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예수께서 성찬을 제정하셨을까 눅22:14-20 2018.5.13

//왜 예수께서 성찬을 제정하셨을까 눅22:14-20 2018.5.13
왜 예수께서 성찬을 제정하셨을까 눅22:14-20 2018.5.132018-12-03T23:47:29+09:00

Home 게시판 주일설교 왜 예수께서 성찬을 제정하셨을까 눅22:14-20 2018.5.13

1 글 보임 - 1 에서 1 까지 (총 1 중에서)
  • 글쓴이
  • thechurch
    키 마스터
    Post count: 364

    오늘 본문에는 우리가 자주 행하는 성찬의 원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중심으로 성찬과 관련한 다섯 가지 질문을 던지고, 이에 대해 답하는 형식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성찬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지고 주의 죽으심에 온전히 연합하여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첫째로, 왜 예수께서 유월절에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하셨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언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14-15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본문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 즉 성찬을 유월절에 하셨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유월절은 이스라엘백성들이 애굽에서 400년간 종살이를 하다가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 굳이 예수께서 유월절에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하셨을까요? 그것은 유월절 첫 날에 무엇을 하는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유월절은 7일간 진행되는데 성찬식을 제정하신 때는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을 잡는 날이었습니다. 본래 유월절 양은 오후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에 잡도록 되어 있었고 반드시 제사장들이 성전에서만 잡을 수 있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유월절 절기에는 해마다 대략 이십오만 마리의 양이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양을 잡는 유월절 첫 날에 만찬을 하시던 중 떡을 떼어주시고 잔을 주신 것은 자신이 바로 속제 제물인 어린양으로 죽임 당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유월절에 만찬을 하신 것은 이를 통하여 자신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어린 양이심을 가르쳐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요 1:29)
    이런 사실은 14-15절을 통하여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본문은 예수께서 ‘때가 이르매’ 유월절을 지키셨고, 그리고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게서는 성만찬을 통하여 자신이 어린 양이신 것을 알리기를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찬에 참여할 때마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희생제물로 오신 어린양이심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어린 양이심을 믿지 않으면 예수님과 우리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성찬을 할 때마다 예수께서 자신의 죄를 해결해주시기 위해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 어린 양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유월절에 성찬식을 베푸신 것과 관련하여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유월절에 성찬을 베푸셨는데, 왜 오늘날 교회는 유월절을 지키지도 않고 유월절에 성찬식을 베풀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이 문제를 가지고 우리를 공격하는 기독교이단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친히 유월절을 지키셨기 때문에 우리도 유월절을 지켜야 하고 유월절에 성찬식을 제정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유월절에 성찬식을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언뜻 보면 그들의 주장에 타당성이 있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유월절을 지키신 것은 자신이 유월절 어린양이심을 계시하시기 위해서 하신 것이지 우리에게 유월절을 지키라고 가르쳐주시기 행하신 것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우리가 유월절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친히 유월절 어린양으로 희생제물이 되셨기 때문에 더 이상 어린양을 제물로 드리는 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가 유월절을 지키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성찬식을 유월절이 아니라 모일 때마다 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혹 여러분에게 누군가가 접근해서 유월절을 지키지 않는 교회는 바른 교회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교회에서 나온 자인 줄 알고 그들의 꾐에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로, 예수께서 ‘떡을 떼어주시고 잔을 나누어주신 것’은 각각 무엇을 의미하냐는 것입니다. 성경에 성찬에 대하여 기록한 곳은 4곳입니다. 마태복음(26:26-29)과 마가복음(14:22-25)과 누가복음(22:15-20)과 고린도전서(11:23-29)입니다. 예수께서 떡을 떼어 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19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평소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요 6:35)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주시겠다는 것을 뜻합니다. 즉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자신의 목숨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단지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시기 위해서만 자신의 몸을 내어주신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예수께서 자신의 몸을 내어주심으로 우리의 죄와 허물만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나음도 입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신 것은 단지 우리의 죄 문제만 해결해주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병도 낫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예수께서 모든 병자들을 고치셨을 때에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 8:17)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믿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듯이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 모든 병을 고침 받았다는 것을 믿으면 실제로 고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자주 행하는 성찬예식을 통하여 치유의 기적을 맛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예수께서 잔을 주시면서 “이는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20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새 언약’에 주목해야 합니다. 새 언약이 있다는 말은 옛 언약이 있다는 말입니다. 옛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백성과 맺은 언약을 말합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이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언약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계속해서 우상을 섬기고 온갖 불법들을 행하므로 율법을 파기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옛 언약이 파기되었음을 선포하시고, 새로운 언약을 세워 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다 함께 예레미야 31장 33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33).” 예수께서 예레미야를 통하여 약속하신 대로 자신의 피로 세우신 언약이 바로 새 언약입니다. 즉 새 언약은 우리가 언약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언약을 지키지 못해도 예수께서 대신하여 피 흘리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주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잔을 가지고 감사하신 후,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니라”(눅 22:20)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죄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없기에 예수께서 대신 죄 값을 치러주시고 죄 문제를 영원히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것을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자신이 뭔가 착한 일을 해야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오늘 여러분이 잔을 받으실 때에 자신의 의로운 행실이 아니라 예수께서 흘리신 피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 받는다는 것을 더욱 더 깊이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잔을 갖다가 서로 나누라고 하셨느냐는 것입니다. 본문 17절을 읽습니다. “이에 잔을 받으사 감사기도 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끼리 나누라’는 말은 성찬을 통해서 서로 교제하는 공동체임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서로 교제해야 합니다. 왜 교제를 해야 할까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각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지체가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몸이 제 기능을 할 수 없듯이 성도간의 교제가 없다면 교회는 정상적인 기능을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신앙을 지키는 일에만 관심을 갖지 말고 서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히 10:25). 구체적으로 어떻게 교제해야 할까요? 초대교회처럼 세 가지, 즉 말씀과 물질과 음식으로 교제해야 합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대부분이 음식으로나 교제하지, 말씀과 물질로는 거의 교제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모델교회이기 때문에 우리는 세 가지로 교제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특별히 말씀으로 교제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물질로도 교제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바나바가 자신의 집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과 함께 했기 때문에 핍절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배는 점점 커져 가는데 같은 교회의 성도가 굶주린 채 잠들고 있다면 이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넷째로, 왜 예수께서 ‘성찬을 통하여’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고 하셨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념하라’는 헬라어로 ‘아남네신’이라고 하는데, 이는 ‘기억하라’는 뜻을 가장 크게 갖고 있습니다. 즉 성찬을 행할 때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몸 찢기시고 돌아가신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왜 예수께서 말로써 자신의 죽음을 기념하라고 하시지 않고, 떡을 떼어주시고 잔을 나눠주시면서 자신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그들이 그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은 망각의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건져주셨지만 이를 쉽게 잊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바로 이것을 아시고 성찬을 통하여 모일 때마다 성찬을 통하여 이를 기억하도록 하게 하신 것입니다. 설교는 크게 듣는 설교와 보는 설교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강단에서 말로 하는 설교를 ‘듣는 설교’라고 하고, 성찬으로 하는 설교를 ‘보는 설교’라고 합니다. 그런데 보는 설교가 듣는 설교보다 훨씬 더 오래 동안 기억을 하게 합니다. 실험에 의하면 사람은 읽는 것의 10%, 듣는 것의 20%, 보는 것의 30%를 기억한다고 합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백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는 것을 수백 번 듣는 것보다 성찬에 참여하여 떡을 떼고 잔을 나누는 것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까요? 그것은 예수의 십자가를 망각하는 순간 죄 사함 받은 감격과 기쁨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잊는 순간 죄의 무거운 짐에 다시 눌려 절망의 늪에서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찬을 통하여 예수께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깨닫고 죄사함 받은 감격과 기쁨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시험을 당했어도 죄 사함을 받은 것을 확신하면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부모와 스승의 은혜를 잊을지라도 예수께서 친히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건져주신 은혜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섯째로, 어떻게 예수께서 죽음을 앞두고 감사기도를 하실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기도에는 크게 네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영어로 기도의 4요소를 ‘ACTS’라고 표현하는데, A는 찬양(Adoration), C는 고백(Confession), T는 감사(Thanksgiving), S는 간구(Supplication)입니다. 따라서 기도에는 반드시 감사가 들어가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재료를 갖고 음식을 만들어도 양념을 넣지 않으면 음식의 맛을 낼 수 없듯이 기도에 감사가 빠지면 참된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감사가 없는 기도는 앙꼬 없는 찐빵과도 같습니다. 따라서 기도에 감사가 들어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유월절 만찬에서 감사기도를 하신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19절). 왜냐하면 당시 예수께서는 죽음을 앞에 두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잠시 후면 종교지도자들이 보낸 하속들에게 체포를 당하시고 심문을 받으시고 그 다음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감사기도를 드리실 수 있었을까요? 저는 크게 두 가지로 생각했습니다. 첫째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지만 곧 부활하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죽음 앞에서 절망하는 것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곧 다시 살아나실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서도 감사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부활의 신앙을 가지면 어떤 절망 앞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모든 인류가 죄 사함을 받고 구원 받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하는 일이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이라는 것을 확신한다면 어떤 고난을 당해도 감사한 마음을 잃지 않습니다. 우리가 D3로 세계복음화를 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분에 넘치는 헌신을 하면서도 기뻐하고 감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여러분이하는 일이 얼마나 가치있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가는 곳마다 D3를 통하여 목회자와 선교사와 평신도들이 살아나고 있습니다. 바울도 복음을 전할 때에 이런 것을 체험했기 때문에 그토록 극심한 고난 중에서도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성찬을 통하여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유월절 희생제물이 되신 어린 양이시기에 이를 믿고 죄 사함을 받고 구원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은 단지 자신의 죄뿐만 아니라 자신의 질병도 고치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물질과 음식과 말씀을 서로 나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장차 더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믿고 감사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글 보임 - 1 에서 1 까지 (총 1 중에서)
  • 답변은 로그인 후 가능합니다.
책주문

게시판

최근 게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