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는 영적인 스승입니다. 마 18장 1-10절 20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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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는 영적인 스승입니다. 마 18장 1-10절 2013.5.5.2018-12-03T20:29:13+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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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사회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난 18세기는 민중을 발견한 세기요, 19세기는 여성을 발견한 세기요, 20세기는 어린이를 발견한 세기요, 21세기는 노인을 발견하는 세기가 될 것이다.’ 매우 타당성이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특별히 20세기는 어린이를 발견한 세기라는 주장은 우리나라를 통해서 보더라도 매우 설득력이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있을 때까지만 해도 어린이라는 단어조차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어린이는 인격적으로 독립한 존재라기보다는 부모의 소유물로 취급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어린이를 ‘이놈저놈, 어린 것, 애새끼’ 등으로 불렀습니다. 그런데 일본에 유학 중이던 소파 방정환 선생님이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여 ‘어리신 이’라고 부르다가 1921년 최초로 ‘어린이’라는 단어가 생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미 2,000년 전에 어린이의 인격을 크게 존중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예수께서 어린이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셨는지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본문의 배경을 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어느 날 수제자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변화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곳에서 주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나고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지더니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대화를 하셨습니다. 수제자들이 그 장면을 목격하고서 가만히 있지를 않고 자신들이 본 것을 다른 제자들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곧 주님의 나라가 세워질 것이라는 꿈과 희망을 가지고 장차 그 나라에서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지에 대해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반석’이란 별명을 붙여주시고, 천국 열쇠를 주셨기 때문에 자신이 최고라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자신이 주님께 제일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제일 큰 자라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야고보는 자기 동생이 주님께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자신도 덩달아 큰 자라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또 마태는 자신이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세리직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기 때문에 자신이 최고라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안드레는 자기가 주님을 따른 최초의 제자이기 때문에 최고라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돈궤를 맡을 정도로 주님의 신뢰를 받았기 때문에 자신이 최고라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서로 논쟁을 했지만 결론이 나지 앉자 그들 중에 누군가가 우리끼리 이렇게 논쟁하지 말고 주님께 물어보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예수님! 천국에서 누가 큰 자입니까?”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제자들이 천국에서 가장 큰 자가 누구인지에 대해 다투는 모습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다른 사람들의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이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더 높아지기를 원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인류의 첫 조상 아담과 하와가 “네가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는 마귀의 말에 속아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입니다. 즉 최고가 되겠다고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의 후손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귀의 말대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같이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저주를 받아 땀을 흘리고 고통가운데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로 전락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을 최고라고 생각하는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 거짓의 아비인 마귀에게 붙잡혀 살았을 때에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제 우리는 자신을 낮추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자들이기 때문에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율법에 흠이 없을 정도로 가장 의롭게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혹 자신이 잘 났다고 생각하거나 대단한 자로 생각하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더 자신을 낮추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천국에서 누가 제일 큽니까?”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어떻게 하셨습니까? 먼저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셨습니다(2절). 왜 예수께서 어린 아이를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어린이에게 배울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린이는 우리가 가르쳐야만 하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배워야 할 영적인 스승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영국 시인 윌리암 워즈워즈는 ‘무지개’라는 시에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어린아이를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3절). 우리는 이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다시피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의 인격이나 행실에 달려 있지 않고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착하게 살거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오늘 말씀처럼 어린아이 같이 된다고 들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께서도 누구보다도 이런 사실을 잘 아시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실제로 우리가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 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즉 예수께서 과장법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과장법으로 말씀하신 곳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예를 하나만 들자면, 마태복음 7장 21절 말씀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면 과연 우리 중에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신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이 말씀을 어떤 의미로 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지 말고 천국의 백성답게 살아가라고 강조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께서 “누가 천국에서 큽니까?”는 제자들의 물음에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어린아이와 같은 자가 되어야지만 한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어린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을까요? 4절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그렇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춰야 우리가 천국에서 큰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과연 어린아이가 자신을 낮추냐는 것입니다. 낮추기는커녕 기회만 있으면 자기를 자랑하고 뽐냅니다. 여러분이 혹 자신을 낮추는 어린아이를 보시면 저에게 알려주십시요. 제가 찾아가서 머리를 조아리고 스승으로 모시겠습니다. 따라서 ‘어린아이같이 자신을 낮춘다’는 뜻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자신을 낮춘다는 것은 상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린아이가 주로 상대하는 대상이 누구입니까? 부모님입니다. 즉 어린아이 같이 자신을 낮춘다는 것은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자신을 낮추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린 아이가 부모에게 어떻게 자신을 낮춥니까? 부모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하고 죽기 살기로 매어달립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린아이 같이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는 말은 하나님 아버지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하고 온전히 주님께 매어달려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매달리는 자가 천국에서 가장 큰 자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천국에서 가장 큰 자는 자신의 무능함을 철저히 깨닫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과 예수님은 부자지간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셨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순종하신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하시자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를 지극히 높이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5-11)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절대적인 의존관계를 맺고 철저히 주님께 순종하는 자가 어린아이 같이 자신을 낮추는 자이고 천국에서 가장 큰 자인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에서 큰 자가 되는 것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에서 큰 자로 결정이 되면 그 상태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여 자신의 무능함을 온전히 깨닫고 하나님 아버지를 절대적으로 의지할 것을 결단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라고 말씀하신 후 곧이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5절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이 말씀이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의 이름으로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은 곧 예수님 자신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을 영접하듯이 어린 아이를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영접은 ‘맞아서 대접하다’는 뜻이기 때문에 아랫 사람이 윗 사람을 섬길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랫 사람이 윗 사람을 섬기지 윗 사람이 아랫 사람을 섬기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굉장히 어리둥절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부장적 사고로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이 그렇게 가슴에 와 닿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듯이 어린이를 영접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나라와 하나님의 나라가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보이는 것에 의하여 움직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해 움직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자는 세상 사람들처럼 눈에 보이는 것에 따라 움직이면 안 됩니다. 하찮은 것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겉으로만 사람을 평가하지 말고 깊이 숨어 있는 영혼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아직 구원받지 못한 영혼이라면 그가 부자든 가난한 자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고 전도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사람을 외모로 보고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약 2:1-5).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자들을 사랑하십니다. 소외된 자들에게 믿음을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소외층인 어린아이, 노인, 가난한 자들을 예수님을 대하듯이 대해야 합니다. 주님이 사랑하시는 자를 우리가 멸시하고 천대하는 것은 잘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소외된 자들에 대한 배려가 매우 약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런 삶이 없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고 실족하고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지난 주 조선일보에 가나안교회의 성도에 대한 기사가 났습니다. 그 교회 성도들이 50% 이상이 언젠가는 교회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말에 깜짝 놀라서 기사를 단숨에 읽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가나안교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교회들의 부정적인 면을 다룬 기사였습니다. 가나안교회라는 이름은 ‘교회 안 나가’를 거꾸로 한 것입니다. 즉 ‘안나가’를 거꾸로 하면 ‘가나안’입니다. 내용을 보면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가 다양하지만 주원인은 목회자와 성도들에게 실망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면 다시 돌아오겠다는 사람이 50% 이상이나 되었습니다. 교회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교회에 사랑이 없으면 더 이상 주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어떤 사랑입니까? 내리사랑입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믿은 성도는 새로운 성도를 섬겨야 하고 직분자는 직분을 받지 못한 자를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모든 직분은 섬기라고 주신 것이지 다른 사람위에 군림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직분을 계급으로 알고 섬기려고 하지 않고 섬김을 받으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상처를 받고 교회에 둥지를 틀지 못하고 실족하여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욱 더 사랑이 풍성한 교회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평소 성도들로부터 우리 교회 안금복 권찰님의 선행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자주 들었습니다. 그런데 금번에 심방하면서 제 눈으로 똑똑히 소외된 사람을 주의 사랑으로 돌봐주는 것을 목도하고서 마음이 흐뭇했습니다. 그분은 자신도 넉넉하게 살고 있지 않지만 주변의 노인들에게 반찬을 만들어 드리고, 청소를 해드리며,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는 등 주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대접하는 자들은 대부분 그가 베푼 사랑에 보답해 줄 수 없는 분들이었습니다.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사랑을 베푸는 것을 보면서 제 자신이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누군가를 실족시키면 어떻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까? 6-7절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다’는 희랍어로 ‘스칸달리조’라고 하는데 ‘다른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하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종종 ‘스캔들’이라는 말을 종종 듣는데 그것이 ‘스칸달리조’에서 나온 것입니다. 누군가를 넘어지게 하면 화를 당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사람들의 사형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국가에 반역했다든지 아니면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경우 처형하는 십자가형이고, 다른 하나는 부모를 죽였다든지 혹은 사회의 도덕을 문란케 하는 사람들에게 연자맷돌을 목에 메이고 바다에 수장시키는 형벌입니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연자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던져져 죽으면 그 영혼이 영원히 물 위에서 계속 떠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이 형벌을 가장 두렵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자가 받을 형벌이 이 형벌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만큼 다른 사람을 실족시키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실족시키는 것이 얼마나 큰 죄를 짓는 것인 줄 알고 함부로 말을 하여 상처를 입히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겸손히 주님을 잘 섬겨서 복을 받아야지 다른 사람위에 군림하여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실족시킴으로 화를 입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어린이는 어른들의 스승입니다. 우리는 어린 아이가 부모를 절대적으로 의지하듯이 우리도 주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므로 천국에서 가장 큰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린아이를 업신여기면 화가 있음을 깨닫게 모든 사람을 주님을 대하듯이 해야 합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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