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헌금이야기를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누가복음 21장 1-4절 2018.2.24

//예수께서 헌금이야기를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누가복음 21장 1-4절 2018.2.24
예수께서 헌금이야기를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누가복음 21장 1-4절 2018.2.242018-12-03T23:43:22+09:00

Home 게시판 주일설교 예수께서 헌금이야기를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누가복음 21장 1-4절 2018.2.24

1 글 보임 - 1 에서 1 까지 (총 1 중에서)
  • 글쓴이
  • thechurch
    키 마스터
    Post count: 355

    한 가지 질문부터 하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예수께서 우리가 드리는 헌금에 관심을 갖고 계실까요? 안 갖고 계실까요? 혹자는 예수께서 우리가 드리는 헌금에 관심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2절을 다시 읽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함에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예수께서 부자들과 가난한 자들이 어떻게 헌금하는지를 각각 주목해 ‘보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평행 구절인 마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막 12:41)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보실새’가 헬라어(에쎄오레이)로 미완료 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주의 깊게 계속 헌금함을 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께서 의도를 가지시고 부자와 가난한 과부가 어떻게 헌금하는지를 보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주님께서 우리가 드리는 헌금에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우리가 드리는 헌금에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께서 우리가 드리는 헌금에 관심을 가지고 계실까요?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헌금은 그 사람의 믿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돈 없이는 살 수 없는데 그것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믿음이 있다는 것을 반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돈이 얼마나 힘이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돈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을 같이 읽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예수께서 재물을 하나님과 동격의 자리에 놓고 비교하실 정도로 재물의 힘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재물은 보통 힘이 센 것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원자와 주님으로 고백하지만 실제로 삶 속에서는 돈을 구원자로 섬길 정도로 돈은 막강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돈 앞에서는 목사와 장로나 권사나 갓 믿은 새신자나 별 다르지 않습니다. 요즘 소위 목회를 성공했다고 하는 목회자들이 왜 세습 문제로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고 있습니까? 사실 교회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절대적입니다. 즉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즉 믿음으로 목회를 하였기 때문에 소위 목회에 성공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성장한 교회를 세습하는 것은 믿음에서 온 것이 아니라 목회자의 욕심에서 온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를 세습한다는 것은 가졌던 믿음을 잃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처럼 돈은 믿음을 한 순간에 무너뜨릴 정도로 막강한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헌금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끝까지 우리의 신앙을 무너뜨리는 돈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그런데 제가 초대교회를 연구하던 중 돈의 유혹을 물리치고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비법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사도행전 5장 42절을 통해서입니다.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이 말씀대로 훈련하면 돈이 구원자가 아니고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고 오직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초대교회에서 사도들이 성도들을 날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도록 훈련하자, 큰 박해로 흩어지는 상황에서도 살 궁리를 생각하지 않고 흩어져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떻게 그들이 흩어지는 상황에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날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고 전하는 훈련을 받으므로 믿음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도 날마다 3분복음메시지를 암송하고 온가족튼튼양육의 1과(지금 구원받아야 합니다)로 가르치는 훈련을 하면 가서 제자삼으라는 명령에 순종할 뿐 아니라 돈이 구원자가 아니라 예수께서 구원자이심을 온전히 믿고 돈에 무릎을 꿇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사람들이 헌금을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시다가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넣는 것을 보시고서 그가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많이 넣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가난한 과부가 부자보다 더 많이 헌금을 했다고 말씀하신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예수께서 우리가 드리는 헌금을 보시고 차등을 두신다는 것입니다. 혹자는 주님께서는 어떤 이유로든 차등을 두시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이곳 말고도 차등을 암시 하는 구절들이 여러 곳 있습니다. 세 곳만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마태복음 11장 11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주님께서 분명히 천국에서 동등하다고 하시지 않고 큰 자가 있고 작은 자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음은 마태복음 18장 1-4절을 읽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 누가 크니이까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여기서도 예수께서 천국에서 큰 자가 있고 작은 자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셋째로 요한계시록 20장 4절을 읽습니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롯 하니” 예수를 증언하고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하고 우상숭배를 하지 아니한 자들이 천국에서 천년 동안 왕 노릇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 자들이 왕 노릇한다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은 자들은 천국에서 왕 노릇 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천국에서 큰 자가 되기도 하고 작은 자가 되기도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차등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부자들과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었지만 부자들이 헌금한 내역은 밝히시지 않고 과부가 헌금한 내역은 밝히셨는데, 두 렙돈이었습니다. 두 렙돈은 오늘날로 얼마나 가치가 있을까요? ‘렙돈’은 예수님 당시 로마 제국의 서부지역에서는 사용되지 않고 동부 지역이었던 팔레스타인에서 통용되는 동전 중 가장 작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저자는 두 렙돈의 가치가 어느 정도 되는지를 서부에서 사용되던 화폐인 ‘고드란트’로 다시 언급했습니다(막 12:42). 한 마디로 두 렙돈은 한 고드란트와 맞먹는 가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렙돈’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화폐단위인 ‘데나리온’의 육십사 분의 일에 해당됩니다. 한 데나리온은 근로자의 하루 임금에 해당하는 돈이었습니다. 오늘날 하루 노동자의 품삯을 십만 원으로 잡는다면 그 당시의 한 렙돈은 약 천오백 원 정도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 렙돈이면 약 삼천 원 정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두렙돈을 어떻게 드렸다고 말씀하셨습니까? 누가복음 21장 4절을 읽습니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즉 이 여인이 드린 헌금은 단지 풍족한 데서 넣은 것이 아니라 생활비 전부를 드렸기 때문에 부자들보다 더 많이 드린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헌금을 판단하는 기준과 사람들이 판단하는 기준이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헌금액을 절대적으로 판단하지만 주님께서는 상대적으로 판단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들은 헌금액만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총재산을 고려하여 헌금을 판단하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A라는 사람은 매달 일 억을 벌어서 천만 원을 십일조를 드리고, B라는 사람은 백만 원을 벌어서 십만 원을 드린다고 합시다. 사람들은 천만 원을 드린 사람이 많이 드렸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똑같다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달란트비유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달란트 비유에는 세 종이 등장합니다. 한 종은 다섯 달란트를 받았고 다른 종은 두 달란트를 받았고, 또 다른 종은 한 달란트를 받았습니다. 종들이 주인에게 와서 셈을 할 때에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은 다섯 달란트를 내놓았고, 두 달란트를 받은 종은 두 달란트를 내놓았고,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한 달란트를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다섯 달란트를 받은 자나 두 달란트를 받은 자 모두에게 똑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라.” 우리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불공평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섯 달란트가 두 달란트보다 두배 반이나 많이 남겼는데 상을 똑같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주님께서 다섯 달란트를 남긴 자나 두 달란트를 받은 자에게 똑 같은 상을 주셨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누가복음 12장 40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 12:40). 즉 다섯 달란트를 남긴 자는 다섯 달란트를 받았기 때문이고, 두 달란트를 남긴 자는 두 달란트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부자가 많이 헌금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많이 주셨기 때문이고 가난한 과부가 적게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적게 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헌금의 자세를 바꿔야 합니다. 금액이 적다고 열등감을 가지거나 금액이 많다고 우월감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십일조로 만족하지 말고 그보다 더 많이 주님께 심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헌금 이야기를 하면 록펠러를 연상하지만 그보다 주님께 더 온전히 헌금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세계적인 치약 사업가로 크게 성공한 콜게이트입니다. 그는 가난하고 불행한 소년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중풍으로 몸을 움직일 수 없었고, 어머니는 폐결핵을 앓고 있습니다. 많은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했던 콜게이트는 성인이 되자 동네 어른을 찾아가 가난하고 배운 것도 없는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어린 콜게이트에게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만약에 네가 내 말을 따르면 반드시 물질의 복을 받게 될 것이다. 너는 하나님을 섬기며, 반드시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또한 네 소득의 십분의 일을 반드시 하나님께 바쳐라. 혹시 네가 돈을 많이 벌거나 높은 자리에 오른다 해도 항상 겸손히 섬기면 반드시 하나님의 복을 받을 것이다” 도시로 간 콜게이트는 양초공장에서 성실히 일했습니다. 그리고 주일에는 반드시 십일조를 드렸을 뿐 아니라 교회에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장 주인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평소 그 사장의 신임을 두텁게 받았던 터라 콜게이트가 공장을 이어받아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늘 수입의 10분의 1을 구별해 오른쪽 주머니에 넣어두어 정확한 십일조 생활을 했습니다. 수입이 늘어나자 10분의 5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어떤 때에는 수익금 전부를 하나님 사업이 바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한동안 그가 세운 회사가 세재판매 세계1위를 하기도 하고 그는 세계적인 재벌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왜 주님께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야기를 하셨느냐는 것입니다. 과연 헌금을 어떻게 드려야 가장 많이 드리는 것인지를 가르치시기 위해서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함에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당시 헌금을 드리는 사람이 수없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단 둘로만 구분을 합니다. 부자들과 가난한 과부입니다.
    따라서 누가는 이 이야기의 핵심을 ‘부자들과 가난한 과부’로 정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부자들은 사회의 특권층으로서 바리새인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당시 헌금함은 예루살렘 성전의 여인의 뜰에 있었습니다. 여인의 뜰은 약 1만 5천명의 예배자들이 모일 수 있는 매우 넓은 광장입니다. 사람들은 그 성전 뜰을 지나가면서 그 통에 예물을 넣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13군데 정도의 소바롯(연보궤)가 있었는데 헌금을 넣는 곳이 마치 나팔처럼 되어 있어서 나팔궤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당시에는 인쇄술이 없던 시대라서 지폐가 없고 모두 동전만 사용했는데 이 연보궤는 모두 놋쇠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동전을 넣으면 동전이 연보궤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납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헌금을 하는지 소리를 듣고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21장 1절을 원어로 보면 ‘많은 부자들이’ ‘많이 넣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많이’는 질적으로 많이 넣은 것이 아니라 양적으로 많이 넣었다는 뜻입니다. 즉, ‘Much’가 아니라 ‘Many’ 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리새인들은 많은 동전을 연보궤에 넣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계속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면 “야 저 사람 하나님께 헌금을 많이 하는구나”라고 생각하도록 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가난한 과부는 두 렙돈을 넣었기 때문에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들 중에서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넣은 것이 부자들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일까요? 단지 가난한 과부가 헌금을 많이 넣었다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을 비판하신 것입니다. 너희들이 헌금을 가장 많이 드렸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설교를 들으면서 어떻게 하면 헌금을 많이 드릴 것인지를 고민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헌금을 드리고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된다고 결단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우리의 시간과 물질과 모든 것을 드리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했던 것을 회개하고 오직 주님께 드리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남은 생애 오직 주님께만 집중하므로 주님 앞에 섰을 때에 가장 신앙생활을 잘했다고 칭찬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글 보임 - 1 에서 1 까지 (총 1 중에서)
  • 답변은 로그인 후 가능합니다.
책주문

게시판

최근 게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