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울게 하지 말고 웃게 해야 합니다 눅가복음 19장 41-44 2017.12.24

//예수님을 울게 하지 말고 웃게 해야 합니다 눅가복음 19장 41-44 2017.12.24
예수님을 울게 하지 말고 웃게 해야 합니다 눅가복음 19장 41-44 2017.12.242018-12-03T23:38:35+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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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상에 살면서 다 눈물을 흘리고 살아갑니다. 태어날 때부터 시작하여 죽을 때까지 수 없이 많이 웁니다. 때로는 이별의 아픔으로 울기도 합니다. 때로는 원통해서 울기도 합니다. 때로는 감동적인 드라마를 보고 울기도 합니다. 때로는 기뻐서도 웁니다. 며칠 전 딸 전화를 받았는데 엉엉 울었습니다. 그 날이 시험 발표인 줄을 알고 있었기에 떨어져서 우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고 보니 합격해서 너무 기뻐서 운다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예수께서도 공생애 동안 우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세 번이나 우신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나사로의 죽음을 보시고 우셨습니다(요11:35). 둘째는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에 성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셋째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우셨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두 번째 우실 때의 상황과 첫 번째와 세 번째 우실 때의 상황은 전혀 다릅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는 모두 슬픈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신 때는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제자들은 나귀새끼의 안장에 자신들의 옷을 벗어 얹었고 무리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감람산에서 예루살렘까지 2km나 되는 길에 옷을 깔고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당장이라도 새 세상이 올 것 같은 흥분의 도가니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런 상황에서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루살렘 성은 인격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너’라는 2인칭 대명사를 7번이나 사용하면서 우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시다'(에클라우센)는 헬라어로 단순히 우는 정도가 아니라 슬프고 비통하여 통곡했다는 뜻입니다. 왜 예수께서 인격도 없는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그렇게 우셨을까요? 본문은 그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평화에 관한 일이 그들에게 숨겨졌기 때문입니다. 42절을 다시 읽습니다.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그들에게 숨겨진 ‘평화에 관한 일’이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과평화하는 일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평화를 이룰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죄 문제를 해결받지 않으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죄 문제를 해결하려면 누군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아담의 후손으로 죄인이므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대신 못 박히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즉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하나님과의 인류의 화목을 이루시기 위한 것인데 당시 이스라엘백성들은 이를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왜 그들이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까요? 본문은 그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42절을 다시 읽습니다.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네 눈에 숨겨졌다’는 말이 무슨 말씀입니까? 누군가가 이 사실을 숨기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이런 사실을 숨겼습니까?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이스라엘백성들이 평화에 관한 일을 알지 못한 것이 하나님의 책임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그들이 평화에 관한 일을 알지 못한 것을 인하여 우셨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말씀이 무슨 말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지금 네 눈에 숨겨졌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그런 사실을 숨기셨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에게 계속해서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아 결과적으로 그들이 알지 못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항상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비밀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계속해서 말씀하셨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 중에서 자신들이 듣고 싶은 말만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하여 메시아를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는 크게 두 종류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다윗과 같은 승승장구하는 메시아이고 다른 하나는 종처럼 고난받는 메시아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백성들은 정치적인 메시아를 보내주신다는 말만 받아들였지 고난받는 메시아를 보내주신다는 말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오셔서 갈릴리를 중심으로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좇아내시고, 오병이어의 기적 등을 행하시는 등 능력을 행하셨을 때는 메시아로 생각하고 호산나 라고 외치며 환영했지만,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로마군인인에게 잡혀서 빌라도 법정에 서자 돌변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선지자들을 보내시고 마지막으로 예수께서 오셨지만 잘못된 메시아관을 바꾸시지 않아 예수님을 고난받는 메시아로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을 보시며 우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당시 이스라엘백성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말씀하시지만 우리는 자신이 듣고자하는 말씀만 듣습니다. 하나님께서 ‘옛사람으로 살지 말고 새 사람으로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서 제자 삼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에서 복을 받고 성공한다는 말씀만 들으려고 하지 이런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계속 말씀하셔도 우리가 듣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도 이스라엘백성들처럼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물론 메시아를 영접하지 않는 것과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지 않음으로 당하는 심판은 전혀 다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계속해서 말씀하셔도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사실을 초대교회를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원수들까지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죽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제외한 곳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는 원수지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큰 박해를 통하여 그들을 흩어버리셨습니다. 그제야 그들이 이를 깨닫고 유다와 사마리아 땅끝으로 흩어져서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심판을 당하기 전, 주님께서 듣기 원하시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둘째로, 예루살렘 성에 임할 재앙 때문입니다. 43-44절을 읽습니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을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날이 이를지라’에서 ‘이른다’는 말은 ‘온다’는 뜻입니다. 여기 ‘날’은 이스라엘에 재앙이 임하는 날이 온다는 뜻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온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그들을 사면으로 가두고 그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에 메어치고 돌 위에 돌하나 남지 않고 무너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AD. 70년경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어떻게 예루살렘 성이 파멸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당시 역사가인 요세푸스에 의해 기록된 ‘유대전쟁사’에 아주 생생히 소개되어 있습니다. 당시 로마의 학정이 더해가자 유대인들은 66년 5월에 체계적인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로마는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 황제는 그의 아들 티투스(Titus) 장군을 통해서 로마의 정예부대를 보내서 예루살렘 성을 포위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로마에 항복하기를 거부했습니다. 항복하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예루살렘 성 안으로 아무것도 유입할 수 없게 되자 성안에서 기근이 발생했습니다. 하루에 수천 명씩 굶주림으로 쓰러지고 여인들은 자신의 아기를 잡아먹는 일까지 발생했습니다. 마침내 70년 8월 10일, 예루살렘 성전은 불에 탔고 무너졌습니다. 온통 성은 시체로 뒤덮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무너지라는 예언이 그대로 성취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로마군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지을 때에 금붙이를 사용한 것을 알고서 금붙이를 찾으려고 무너진 돌을 하나하나씩 다 뒤집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유대인들이 찾아가 기도를 드리는 ‘통곡의 벽’은 당시 로마 군인들이 기념으로 남겨 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 중에 열심당원들은 마사다로 후퇴하여 960명이 최후까지 버티다가 3년 후인 5월 더 이상 로마워 싸워서 이길 승산이 없자 그들의 손에 죽지 않겠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사건을 기하여 세계 전역으로 흩어졌으며(신 28:58~59; 64~67) 2000년 동안 집 잃은 나그네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렇게 비참하게 된 이유를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44절 다시 읽습니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을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네가 보살핌을 받는 날’을 NIV에서는 ‘하나님께서 오시는 그 시간’(the time of God′s coming to you)로 번역했고, 쉬운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찾아온 때’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구약성경은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신다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메시아의 동정녀 탄생은 700년 만에, 미가 선지자가 예언한 메시아의 베들레헴 탄생은 500년 만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갈 4:4)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당시 예수님이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임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아직도 메시아가 오실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때에 보내신 메시아를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른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입니다. 초림 시에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아 심판을 받았듯이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때를 준비하지 않으면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과 그 시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때가 언제 즈음인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복음이 온 땅에 전파되는 날 주님께서 다시 오십니다. 따라서 복음증거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증거하는 자에게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은 재앙의 날이 아니라 구원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우리는 주의 재림을 머리로 알지만 말고 그 날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우신 것과 관련하여 좀 더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이스라엘백성들이 재앙을 당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셔서 수없이 선지자를 보내서 말씀하셨지만 거절하고 결국 그의 아들까지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했기 때문입니다. “사슴 한 마리가 포수에게 쫓기다가 포도원에 들어가 몸을 숨겼습니다. 포수는 사슴을 찾지 못하고 지나쳐버렸습니다. 사슴은 포수가 이미 지나갔다고 생각해서 포도 잎을 아삭아삭 뜯어 먹었습니다. 그런데 포수가 이 소리를 듣고 포도 잎을 먹고 있는 사슴을 향해 총을 쏘았습니다. 사슴이 총에 맞아 죽어가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보호해 준 포도 잎을 뜯어먹었으니 죽어 마땅하지…”
    이스라엘백성들이 자신들을 구원하시려고 오신 예수님을 도리어 십자가에 못 박았기에 심판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그들을 향하여 우신 것을 통하여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큰 잘못을 해서 심판을 당할지라도 이를 기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잠언기자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할 자니라”(잠 17:5)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에게 해를 끼치고 악을 행한 자가 재앙을 당할 때에 마음속으로 잘 되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도리어 가슴 아파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므로 심판 받을 자들이 받을 재앙을 보고서 울어야 합니다. 이런 마음을 품는 자가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왜 예수께서 우셨는지 살펴보았습니다.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평화에 관한 일을 몰랐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날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두 가지와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보내신 메시아로 믿었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께서는 우리를 보시고 어떻게 하실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마냥 좋으셔서 웃으시기만 하실까요? 우리는 계속해서 말씀하시지만 불순종하고 있는 것을 찾아내서 정리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예수께서 웃으셨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온전히 순종하므로 예수님을 웃으시게 했다는 기록을 남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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