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실패가 축복인가? 누가복음 22장 54-62절 2018.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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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실패가 축복인가? 누가복음 22장 54-62절 2018.6.242018-12-03T23:50:29+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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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본문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과정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예수께서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내가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고난 받고 십자가에 죽게 될 것인데,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하실 때, 베드로가 “주님, 다른 사람은 다 주님을 버릴 찌라도 나는 안 그러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할 것이다.” 이에 베드로가 힘 있게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라고 굳게 맹세했지만, 결국 베드로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고,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통곡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그들이 다 자기를 버릴 것이라고 하셨는데, 왜 유독 베드로만 나서서 자신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장담을 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예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당연히 그렇게 될 것을 두려워하고 조심했어야 하는데, 어떻게 감히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반박할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그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생각했습니다. 첫째로, 그가 평소 제자들보다 믿음이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통하여 이를 알 수 있습니까? 베드로가 “다른 사람은 다 주님을 버릴찌라도” 자신은 버리지 않겠다고 말한 것을 통해서입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베드로가 평소 다른 제자들보다는 자신의 믿음이 강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베드로가 그렇게 생각하게 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가이사랴 빌립보’ 사건입니다.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곳에서 “사람들이 너희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지만 만족할 만한 답을 얻지 못하시자,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실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답을 했습니다. 예수께서 그 답을 들으시고 너무 기쁘셔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부터 베드로는 예수께서 자신의 믿음을 인정하셨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른 제자들의 믿음과 자신의 믿음은 전혀 다르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랬을까요? 베드로가 그렇게 고백한 것은 스스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이나 대동소이한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둘째로, 예수께서 그의 이름을 개명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베드로의 본래 이름은 시몬이었습니다. 시몬은 ‘들으심, 응답하셨다’라는 뜻도 있지만 ‘광야, 사막’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의 이름을 베드로로 바꾸어주셨습니다.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즉 과거에는 사막의 모래처럼 바람에 휘날리는 자로 살았지만 이제는 반석처럼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아가라는 의미로 그렇게 개명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장차 어떤 일이 불어 닥쳐도 반석처럼 흔들리지 않고 예수님을 따를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실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 장차 베드로를 그렇게 세워가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마디로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정면으로 반박한 것은 자신이 어떤 자인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연약한 존재인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을 자기가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 매우 복잡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아시지 우리는 스스로를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만큼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언제’ 자신이 다른 제자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까?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한 후입니다. 본문 61절, 62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 하니라.” 베드로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후 심히 통곡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그가 통곡했을까요? 그가 맹세한 대로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고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즉 주님께서 다 버리고 도망한다고 말씀하셨을 때에 자기는 끝까지 주님을 따르겠다고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이 맹세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베드로는 무엇을 깨달았을까요? 다른 제자들과 자신이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것을 통하여 그들과 다른 자가 아니라 똑같은 자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즉 자신도 다른 제자들처럼 넘어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자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이 생각한 대로 되지 않을 때는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깨닫는 때입니다.
    혹 다른 사람보다 능력이 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아 낙심하고 있습니까? 열심을 일하지만 대가는 시원치 않아 고민하고 있습니까? 소원하는 일이 뜻대로 성취되지 않아 절망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은 실패같이 보이지만 실패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때는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고 무능한 지를 깨닫는 축복의 때입니다. 겉으로 보면 베드로가 주님을 배신한 것은 신앙의 큰 실패였지만 그것을 통하여 얻은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성공으로 나가는 지름길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베드로의 넘어짐을 실패가 아니라 축복이라고 할까요? 세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로, 실패로 연약함을 깨닫게 되면 주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록펠러가 세계에서 가장 부자였다는 것은 알지만 그가 어떤 과정을 거쳐 하나님께 매어 달리게 되었고 세계적인 거부가 되었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록펠러는 53세에 억만 장자가 되어 세계 최대의 부호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알로페키아(Alopecia)라는 탈모증 비슷한 병으로 머리카락이 빠지고, 눈썹도 빠지고, 몸도 초췌하게 말라가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록펠러는 의사로 부터 1년을 넘기기 어려울 것 같다는 결정적인 말을 들었습니다. 53세, 한참 일할 수 있는 나이에 그것도 억만 장자가 이제 시한부 인생을 사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의사의 말을 듣고서 그날 밤 록펠러는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괴로워했습니다. 당시는 사업이 너무나 잘되어 어떤 날은 하루에 100만 달러를 벌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점점 죽을 날이 가까오는 데 하루에 100만 달러가 아니라 1천만 달러를 번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음식을 먹지도 못하고 잠을 자지도 못하고 고통의 늪에 빠져있었습니다. “도대체 내가 소유한 이 많은 재산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는 밤새도록 괴로워하다가 갑자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돈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리고 나서 침대 곁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날 밤, 록펠러는 기도와 함께 새벽을 맞이했고 그의 인생은 그 순간부터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98세까지 살았습니다. 만일 그가 알로페키아라는 탈모증으로 자신의 연약함과 무능함을 겪지 않았다면 하나님께 무릎을 꿇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은 변화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은 문제가 없으면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이는 마치 아이가 배가 고프거나 아프지 않으면 부모를 찾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무능함을 깨달아야 하나님을 찾습니다.
    베드로는 원래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조차 기도하다가 중도에 졸다가 잠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기도의 사람으로 바뀌었을까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실패를 통하여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은 후 기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밷전 4:7)고 권면한 것은 바로 이런 아픔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이 동생을 아벨을 죽이는 비참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 사건 이후 하나님께서 셋이라는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 셋이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비로소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에노스’를 낳았을 때에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말씀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에노스’라는 이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에노스’는 ‘연약함’이라는 뜻입니다. 즉 사람들이 연약함을 깨닫기 시작하자 비로소 기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실패를 통하여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게 되므로 실패가 축복인 것입니다.

    둘째로, 실패로 연약함을 깨닫게 되면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 누가복음 22장 61절을 읽겠습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베드로가 부인한 후 예수께서 베드로를 ‘보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주님께서 어떤 눈길로 보셨을까요? 경멸과 저주의 눈길이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에 사용된 “보시니”라는 동사는 “이해하기 위해 생각하면서 본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자신을 부인한 베드로를 바라보시는 눈길은 용서의 눈길이었고, 동정의 눈길이었고, 불쌍히 여기는 눈길이었습니다. “베드로야! 그러니까 절대 맹세하지마! 넌 연약한 존재야! 쉽게 흔들리고, 쉽게 넘어지는 사람이야”
    그런데 주님께서 어떻게 자신을 부인하신 베드로를 긍휼히 여기실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히브리서 4장 15-16절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경험하셨기에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실수와 잘못에 대해 관대하지 못하고 허물을 보면 감싸주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지만 실패를 통하여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다른 사람을 긍휼이 여기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지를 깨닫는 것과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것은 비례합니다. 우리 모두는 육신을 가졌기에 깨어지기 쉽고 연약한 자들입니다. 이를 깨닫고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남편도 연약한 사람이고, 아내도 연약한 사람이고, 부모도 연약한 사람이고, 목사도 연약한 사람이고, 전도사도 연약한 사람이고, 장로도 연약한 사람이고, 권사도 연약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서로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셋째로, 실패로 연약함을 깨닫게 되면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실패를 맛보기 전까지는 자신의 힘으로 강해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배신한 것을 계기로 그것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그의 힘으로는 자신이 내뱉은 말도 지킬 수 없는 매우 연약한 자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실패를 인하여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강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라”(고후 12:10)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약할 때에 강해진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자신이 약할 때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강한 능력자로 바뀌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만일 그렇다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때는 가장 연약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 때에 예수님께서 강한 자가 되셔서 적들을 물리치시고 십자가에서 내려오셨어야 했습니다. 도대체 약할 때에 강해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강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약할 때에 강해진다는 것은 실패를 통하여 자신이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공급하는 힘으로 말씀에 순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무능함과 연약함을 깨달아야 주님을 의지할 수 있고 주님의 힘과 능력으로 말씀에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기위해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아야 하듯이, 말씀에 순종하는 강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자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다윗은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해 달라”(시 39:4)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왜 실패를 통하여 자신의 무능함과 연약함을 깨달아야 하는지를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무능함과 실패를 통하여 주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되고,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실패는 결코 실패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합력하여 선이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여러분의 실패가 영원한 성공으로 나가는 디딤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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