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나귀새끼를 타신 의미를 새롭게 살피다 눅 19:28-40절 2017.12.17

//예수께서 나귀새끼를 타신 의미를 새롭게 살피다 눅 19:28-40절 2017.12.17
예수께서 나귀새끼를 타신 의미를 새롭게 살피다 눅 19:28-40절 2017.12.172018-12-03T23:38:11+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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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본문은 종려주일 때에 단골로 등장하는 본문입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이 아니지만 강해 순서에 따라 본문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사복음서 모두 기록하고 있듯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나귀새끼를 타신 것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본문을 중심으로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본문 28절은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이 말씀’은 무엇일까요? 지난주에 살펴본 말씀대로 ‘열 므나 비유’를 입니다. 우리가 살펴보았지만 열 므나 비유는 간단히 말해서 귀인이 먼 나라로 떠나면서 열 종을 불러서 각각 한 므나씩 주면서 장사하라고 한 후 곧 돌아와서 종들과 셈을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먼 나라로 간다는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승천하실 것을, 그리고 돌아와서 종들과 셈을 했다는 것은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각자가 행한 대로 심판하신다는 것을 각각 비유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열 므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우선 염두에 두신 것은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셔서 곧 죽으실 것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어떻게 가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앞서’ 가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성은 옛날 가나안 왕이 살았던 곳으로, 다윗이 중건하고, 그 이후로 이스라엘 민족의 중심적인 성이 되어왔습니다. 그래서 유다 나라 모든 선지자들은 이 성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곳이 온갖 죄악의 온상이 되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바로 그 성을 향하여 앞장서서 가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께서 죄악의 온상이 되어버린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앞장서서 올라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듭니까? 비장한 각오가 엿보이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앞서 가신 것은 단지 다른 사람들보다 앞에 서서 가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죽을 준비를 단단히 하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왜 죽을 각오를 단단히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셨습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생각하시고 결연히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부터 그분께서 어떻게 하셨는지에 관심을 갖고 그분의 가신 길을 본받을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어떻게 입성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나귀새끼를 타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께서 나귀새끼를 타신 것은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함께 스가랴 9장 9절을 읽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왜 스가랴 선지자는 예수께서 나귀새끼를 타신 것을 그분께서 겸손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할까요? 그것은 당시 왕은 나귀를 타지 않고 말을 탔는데 예수께서 만왕의 왕이신데도 나귀를 타신 것도 아니고 나귀새끼를 타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스스로 자신을 낮추셔서 나귀새끼를 타신 것을 보면서 우리도 스스로 낮아져야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우리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과 같이 낮아지셨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기독교 사상가 중에서 가장 유명한 어거스틴도 그리스도인의 세 가지 덕을 말하면서 “첫째가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나귀새끼를 타신 또 다른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스가랴 9장 9-10절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1320p).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9절은 예수께서 왕으로 오시는데 겸손하셔서 나귀새끼를 타신다는 것이고, 10절은 그 왕이 할 일이 무엇인지를 소개한 것입니다. 그런데 10절에서 ‘내가’는 ‘여호와 하나님’을 말하고 ‘그가’는 메시아를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과 전쟁하는 활을 끊고, 메시아를 통하여 이방 사람들에게 화평을 전하고 온 세상을 통치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왕이신 예수께서는 전쟁 무기를 사용하여 이 세상을 정복하지 않고 화평으로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게 되었습니까?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즉 십자가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께서 나귀새끼를 타신 것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과 사람이 일하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세상 나라는 육신의 힘과 능력으로 싸워서 이기는 자가 승리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십자가로 싸워서 이기는 자가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방법이 아니라 세상의 방법대로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과의 싸움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엡 6:12) 사람하고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면 원수 마귀에게 백전백패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과 싸워 이기는 길은 날마다 자신을 십자가에 죽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고 하신 것이고, 바울도 이 비밀을 알았기에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나귀를 어떻게 타시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예수께서 감람산 어귀에서 제자들을 보내시며 맞은편 마을에 가면 나귀 새끼가 있으니 풀어오라고 하시면서, 누가 뭐라고 말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가서 나귀의 주인에게 말하자 나귀를 가져가도록 허락하여서 타셨습니다(눅 19:29-34). 이를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을까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말씀에 순종하면 기적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귀새끼를 시장에 가서 돈을 주고 사오라고 하시지 않고 맞은 편 마을에 가서 매여있는 것을 풀어 끌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려면 적어도 두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첫째로, 나귀 주인이 예수께서 주시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또 그가 나귀새끼를 주님께 드릴 마음이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제자들이 이런 조건을 확인하고서 주인에게 가서 나귀새끼를 끌고 온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즉시 순종했습니다. 그러자 생면부지의 사람이 나귀새끼를 풀어가도록 하였습니다. 제자들이 나귀새끼를 예수님께로 끌고 가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지” 하며 스스로 놀랐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도 말씀에 순종하면 이루어질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어떻게 매달 서너 번씩이나 해외에 나가서 제자훈련을 하고, 국내 목회자와 선교사들에게 수백만원씩 선교비를 후원하고, 세계 곳곳에 훈련교재를 번역해서 무료로 보급을 할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가서 제자삼으라’고 말씀하라는 명령에 믿음으로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항상 기적 속에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세상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주인이 나귀새끼를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자 선뜻 내어주었던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가 나귀새끼의 진짜 주인이 주님이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소유가 다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께서 진짜 주인이시고 우리는 단지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면 무엇이든지 그분께 내어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목숨이든, 돈이든, 재능이든, 시간이든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께 쓰임을 받는다는 것은 보통 영광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한 나라의 국정을 위해서 대통령이 국무위원으로 임명을 해도 영광스러운데 만왕의 왕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쓰신다면 이보다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몇 해 전 전라도 광주에 있는 송정중앙교회에서 저녁에는 D3양육부흥회를 하고 낮에는 광주지역 목회자 세미나를 인도했습니다. 교회에서 호텔을 예약하려고 하자 그 교회 김기수 장로라는 분이 굳이 저를 자신의 집으로 모시겠다고 해서 그곳으로 갔습니다. 그분은 평생 금호타이어에 근무를 하셨는데 당시 은퇴하여 목조주택 사업을 새롭게 시작하였습니다. 얼마 전에 자신이 거할 목조 주택을 완공했는데 처음으로 주의 종을 모시게 되어 영광스럽다고 하면서 얼마나 기뻐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자신의 집에서 친히 식사를 준비해서 대접하고는 집회를 마치고 오려고 하는데 저에게 봉투를 건네주었는데 열어보니 이렇게 글이 쓰여 져 있었습니다. “저의 집에 머물러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는 모두 청지기입니다. 주님께서 요구하실 때에 드림으로 그분께 쓰임을 받는 영광을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실 때에 제자들과 무리들이 어떻게 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35-38절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서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님을 태웠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나귀새끼 위에는 예수님께서 앉으실 만한 안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리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서 감람산에서 예루살렘 성까지 2km 되는 길에 펼쳐 놓으며 큰 소리로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로다”(38절)라고 외쳤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께서 자신들의 소망을 이루어주실 수 있는 메시야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무리들이 무엇을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37절입니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그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수많은 기적들을 직접 목격했을 뿐 아니라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많이 들었습니다. 바로 얼마 전,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하신 것과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그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기에 충분했습니다. 이러한 기적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하도록 하는데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했던 무리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께서 그들이 바라던 메시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아이기를 바랐는데 아무 저항없이 로마 군인들에게 체포되었고 곧 십자가에 처형된다는 소문이 떠돌아다녔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단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메시아로 믿고 따르는 자는 문제가 해결될 때는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충성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갑자기 돌변합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어떤 메시아입니까? 단지 각종 문제에서 해결해주시는 메시아입니까? 아니면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인생의 주인이신 메시아입니까?

    그런데 이를 지켜보던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39절입니다.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왜 무리들은 예수님을 열렬하게 환영했는데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했을까요? 예수께서 왕으로 오신다면 말을 타고 와야 하는데 나귀도 아닌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가랴 9장 9절은 메시아가 어떻게 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왕이 말을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지 않고 나귀새끼를 타고 오신다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이 이런 이유로 이렇게 행동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지만 자기 입맛에 맞게 취사선택해서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바리새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큰 어려움에 봉착해 있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입맛에 맞게 믿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기복신앙의 터 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은 신앙생활을 잘하면 물질의 복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만 가르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 배만 채우려고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해야 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나귀새끼를 타신 것과 관련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결단할 시간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주께서 주인이심을 인정하고 여러분의 모든 것을 그분께 드리기로 작정하시겠습니까? 주님께서 겸손하셨기에 나귀새끼를 타신 것처럼 겸손하기로 결단하시겠습니까? 우리의 방법을 버리고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방법대로 살아가시기로 결단하십니까? 이런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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