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려는 상황이 아니고 믿음의 문제입니다. 누가복음 12장 22-34절 2017.1.22

//염려는 상황이 아니고 믿음의 문제입니다. 누가복음 12장 22-34절 2017.1.22
염려는 상황이 아니고 믿음의 문제입니다. 누가복음 12장 22-34절 2017.1.222018-12-03T23:20:19+09:00

Home 게시판 주일설교 염려는 상황이 아니고 믿음의 문제입니다. 누가복음 12장 22-34절 2017.1.22

1 글 보임 - 1 에서 1 까지 (총 1 중에서)
  • 글쓴이
  • thechurch
    키 마스터
    Post count: 364

    오늘 본문은 우리가 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상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께서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말씀을 누구에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22절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제자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제자가 12명을 말하는지, 70인을 말하는지, 예수님을 계속해서 따르는 자들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본문에서 말하는 제자들은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따르는 자들임에 틀림없습니다. 왜 예수께서 자신을 가까이 따라는 제자들에게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그들이 먹고 입는 문제로 염려하고 있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과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얼마든지 자신을 가까이 하는 자들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주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전혀 달랐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가까이 있었지만 먹고 입은 문제를 가지고 염려를 하고 있었습니다.
    왜 제자들은 예수님을 가까이 따르면서도 세상 사람들처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를 했을까요? 우리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그 이유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근본적으로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가까이서 따르고 있었지만 예수께서 누구신지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것을 알고 믿었더라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무슨 말입니까? 그는 하나님을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분이라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을 이렇게 믿는 믿음을 가지므로 염려에서 벗어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23절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예수께서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다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단순히 이런 사실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목숨을 주셨기에 그 목숨이 끊어지지 않도록 먹을 것을 주시고 몸을 주시고, 그 몸을 가릴 옷을 주시기 때문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를 통하여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아이를 낳으면 어떻게 합니까? 아이에게 젖을 먹입니다. 그리고 춥지 않도록 옷을 입힙니다. 이 과정에서 아이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갓난아이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전적으로 부모를 신뢰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자, 그러면 왜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의식주 문제로 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세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까마귀를 예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24-26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우리는 예수께서 까마귀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에 먼저 주목해야 합니다. 성경은 까마귀는 부정한 동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까마귀가 가까이 오면 손을 저어 멀리 가게 합니다. 가까이 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까마귀가 어떻게 살아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까마귀를 기르시기 때문에 살아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까마귀가 열심히 먹이를 먹기 때문에 살아간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께서 기르시기 때문에 까마귀가 살아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까마귀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먹여주신다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까마귀가 살아갈 수 있도록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셨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아주 친근한 새 중에 제비가 있습니다. 그런데 제비가 자기 새끼를 기르는데 하루에 몇 번이나 곤충을 잡아다 먹이는지 아십니까? 하루에 적어도 수놈과 암놈이 번갈아가면서 100번 이상을 먹인다고 합니다. 이렇게 3주간을 곤충을 잡아다 먹이면 제비가 날 수 있기에 그 때까지 제비 한 쌍이 새끼 한 마리를 키우려면 2,100번이나 곤충을 잡아다가 먹여야 합니다. 그런데 지구상에 제비가 한두 마리이겠습니까? 조류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지구상에는 조류가 약 1,000억 마리 정도가 산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많은 새들이 도대체 어떻게 살아갈까요? 그들이 공장을 짓고 가공식품을 만들어서 먹고 살아갑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먹을 곤충들을 이미 다 준비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새들이 아무 걱정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새들을 기르십니다. 우리는 새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대단한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물인 새조차도 기르시는데 택한 백성을 기르시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조금도 걱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는 예수께서 우리의 키를 예로 들어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5절입니다.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왜 예수께서 키를 예로 들어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염려한다고 키를 한 자라도 더 크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염려한다고 키를 자라게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염려하면 키가 성장하는데 방해가 됩니다. 따라서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단지 키 만이 아닙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가 염려를 해서 해결되는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에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염려가 도움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죄에 대한 염려입니다. 죄를 염려하면 죄를 짓지 않게 됩니다. 그 밖의 것은 염려를 해봤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염려는 우리의 믿음을 빼앗아가 버리고 우리를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저는 키가 적은 편에 속합니다. 키가 적은 데는 유전적인 요인도 있지만 한참 성장할 때에 역도를 한 것이 원인 중의 하나입니다. 저는 청소년 시절에 키에 대한 열등감으로 심적으로 고통을 많이 당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는 키를 좀 더 크게 보이기 위해 높은 구두를 신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열등감에서 자유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언제 이 문제를 해결 받았는지 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입니다. 예수를 만나고 나니까 중요하게 여겼던 외모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셋째로, 예수께서 백합화를 들어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27-28절입니다.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우리가 알다시피 솔로몬은 유대 역사상 가장 부귀영화를 누렸던 왕입니다. 그가 누린 영광은 얼마나 대단하였던지 영광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누렸던 영광이 아무리 대단하다 할지라도 들의 백합화의 아름다움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백합화의 영광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오늘은 꽃을 피어도 내일은 시들어서 불어 던져집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찮은 백합화도 아름답게 입히셨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입을 옷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는 것은 믿음이 적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왜 우리는 들의 백합화를 보면서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길가에서 백합화를 볼 수 없기 때문일까요? 그것은 들의 백합화를 하나님께서 기르시고 입히신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연(自然)이란 말은 ‘스스로 자, 그러할 연’입니다. 그래서 자연은 스스로 존재의 이유를 가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연세계조차도 친히 보살피고 계시기 때문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들의 백합화가 알아서 자라고 꽃을 피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시고 옷을 입혀주시기 때문에 그토록 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세 가지를 말씀하시고 염려하지 말아야 할 또 다른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29-30절입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염려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아시는데, 왜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도록 버려두시느냐는 것입니다. 육신의 부모는 자식이 어려운 일을 당하는 것을 보면 즉시 도와줍니다. 더군다나 갓난아이일 경우는 즉시 달려가서 도와줍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진짜 우리 아버지이신데 속히 해결해주시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훈련하시기 때문에 즉시 응답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련하시기 위해 일정기간 응답을 보류하시고 그 기간에 기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기간에 염려하지 말고, 못난 자아를 죽이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믿음을 키워야 합니다.

    이제 32-34절을 읽겠습니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이 말씀과 앞부분과 별로 상관이 없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문장의 구조를 살펴보십시오. 첫째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에 무서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소유를 팔아 구제하므로 천국에 보물을 쌓아두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우리의 보물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로 염려하는 것은 조금이라도 더 가지려고 하는데서 비롯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소유하는데 관심을 갖지 않고 구제를 하면 이는 하나님의 나라에 보물을 쌓는 것이기에 이 세상의 염려가 사라집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일로 염려하는 것은 우리가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지 않고 이 세상에 두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물질의 욕심을 버리고 구제에 힘쓰면 염려에서 벗어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설교를 마무리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염려가 떠나지 않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습니다. 오늘 이 질문에 답하고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염려는 헬라어로 ‘메림나오’라고 합니다. 이는 ‘나누다, 찢어지다’의 뜻을 가진 ‘메리조’와 마음의 뜻을 갖고 있는 ‘누스’의 합성어이기 때문에 ‘마음이 나뉘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염려를 하면 마음이 나뉘기 때문에 하나님을 온전히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나누게 하는 일을 누가 할까요? 우리 스스로 알아서 할까요? 물론 그런 측면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런데 염려의 배후에는 반드시 마귀가 있습니다. 마귀는 이간하고 나누는 일에 최고의 전문가입니다. 우리가 염려하고 싶지 않아도 항상 염려를 하게 되는 것은 마귀가 우리를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우리를 어떻게 공격하는지 압니까? 우는 사자가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듯이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 깨어 있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공격을 받아 염려하게 되는 것입니다. 염려의 배후에 마귀가 있음을 새삼 깨닫고 늘 깨어 기도하므로 마귀의 공격을 물리치므로 염려에서 자유케 되는 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글 보임 - 1 에서 1 까지 (총 1 중에서)
  • 답변은 로그인 후 가능합니다.
책주문

게시판

최근 게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