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려, 하지 말아야 할 이유 있습니다. 마6장 25-32절 2013.2.3

//염려, 하지 말아야 할 이유 있습니다. 마6장 25-32절 2013.2.3
염려, 하지 말아야 할 이유 있습니다. 마6장 25-32절 2013.2.32018-12-03T20:21:50+09:00

Home 게시판 주일설교 염려, 하지 말아야 할 이유 있습니다. 마6장 25-32절 2013.2.3

1 글 보임 - 1 에서 1 까지 (총 1 중에서)
  • 글쓴이
  • thechurch
    키 마스터
    Post count: 349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염려’라는 단어가 몇 번이나 나오는지 아십니까? 자그마치 네 번이나 나옵니다. 루마니아 공산치하 시절 많은 박해를 받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리차드 범부란트’ 목사님이 있습니다. 몇 해 전에 우리나라에도 온 적이 있지만 그가 박해 중에도 성경을 꾸준히 읽었는데 어느 날은 유독 ‘염려하지 말라’라는 구절이 눈에 뜨이더랍니다. 그래서 도대체 성경에 이 단어가 몇 번이나 나오는지 세어 보았더니 365회나 나오더랍니다. 그래서 그는 365일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알고 염려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성경에 자주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이 등장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세상에서 사는 동안 염려와 무관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여러분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을 드리지만 솔직히 말해서 염려할 때도 있습니다. 사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당시 유대나라는 로마의 지배하에 식민지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끼니를 잇지 못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였고 죽지 못해서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들은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예수께서 염려할 수밖에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염려하지 말아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알기 전, 먼저 염려가 무슨 뜻인지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염려’란 헬라어로 ‘메림나오’라고 합니다. 이 말은 ‘나누다’라는 뜻을 가진 ‘메리조’라는 동사에서 왔습니다. 즉 염려는 마음이 나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장가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고전7:33)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염려는 우리의 마음을 세상에 빼앗겨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단순히 무엇을 선택하기 전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것은 염려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점심시간에 어떤 메뉴를 먹을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은 염려가 아닙니다. 또 우리가 장차 무엇을 해서 먹고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는 것도 염려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진로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하고 생각하는 것은 염려가 아닙니다. 단지 그것을 너무 지나치게 생각하여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면 그것이 염려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비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고 말씀하셨습니다(25절).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육체의 생명을 주셨는데 그 생명에 필요한 모든 것, 즉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주시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귀한 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이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미리 염려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예비해 놓으셨음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크게 2가지를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통해서 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낳기 전에 자녀들이 쓸 것을 모두 다 예비해 놓습니다. 그래서 갓난아이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떻게 살 것인지 염려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기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다른 하나는 창조의 순서를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창조사역을 하셨습니다. 첫째 날은 빛을 창조하셨고, 둘째날에는 하늘을 창조하셨고, 셋째날은 바다, 풀, 채소, 나무 등을 창조하셨고, 넷째날은 해와 달과 별을 창조하셨고, 다섯째 날은 어류와 조류를 창조하셨고, 여섯째날은 짐승과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즉 모든 것을 다 창조하신 다음에야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시기전에 모든 것을 준비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을 먹을 것인가 입을 것인가 마실 것인가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무엇을 먹어야 하고 무엇을 마셔야 하고 무엇을 입어햐 할지를 염려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몫이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즉 하나님께서 염려하셔야 할 일이지 우리가 염려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호와 이레’라는 단어를 알고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아십니까?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가서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번제로 드리려면 죽여서 각을 떠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짐승이 아닌 자기 아들을 그것도 100세에 얻은 자식을 번제로 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른 아침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제단을 쌓고 나무 위에 아들을 결박하여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고 하자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1-12). 아브라함이 그 음성을 듣고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수풀에 걸려 있는 것을 보고서 그것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서 그가 한 말이 ‘여호와 이레’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시고 준비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스라엘백성들은 애굽에서 400년간 종살이를 하다가 해방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여행 중이라 광야에서 농사를 지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먹고 살았습니까?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그들이 여행 중이라 우물을 팔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물을 마실 수 있었습니까? 반석에서 물을 나오게 하셔서 마시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준비를 해서 광야 40년간을 살아간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준비하셨고 이스라엘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을 누렸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이스라엘백성들이 걸어갔던 광야와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도 이스라엘백성들과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것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어떤 일을 만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예비해 놓으셨기 때문에 염려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필요한 것만 우리를 위해 예비해 놓지 않으셨습니다. 죽은 후까지도 우리를 위해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이 믿음이 가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 내길 예배하시니 참 감사합니다.”

     

      둘째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31-3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신 것 때문에 염려하지 말아야 할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말씀 한 마디로 창조하신 전능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어떤 일을 만나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자기의 진짜 아버지이심을 믿는다면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아버지가 돈이 많고 권력이 있으면 웬만한 사고를 쳐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이 세상을 말씀 한 마디로 만드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버지이신데 염려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염려하는 것은 진짜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로 온전히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시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종종 책망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왜 제자들이 예수님께 책망을 받았습니까? 그들이 예수님을 그토록 오랫동안 따라다녔지만 예수님이 진짜 누구신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저런 일로 염려하는 것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머리로는 아버지로 이해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굳게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아버지이심을 굳게 믿는 믿음을 선물로 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스라엘의 매나헴 베긴 수상이 재임 시에 미국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미국 대통령이었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그를 환대하여 맞이했습니다. 백악관 집무실에 들어선 베긴 수상의 첫눈에 뜨인 것은 방 안에 있는 커다란 테이블 한 가운데에 있는 세 대의 전화기였습니다. 베긴 수상이 레이건 대통령에게 물었습니다. “이 전화기 세 대는 어디에 쓰는 겁니까?” 그러자 레이건 대통령이 어깨에 힘을 주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 백색전화기는 행정부로 통하는 공무용 전화이고, 이쪽 빨간색 전화기는 러시아와 직결되어 있는 비상전화이고, 그 옆의 황금색 전화기 하나님과 통화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베긴 수상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하나님과 통화할 때 통화료를 얼마나 지불합니까?” 그러자 레이건 대통령은 빙그레 웃으면서 “만 달러요.”라고 했습니다. 그 후 레이건 대통령이 베긴 수상의 초청으로 이스라엘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베긴 수상의 집무실에 들어갔더니 거기에도 역시 세 대의 전화기가 놓여 있었습니다. 레이건 대통령이 베긴 수상에게 물었습니다. “세 대의 전화기는 각각 어디에 쓰는 겁니까?” 그러자 베긴 수상은 “이 백색 전화기는 국회의사당하고 연결된 공무용 전화이고, 가운데 있는 빨간색 전화기는 이집트와 연결된 비상전화이고, 이 노란 것은 하나님과 통화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레이건 대통령이 베긴 수상에게 “여기서는 하나님과 통화할 때 얼마나 내십니까?” 베긴 수상이 빙그레 웃으며 “여기서는 15센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레이건이 깜짝놀라며 “아니, 어떻게 그렇게 쌉니까?”라고 묻자 베긴 수상이 아주 중요한 대답을 했습니다. “이곳은 하나님과 가까이 있어 하나님과 통화할 때 국내 전화료를 지불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베긴 수상이 “자신들은 하나님의 선민이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라는 것을 은근히 자랑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부자지간입니다. 우리는 이것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어떤 일을 만나도 하나님께서 해결해주실 것을 믿고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로 염려는 백해무익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염려한다고 그 키를 한 자라도 크게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27절). 어디 키 뿐입니까? 우리가 염려한다고 좋은 쪽으로 플러스가 되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염려는 긍정적인 변화가 아니라 오히려 부정적인 변화만 불러옵니다. 한 마디로 염려는 우리에게 백해무익합니다. 무엇보다도 염려는 건강을 해칩니다. 많은 질병이 염려에서 온다는 것은 의학적으로 이미 검증된 사실입니다. 염려는 즐거움을 사라지게 하여 행복을 빼앗아갑니다. 염려를 자주하는 사람치고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염려는 근심, 걱정, 불안, 초조 절망을 불러와 심리적인 파탄을 불러옵니다. 염려는 의욕과 자신감을 상실케 하므로 자주 염려하는 사람은 일의 성취도가 매우 낮습니다.

      우리는 쓸데 없는 것을 걱정하는 것을 기우라고 합니다. 중국의 기(杞)나라에 염려하고 걱정하는 바람에 밥도 먹지 못하고, 잠도 자지 못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걱정을 했는지 아십니까? “하늘이 무너지면 어떻게 하나, 땅이 꺼져버리면 어떻게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염려하고 걱정할 내용입니까? 아닙니다. 그래서 이렇게 쓸데없는 것을 염려하고 걱정한다는 뜻으로 기우(杞憂)라는 말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나 杞나라의 어떤 사람만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쓸데 없는 걱정을 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노만 빈센트 필 박사는 ‘사람이 걱정 하는 일 중에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이 40%,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한 걱정이 30%,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이 26%, 우리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에 대한 걱정이 4%’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염려하는 96%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염려해야 할 4%도 우리가 염려한다고 해결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염려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아더 랭크라는 영국의 실업가가 걱정거리가 생길 때마다 걱정거리가 생긴 날짜와 내용을 기록해 염려상자에 넣어 두고는 매주 수요일을 염려의 날로 정해 상자 속의 메모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수요일, 그는 특별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걱정거리가 적힌 메모지를 상자에 넣을 당시만 해도 대단히 큰 문젯거리였는데, 그것을 꺼내 다시 읽어볼 즈음에는 이미 큰 문제가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또한 더 중요한 사실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정말 고민하며 염려할 만한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조엘 오스틴(Joel Osteen)이 저술한 책 가운데 ‘긍정의 힘’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번역이 되어 비신자들에게도 많이 읽힌 책입니다. 그 책에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철도회사에서 일을 하는데 성실할 뿐아니라 열심히 일하고, 동료들과의 관계도 좋았습니다. 그런데 단점이 하나 있다면 늘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불행이 닥쳐올지 염려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어느 날, 퇴근시간이 다 된 무렵에 빈 냉동열차 안에서 일하다가 그만 문이 닫혀 버렸습니다. 안에서는 열지 못하고 밖에서 열어야 하는데, 그만 문이 닫혀버린 것입니다. 아무리 소리치고 문을 두드려도 사람들이 모두 퇴근하고 난 후라 그를 도우러 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그 냉동열차에 혼자 갇혀서 염려하기 시작했습니다. ‘냉동열차에 갇혔으니까 이제 여기서 얼어 죽고 말겠구나. 밤새 견딜 수 없을 거야. 점점 산소가 희박해져서 숨을 쉴 수가 없을거야.‘라고 점점 최악의 상황만을 생각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더욱 춥고 숨이 가빠졌습니다. 구석에 있는 낡은 마분지에다가 자기가 겪고 있는 상황들을 적었습니다. “너무 춥다. 점점 몸이 마비된다. 빨리 나가지 않으면 나의 마지막이 될지도 몰라.” 아침에 동료들이 출근해서 열차들을 점검하다가 냉동열차를 열어보고서 한쪽 구석에 웅크린 채로 죽어있는 그를 발견했습니다. 사망 원인을 알기 위해서 부검을 해보았더니 요인은 동사였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냉동열차에는 전원이 켜있지 않았기 때문에 차내가 춥지 않았습니다. 그가 왜 동사했습니까? 그것은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며 염려하다가 마음이 얼어붙고 몸도 얼어붙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염려는 사람에게 무익하고 해로운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염려하지 말아야 하는 할 세 가지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예비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염려는 백해무익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염려를 이길 수 없습니다. 염려를 이기기 위해서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즉 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예비해 놓으셨다는 것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시라는 것과 염려는 백해무익하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믿음을 가질 때에 쓸데 없는 염려에서 벗어나 소망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글 보임 - 1 에서 1 까지 (총 1 중에서)
  • 답변은 로그인 후 가능합니다.
책주문

게시판

최근 게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