 생각이 완전히 잘못된 것임을 온 천하에 드러내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리’를 따르지 말고 진리이신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에 의해 움직입니까? 무리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마지막으로 49절입니다. “예수를 아는 자들과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 누가는 멀리서 예수께서 운명하신 것을 본 여자들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그들이 단지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마태는 이 여자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자들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55-56절을 읽습니다.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마태는 여인들 중에 몇 몇의 실명, 즉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등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누가는 마태와 마가와는 달리 이름을 밝히지 않고 ‘여자들’이라고만 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는 자들이 이름을 거명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천명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제가 ‘2030123007000’의 비전에서 7000천은 하나님께서 숨겨 놓으신 사람들을 찾아 후원하고 그들과 함께 세계복음화를 이루겠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간판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직분과 신앙경력으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과의 친밀함으로만 따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르지만 주님께서 귀히 여기시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과 친밀하므로 그분이 가시는 곳이라면 끝까지 따라가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글 보임 - 1 에서 1 까지 (총 1 중에서)
  • 답변은 로그인 후 가능합니다.
책주문

게시판

최근 게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