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상황에서도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행4장 13-22절 2018년 12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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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상황에서도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행4장 13-22절 2018년 12월 9일2018-12-09T10:22:57+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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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지난주에 베드로가 설교하다가 붙잡혔을 때에 제사장 문중이 모여 베드로에게 “네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행하였느냐”고 물었을 때에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었다”고 말한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 그렇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과 장차 천국에 들어갈 것만 확신해서는 안 됩니다. 날마다 삶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우리와 다르게 신앙생활을 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들은 두 가지 사실을 확신했을 뿐 아니라 날마다 삶속에서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사도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날마다 일어나면 3분복음메시지를 암송하도록 하고 주일예배시마다 이를 암송하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베드로가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자가 되신다고 담대히 말하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13절입니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그들이 가장 먼저 보인 반응은 이상히 여긴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베드로와 요한은 어부 출신입니다. 어부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일반적으로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선택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미 베드로와 요한이 학문이 없는 범인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설교를 하였을 뿐 아니라 담대히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이상히 여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도 만일 베드로와 요한이 설교하는 현장에 있었다면 동일한 반응을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들이 이상한 반응을 보인 것을 묵상하던 중 갑자기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과연 세상들이 우리를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마도 크게 두 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이라고 하는데 왜 자신들과 조금도 다른 것이 없을까? 다른 하나는 저 사람들은 왜 많은 돈과 시간을 교회에 바치고 있을까? 그런데 이런 이유로 세상 사람이 우리를 이상하게 보면 안 됩니다. 그런 이유로 우리를 이상히 여긴다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려운 상황인데도 구원받은 감격과 기쁨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할 때에 이를 이상하게 여기고 우리를 자신과는 다르다고 생각해야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이상하게 여기면서 한 말이 무엇입니까? 15-18절을 읽습니다.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베드로와 요한을 이상히 생각하고 그들을 공회에서 나가라고 명령하면서 그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행한 표적이 더 이상 민간에 퍼지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들이 두 눈으로 앉은뱅이가 정상인이 된 것을 똑똑히 보고서도 더 이상 예수의 이름으로 아무 것도 말하거나 가르치지 말라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베드로와 요한이 그런 기적이 일어난 원인이 예수의 이름을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습니까? 거짓 메시아로 생각하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일 정도로 증오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버젓이 예수의 이름으로 그런 기적이 일어났다고 가르친다면 자신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한 것이 잘못된 것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에게 일어난 기적을 보고서도 예수님에 대한 생각을 바꾸지 않는 것을 보면서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생각이 바뀐다는 것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사실을 마음에 새기고 비신자에게 전도할 때나 기신자를 양육할 때에 이를 적용해야 합니다. 첫째로, 비신자일 경우입니다. 그들이 한두 번 전도해서 마음을 열지 않는다고 쉽게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쉽게 믿은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따라서 한두 번 시도하고서 상대방이 핍박을 하거나 관심이 없다고 쉽게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로, 기신자를 양육할 경우입니다. 그들이 빨리 변하지 않는다고 크게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가르치면 쉽게 변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르쳤는데 빨리 변하지 않으면 쉽게 낙심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지위가 높다고, 자신이 상대방보다 잘 살기 때문에 자기가 하는 말을 쉽게 받아들인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지 않으면 할 수 없습니다. 왜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서 제자 삼으라’고 명령하시면서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는지 아십니까? 주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비신자를 구원할 수 없고 그들을 가르쳐 제자 삼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아무 것도 말하지 말라고 협박하자 베드로와 요한이 어떻게 했습니까? 19-20절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한마디로 제자들은 이런 위협에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담대히 복음을 전하겠다고 선포했습니다. 개가 짖어도 기차는 달리듯이 그들은 반대를 무릅쓰고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도대체 베드로와 요한이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힘과 용기는 어디서 나왔을까요?
    첫째로. 그들이 ‘하나님 앞에 있다’는 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9절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베드로와 요한은 사람들 앞에서 말했지만 ‘하나님 앞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있음을 인식하는 것을 ‘신전의식’을 갖는다고 말합니다. 이를 라틴어로는 ‘코람데오’라고 합니다. ‘코람데오’의 신앙을 가지면 담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과거에 베드로는 예수님과 같이 죽겠다고 장담했지만 예수께서 대제사장의 집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에 대제사장의 집 뜰의 한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불을 쪼이다가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저주까지 할 정도로 비겁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공회에 끌려가서 무수한 매를 맞고서도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코람데오의 신앙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자신의 생사권을 쥐고 있는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했어도 단호히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그녀 앞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자들도 당시 절대권력을 쥐었던 구교에 항거하여 종교개혁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루터가 웜스 회의에 끌려가면서 친구에게 “웜스 회의장 기왓장처럼 마귀가 많아도 나는 가리라”고 하고 말하고 종교개혁의 깃발을 높이 들 수 있었던 것은 “오, 하나님! 제가 여기 서 있습니다”라고 말했듯이, 신전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신전의식을 가지면 담대하게 될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있다고 생각하면 임마누엘의 신앙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데 무엇을 두렵겠습니까?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옳다고 생각하고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19절을 읽어보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누구의 말을 듣는 것이 옳은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옳다고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에 담대히 말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지만 왜 담대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은 아담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네가 이 동산에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산의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절대로 먹지 말아라 그러면 죽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뱀이 와서 하와에게 이렇게 유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네가 그 실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되기 때문이야. 한 번 먹어봐. 그러자 하와가 먼저 선악과를 먹고 아담에게 뱀이 한 말을 그대로 전해주었습니다. 아담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입장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뱀의 말에 순종을 했습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담대함이 없어졌고 두려움이 찾아왔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을 선택하려고 하다가도 두렵다는 생각이 들면 사람의 말을 듣습니다. 그래서 마귀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갖게 해서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과 담대함은 비례합니다. 말씀에 대한 순종이 깊고 넓을수록 담대함이 넓고 깊은 것입니다.

    셋째로,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20절을 다시 읽습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베드로와 요한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도대체 그들이 무엇을 보고 들었기에 이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을까요? 나면서부터 40년간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는 기적을 보았기 때문일까요? 물론 이것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매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것을 보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만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보고 들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보고 들었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그리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통하여 2천 년 전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을 보고 들었습니다. 따라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담대히 증거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해야 말은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모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보고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증거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성령의 충만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장 8절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와 요한도 예수님의 수제자로 그 누구보다도 가까이 지내며 수없이 많은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게 되자 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며 그의 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언제 그들이 담대히 복음을 증거했습니까? 그들이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임한 성령의 충만을 받은 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증언하면 핍박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핍박으로 끝나지 않고 금생과 내생에 하나님의 상으로 바뀝니다. 그러나 핍박받을 것을 두려워해서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복음을 전하므로 당하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당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초대교회가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을 받았지만 예루살렘에만 머물자 하나님께서 큰 박해를 통해서 그들을 흩어버리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집과 고향을 떠나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가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들이 삶의 터전을 버리고 흩어질 때 당한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고통을 당하기전에 보고 들은 것을 담대히 증거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21-22절을 살펴보고 마치겠습니다.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성전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거지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사십여 세에 고침을 받았습니다. 즉 40여 년간 비참한 사람이 고침을 받고 이제 마음껏 걷는 인생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구든지 이렇게 된 것을 보았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제사장 가문입니다. 즉 오늘날로 말하면 성직자 그룹입니다. 사실 제사장은 하나님의 전에서 녹을 먹고 일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 기적을 행한 베드로와 요한을 위협했을까요?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로, 제사장이라는 직분을 가졌지만 하나님과의 교통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과 사귐이 없이 직분과 전통과 경력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하나님의 뜻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기적을 행해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전과 다른 가르침이나 기적이 일어나면 대적하고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항상 교제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잘못을 지적해주시고 가르쳐주시기 때문에 기적을 하나님께서 하신 일로 깨닫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들의 마음이 높아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은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부모가 제사장이어야 하고 율법을 공부해야 하고 수련과정을 거쳐야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은 어부였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무식한 자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제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지식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즉 그들의 마음이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성경을 알아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하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고전 8:1).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이 다른 사람을 돕고 살리는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결코 교만하여 정죄하고 죽이는 지식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신앙의 경력으로 교만하지 말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다른 사람이 행한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이런저런 이유로 교만한 마음을 갖고 있으면 다른 사람이 행한 일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신교를 가리켜서 신교(新敎) 또는 개신교(改新敎) 혹은 개혁교회(改革敎會)라고도 부릅니다. 영어로는 Reformed Church라고도 하지만 대개 Protestant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Protestant란 Protest하는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즉 반항, 항거, 대항한다는 뜻에서 나온 말입니다. 중세 로마 카톨릭 교회의 그릇된 교리에 항거하였기 때문에 ‘반항자들’이라고 처음에는 좋지 못한 이름으로 불린 이름이 그 후로는 좋은 이름으로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우리는 종교개혁자들의 후예답게 잘못된 신앙에 대해 항거하고 담대히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세상을 거슬리는 것이고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묘지는 언제나 고요하며 무거운 침묵만 흐를 뿐입니다. 죽음이 언제 닥칠지 아무도 모릅니다. 살아있을 때에 핍박을 당해도 복음을 담대히 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이 게시글은 thechurch에 의해 1 year, 9 months 전에 수정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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