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영광스럽게 맞이합시다 눅 2:25-35 2015.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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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영광스럽게 맞이합시다 눅 2:25-35 2015. 6. 212018-12-03T22:50:32+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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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지난 주 할례와 정결예식를 통하여 크게 세 가지 질문을 던지고 답을 얻었습니다. 첫째로, 구약의 할례는 신약의 세례를 뜻하는데 과연 우리가 세례 받은 자답게 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지만 그에 따른 삶이 없으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형식화되고 종교화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께서 할례를 받으시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신 것처럼 세례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즉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죄에 익숙한 삶을 버리고 의에 익숙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둘째로, 정결의식을 할 때에 여아는 남아보다 두 배로 정결기간이 요구되는 것을 통하여 무엇을 깨달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죄를 고백하면 주님께서 용서해 주시지만 죄로 인한 고통은 지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죄 때문에는 지옥에 가지 않지만 이 땅에 사는 동안 죄로 인한 고통은 피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셋째로, 왜 예수께서 율법에 따라 할례와 정결예식을 받으셨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아래 있다는 것은 저주아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어떤 저주아래 있었습니까? 죄 때문에 고통당하고 죽어야 하고 죽은 다음에는 심판받아 지옥에 던져져 영원히 고통을 당해야 할 운명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율법을 지키시므로 이런 운명에서 건져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저주의 대상이 아니라 축복의 대상임을 알고 무시로 하나님께 나아가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을 영광가운데 맞이해요’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본문은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안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안는 영광을 얻었듯이 우리도 예수께서 재림 하실 때에 영광가운데 맞이할 수 있습니다. 누가는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어떻게 안을 수 있었는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첫째로, 시므온이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25절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극도로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방향 감각을 잃고 절망합니다. 아기예수께서 탄생하신 시대는 로마의 지배하에 살아가던 암울하던 시대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꿈을 잃고 절망가운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므온은 어떻게 했습니까? 의롭고 경건한 삶을 살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의롭다’는 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었다는 뜻이고 ‘경건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즉 시므온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기 힘을 몸부림을 쳤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므온을 본받아야 합니다. 세상살이가 힘들다고 먼저 하나님을 찾는 일을 포기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려고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마 6:33)고 말씀하셨습니다. 혹자는 먹고 살기도 힘든데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냐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어두울수록 빛나는 법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께서 탄생하신 시기는 악이 최고조로 달할 때였습니다. 400년간을 중간기 시대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계시가 끊어졌던 시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졌다는 것은 빛을 완전히 잃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런 시대에 탄생하시고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육신적으로 어려움에 처할수록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롭고 경건하게 사는 자를 귀히 여기시고 그런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시므온은 평범한 노인에 불과했지만 아기예수를 안는 영광을 얻은 것은 그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그분을 두려워하는 자세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요셉이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의롭고 경건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노아가 홍수 심판에서 구원 받을 수 있었던 것도 모든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에만 목숨을 걸고 있을 때에 120년 동안이나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방주를 준비하였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시므온이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25절을 다시 읽어보시겠습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성경은 시므온이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다는 말은 메시아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메시아가 오셔서 고통당하는 이스라엘을 위로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대로 아기 예수를 안는 영광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당시 시므온이 살던 시대는 로마가 통치하던 시대로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암담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메시아가 와서 그들을 구원한다는 것을 믿기란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시므온 그 약속을 믿었습니다. 여러분은 무슨 소망으로 살아가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는 약속을 붙잡고 살아가기에 소망이 넘쳐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주님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되기 때문입니다. 시므온을 보면서 과연 우리에게 주님의 재림 약속을 믿는 믿음이 있는지 점점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신다는 약속을 놓치는 순간 우리는 육적인 사람으로 추락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그분의 위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을 붙잡고 다시 오심을 간절히 사모하는 자를 친히 위로해주십니다.

    셋째로, 시므온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25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25절). 성령께서 시므온 위에 계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단순히 위치적으로 성령께서 시므온의 머리 위에 계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럼 어떤 뜻일까요? 26절과 27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의 지시를 받았고’(26절), ‘성령의 감동을 받아’(27절) 한 마디로 시므온이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안는 영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성령의 인도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성령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시대 이전의 사람보다도 성령과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깊은 고민이 시작되었고 시므온이 어떻게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아갔는지를 주의 깊게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그가 어떻게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본문 25-26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 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우리글성경이나 영어성경이나 겉으로 보기에는 시므온이 의롭고 경건하고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다는 것과 그 위에 성령이 계셨다는 것과의 관계가 원인 결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므온이 성령의 인도를 받은 것이 그가 의롭고 경건하고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린 결과로 보기 힘든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둘의 관계가 무관하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내린 결론이 있습니다. 시므온이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을 산 것과 그가 의롭고 경건하고,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린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시므온이 의롭고 경건하게 살고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삶을 살았기에 그가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구하지만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삶에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는 약속을 붙잡고 살아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의롭게 경건하게 살고 예수의 재림 약속을 붙잡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결코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디 쉽습니까? 자신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돌이키므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29절 부터는 아기예수를 안은 후 시므온이 고백한 말입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시므온은 하나님을 “주재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므온이 하나님을 주재라고 말한 것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주재란 천지를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절대 주권자란 뜻입니다. 그런데 시므온이 살고 있던 때는 가이사 아구스도가 천하를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아구스도 황제의 말 한 마디에 인생이 좌우되는 시대였습니다. 세상이 온통 아구스도의 세상 같이 보였습니다. 그의 뜻과 생각에 의해 세상만사가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시므온이 하나님을 주재라고 한 것은 황제가 절대 주관자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절대주권자라는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강하신 분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뜻이라면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돈보다 하나님이 먼저 보이고 돈보다 하나님이 크게 보이고 세상일 보다 주님의 일이 더 크게 보이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시므온은 하나님을 향하여 ‘주재여’라고 한 후 “종을 평안히 놓아주신다”고 했습니다. 시므온이 이렇게 말한 것은 팔에 안긴 아기 예수를 통해 펼치실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기 때문에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고백입니다. 아기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다는 말은 아기예수가 구원자이심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구원자이십니다. 평소 자주 말씀드리지만 예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셨다는 것은 세 가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첫째로,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위치적 구원’이라고 합니다. 둘째로, 이 세상에서 어떤 문제를 만나도 기도하면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구원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구원이기 때문에 ‘경험적인 구원’이라고 합니다. 셋째로, 장차 죽으면 천국에 입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구원은 종말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종말적 구원’이라고 합니다. 시므온은 아기예수가 이렇게 구원을 베푸실 구원자이심을 알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단지 예수님을 가슴에 안은 정도가 아닙니다. 그분을 마음에 모시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는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모두 순교하였던 것은 예수께서 구원자이심을 온전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자는 오직 예수 한 분만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그분 이외의 것을 얻지 못한 것으로 마음의 평안을 잃으면 안 됩니다. 예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고 하신 것입니다. 십일조를 내지 않거나 주일성수를 하지 않느느 것만 죄가 아닙니다. 주님의 모든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주님은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평안을 주시면서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구원자이심을 믿고 이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끝으로 시므온은 예수님의 역할에 대해 말합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우리는 이 예언을 통하여 예수께서 어떤 분으로 세우심을 입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인생들의 패하고 흥함의 원인이 됩니다.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라는 말은 사람이 흥하고 패하는 것이 예수님께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구원과 멸망의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9장 33절을 보십시오. “…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 예수님은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는 귀한 보배가 되지만 영접치 않는 자에게는 부딪히는 돌, 거치는 반석이 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을 수도 있고 또 예수님 때문에 멸망 받을 수도 있습니다. ‘구원이냐 멸망이냐? 인생의 승리냐 패배냐?’ 는 전적으로 예수님께 대한 관계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생명의 구주로 영접하면 구원을 받고 믿음으로 살면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지만, 예수님을 배척하고 믿지 않으면 장차 지옥에 던져져 고통을 당하고 영원히 패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됩니다. 예수께서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신다는 뜻은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그 몸으로 담당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높이 달리신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높이 달리시므로 저주와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되셨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머리를 흔들며 욕을 하고 십자가의 강도도 함께 욕하였습니다. 왜 예수께서 이런 수모를 당하셨습니까? 그것은 예수께서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서입니다(벧전 2:24).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시고 조롱과 멸시를 당하셨던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시므온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관계를 바르게 맺고 살므로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을 살았고 결국은 아기 예수를 안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우리도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을 살므로 재림하시는 주님을 영광 중에 뵈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아기 예수를 안는 정도가 아니라 마음에 모시고 사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 한 분만으로 만족과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또 예수께서는 우리의 성공과 실패를 쥐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분을 믿으면 구원 받고 영생을 누리지만 그분을 믿지 아니하면 지옥에 던져져 영원히 고통을 당해야 합니다. 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저주와 조롱을 당하시며 돌아가셨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관심이 십자가에 모아져야 합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십자가에 관심을 쏟는 삶을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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