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예수께서는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밝히셨을까? 누가복음 22장 63-71 2018.7.1

//왜 예수께서는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밝히셨을까? 누가복음 22장 63-71 2018.7.1
왜 예수께서는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밝히셨을까? 누가복음 22장 63-71 2018.7.12018-12-03T23:50:56+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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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은 예수께서 체포되어 공회에 끌려오셔서 공회원들과의 논쟁을 통하여 자신이 누구신지를 밝히시기까지의 과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유대 관헌들 앞에서 3번, 로마의 관리들 앞에서 3번을 심문을 받으셨는데, 누가는 유대의 관헌들 앞에서 받은 심문 중, 2번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본문 63-64절을 읽습니다.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 여기서 지키는 사람들은 로마 수비대를 가리킵니다. 당시 아이들은 술래의 눈을 가리고 갈대 껍질로 때린 후 누가 때렸는지 맞추게 하는 놀이를 했는데, 그들도 예수님의 눈을 가리고 때리며 누가 때렸는지를 알아 맞춰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이 이렇게 한 것은 예수님을 희롱한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 수비대들이 예수님께 그렇게 한 것은 단지 희롱,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눈을 가렸다는 것은 예수께서 아무 것도 보시지 못하게 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앞을 보지 못한 자는 예수님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었습니다. 그들은 두 눈을 멀쩡히 뜨고 있었지만 영적인 눈이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예수께서 누구신지 알아보지를 못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예수님의 눈을 가렸다는 것은 자신들이 스스로 눈 먼 자라는 것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당시 로마 군병들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도 비신자와 신자에게 모두 나타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도리어 거룩하신 예수님을 욕하고 비방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영안이 뜨이지 않아 이 세상 것만 보고 다가올 나라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치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 중 라오디게아 교회와 흡사합니다.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7-18). 당시 라오디게아에는 의술을 가르치는 학교가 있었고 효험이 있는 안약이 생산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안약을 사서 발라 치료받았듯이 영적인 안약을 사서 발라서 영적인 눈을 뜨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의 풍요에 취해서 자신이 얼마나 영적으로 발가벗은지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야 합니다. 영적인 눈을 뜨게 하는 안약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면 영적인 눈이 뜨여져 영의 세계를 보고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께서 얼마든지 눈가리개를 물리치실 수 있으셨는데 왜 가만히 계셨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잠시 앞을 보지 못하심으로 영원히 우리의 눈을 뜨게 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가리개로 가려져 잠시 동안 앞을 보시지 못하신 것은 우리를 영원히 보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영적인 눈을 가진 자들입니다. 따라서 보이는 세상만 보지 않고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어둠에 속한 자로 살아가지 말고 빛에 속한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께서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요 12:46)라고 말씀하셨듯이, 어둠에 거하지 말고 빛 가운데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눈을 가리고 어떻게 했습니까? 64-65절입니다. “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 그들이 예수님의 눈을 가리고 때리며 선지자 노릇 하라고 희롱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선지자가 아니라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하신 분이십니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께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어찌 감히 죄인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욕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한마디로 예수께서 그들로부터 이렇게 취급을 당하신 것은 극도로 멸시와 조롱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께서는 일언반구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얼마든지 그 일을 피하실 수 있었는데 왜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가만히 수모를 당하셨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죄로 인하여 당해야 할 경멸과 모욕을 친히 감당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희롱을 당하신 것은 전적으로 우리가 죄로 인하여 당해야 할 수치를 대신 감당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대신 희롱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주님의 일을 하다가 수치를 당해도 기꺼이 참아야합니다.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공회로 끌어들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한 때가 ‘언제’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66절을 읽습니다. “날이 새매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여서 예수를 그 공회로 끌어들여” 그들이 예수님을 공회로 끌어들인 때는 날이 샌 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그들이 날이 새서야 예수님을 공회로 끌여들였을까요? 그것은 법이 낮에만 산헤드린 공회를 열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들의 이중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려고 한 것 차제가 불법인데, 이 불법을 저지르는 과정에서 그들이 법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즉 안으로는 불법을 자행하면서 겉으로는 법을 지키는 척 했습니다. 이처럼 겉과 속이 다른 것을 ‘외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외식은 심판을 부릅니다.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향하여 종종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은 그들이 외식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외식은 단지 바리새인과 서기관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삶속에서 외식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거룩한 척 하지만 세상에서는 온갖 죄를 짓고 있습니다. 입으로는 사랑을 외치지만 속에서는 분노와 미움과 시기질투가 부글부글합니다. 우리는 외식을 제거해서 하나님의 심판의 자리에 나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공회로 끌어들이기 전에 ‘무엇을’ 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66절을 다시 읽습니다. “날이 새매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여서 예수를 그 공회로 끌어들여.” 여기서 ‘모여서’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함께 모인 자들이 누구였습니까? 백성의 장로들, 즉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평행구절인 마태복음 16장 21절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로 구분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예수님을 공회로 끌어들인 자들을 다른 복음서 기자와 다르게 기록했는지는 모릅니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이들은 결코 하나 되기 힘든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추구하는 방향이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일에는 하나 되었습니다. 하나 되기 힘든 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는 하나된 것을 통하여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도 원수 마귀와 싸우는 일에는 하나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귀와 싸우는 것을 영적전쟁이라고 하는데 그 전쟁의 꽃은 전도입니다. 왜냐하면 전도는 마귀의 자녀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전도하는 데는 한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특별히 전도를 효과적으로 하는 제자훈련에는 한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더치치가 작지만 대형교회도 하지 못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일에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역은 지금보다 훨씬 커질 것입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겸손으로 허리띠를 매고 하나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공회가 예수님을 끌어들여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67절을 읽습니다.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 대답하시되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공회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인지 아닌지를 밝히라고 물었습니다. 당시 공회는 71명으로 구성된 유대인의 최고 의결기구로 현재의 국회 기능을 감당했습니다. 그들에게 세속적인 전권은 제한했지만 로마제국은 종교적인 결정에 있어서는 그들의 권위를 인정해주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 땅에서는 민란과 폭동이 잦았기 때문에 총독은 자칭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는 자가 나타나면 이를 매우 민감하게 다루었습니다. 그래서 공회는 예수께서 그리스도라고 하면 얼마든지 빌라도 총독에게 십자가에 못 박도록 요청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신지를 밝히라고 물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런 생각으로 예수님께 그리스도인지를 밝히라고 하자 예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68-70절입니다.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 다 이르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대답하시되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 예수께서는 그들의 간계한 마음을 아셨지만 자신이 누구신지를 밝히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께서 자신을 인자라고 칭하신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인자는 성경에 187회나 나오는데 구약에서 102회, 신약에는 85회 등장합니다. ‘인자’라는 칭호 속에는 고난 받는 메시아와 영광 중에 재림하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메시아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자신을 인자라고 칭하신 것은 비록 자신이 그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만 마지막 날에는 다시 이 세상에 오셔서 심판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합니다.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러자 예수께서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내가 그로라.” 예수께서 “내가 그로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나는 나다(I am who I am)’고 답변하신 형식을 빌려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내가 그로라”고 답변하신 것은 자신이 곧 하나님이시며 이 땅에 구원자로 오신 그리스도이신 것을 밝히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예수께서 자신이 누구신지를 밝히신 것은 매우 이례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가이사랴 빌립보 사건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루는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그러자 제자들이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답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다시 질문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답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를 들으시고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돈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17-18절)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후 뭐라고 하셨습니까?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경고하셨습니다(20절). 즉 자신이 누구신지를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전에는 예수께서 자신이 누구신지를 외부에 알리기를 원치 않으셨는데, 지금은 왜 자신이 직접 밝히셨을까요? 그것은 이제는 예수께서 누구인지를 밝히셔야 할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께서 초기부터 자신이 누구신지를 밝히셨다면 공생애 동안 사역을 제대로 하시지도 못하고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을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무엇을 깨달아야 할까요? 무엇을 하든지 때를 잘 분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도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때가 있나니”(전 3:1). 그렇습니다.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으면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고, 죽일 때가 있으면 치료할 때가 있고, 헐 때가 있으면 세울 때가 있고,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고, 슬퍼할 때가 있으면 춤출 때가 있고,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으면 돌을 거둘 때가 있고, 안을 때가 있으면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날 때에 할 일을 죽을 때에 한다든지, 슬플 때에 할 일을 죽을 때에 한다든지, 울을 때에 할 일을 웃을 때에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가 요즈음에 가장 크게 관심을 갖는 주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때’입니다. 왜냐하면 지난 세월을 돌아보니 저의 계획과 뜻대로 된 것은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주님의 시간에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새롭게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이 자신의 뜻과 생각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뜻대로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주인되심을 인정하고 범사에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이 어느 때라고 생각합니까? 지금은 주님께서 곧 오실 때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재림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마지막 날이 노아홍수 심판 때처럼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께서 자신이 누구신지를 밝히자 그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71절입니다. “그들이 이르되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노라 하더라.” 그들이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세워 죽이려고 그토록 노력했는데 이제야 그 증거를 확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친히 자신이 누구신지를 밝히셨기 때문에 그 뜻을 성취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뜻을 성취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영원히 저주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진정한 복입니다. 우리가 원한 것을 얻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4-15)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지 말고 주님께서 얻기를 원하시는 것을 얻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하십니까? 자신의 욕망입니까? 하나님의 뜻입니까? 후자가 이뤄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은혜가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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