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자를 도와줘야 할 자는 누구인가 눅10:25-37 2016.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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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자를 도와줘야 할 자는 누구인가 눅10:25-37 2016.9.252018-12-03T23:13:03+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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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율법사와 대화하신 내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고 되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율법사는 “네 마음과 힘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라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율법사가 다시 질문합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이 질문에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바로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라고 일컫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들에게 매를 맺고 옷이 벗겨지고 거의 죽은 채로 버려졌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세 종류의 사람이 그의 곁을 지나갑니다. 첫째는,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을 위하여 특별히 사명을 받은 자입니다. 제사장은 아론의 자손에 속한 레위족속이었지만 레위족속 모두가 제사장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둘째는, 레위인입니다. 레위인은 이스라엘의 12지파 중 다른 지파들을 대신하여 하나님에게 속한 업무를 수행하도록 사명을 받은 자입니다.(민수기 3:11~13, 8:16). 쉽게 말해서 제사장이 하나님께 제사를 잘 드리도록 돕는 자가 바로 레위인 입니다. 셋째는, 사마리아인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이스라엘의 옛 수도인 사마리아에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점령하여 혼혈정책을 썼기 때문에 사마리아 사람들의 피에 이방인의 피가 섞여서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멸시와 천대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 세 사람 중 강도 만난 사람은 제사장과 레위인이 아니라 당시 유대인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세 사람 중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하셨을까요? 말씀드린 대로 제사장과 레위인은 하나님의 일을 전문으로 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들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마음과 힘과 뜻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신의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당시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에만 관심을 갖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관심을 갖지 말고,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관심을 가지라고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우리가 돌아보아야 할 이웃이 누구인지를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강도만난 이웃을 사랑해야할 사람이 누구인지를 물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일을 위해 특별히 선택된 자는 당연히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시 제사장은 특별히 선택 받아 성전에서 죄인들을 위해 속죄의 제사를 드리고, 레위인은 제사장을 도우며 찬양하며 혹은 성전 문지기로 거룩한 일을 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을 존경하고 부러워했습니다. 시편 84편 10절을 통하여 이스라엘백성들이 성전에서 일하는 것을 얼마나 사모하고 부러워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따라서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당연히 이웃사랑을 실천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에만 관심을 갖고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 특권 때문에 교만해져서 돈과 힘이 있는 사람과만 가까이 지내고 힘없는 사람들은 짓밟고 무시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선한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여러분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저와 여러분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입니다.”(벧전 2:9).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고 왕 같은 제사장들이고 거룩한 나라이고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한 마디로 엄청난 특권을 가진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제사장과 레위인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특권을 가진 자들입니다. 구약 시대의 제사장은 하나님께 마음대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 때나 기도하고 싶으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특별한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양육청구권과 재산상속권을 갖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께 엄청난 은혜와 복을 받은 자들이기에 이웃을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한 동안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는 고귀한 지위에 있는 인사들은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도덕적 책무를 져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즉 세상적으로 지위가 높은 사람, 성공한 사람, 부를 가진 사람, 은혜를 받은 사람은 사회에 자신의 의무를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특권을 가졌기에 그것에 부응하는 의무를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은 누구일까요? 엄밀한 의미에서 이웃은 나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가리키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났다는 것은 인생에서 어려운 때를 맞이하여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하는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들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그 방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본문을 읽어서 알고 있지만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된 사람을 본 것은 사마리아인만이 아닙니다. 그보다 먼저 제사장과 레위인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냥 지나갔지만 사마리아인은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왜 다른 사람은 그냥 지나쳤는데 유독 사마리아인은 그를 돌보아주었을까요? 33절을 읽겠습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그것은 사마리아인에게 강도 만난 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이는 어려움을 당한 이웃을 도울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어려운 사람을 보면 불쌍히 여길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불쌍히 여기셨는지를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종종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종종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마치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만 달란트의 빚을 진자와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종이 임금과 결산할 때에 갚을 것이 없자 임금이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종이 엎드려 절하며 빌자 주인이 불쌍히 여겨 그 빚을 탕감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을 진 자를 만나자 그의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했습니다. 왜 일만 달란트나 되는 빚을 탕감 받은 자가 그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적은 금액인 일백 데나리온의 빚진 자를 불쌍히 여기지 못했을까요?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은 감격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일만 달란트가 지금 화폐가치로 따지면 얼마인지 아십니까? 1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노동자 하루 품삯을 100,00원으로 계산하면 한 달란트의 가치는 6억 원이고 일만 달란트는 6조원입니다. 이렇게 큰 빚을 주인에게 탕감 받았으니 얼마나 불쌍히 여김을 받은 것입니까? 그러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 불쌍히 여김을 받은 것을 잊고 자신이 받아야 할 것만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어떤 운명에 처해 있었습니까? 죄로 말미암아 고통가운데 살다가 죽은 후 심판을 받아 지옥에 던져져 영원히 고통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죄와 저주와 사망과 지옥의 법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주님께 이토록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웃들의 신음소리가 끊임없이 들리고 있습니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해 영적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사람은 물질과 건강이 있다고 행복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자들은 정말 불행한 자들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로, 가까이 다가가서 도와주어야 합니다. 34절-35절을 읽겠습니다.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가까이 가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만 가지지 않았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사마리아인에게서 이것을 배워야 합니다. 정말 거듭난 사람이라면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지만 그 다음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통을 당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만 갖지 말고 그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행동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가 주님의 삶에 감동을 받고 그렇게 살기로 결심했지만 그가 아프리카 대륙으로 가지 않았다면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실천적 신앙을 꿈꾸고 실행으로 옮겨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 이웃을 찾아가서 도울까요? 무엇보다도 복음을 들고 찾아가는 것입니다. 복음은 인생의 강도를 만난 사람들을 얼마든지 살려줄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너희는 가서 복음을 전하고 제자 삼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만 들고 찾아가면 안 됩니다.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병든 자를 고쳐주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웃을 찾아가서 도움을 줄 때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다시 34절-35절을 읽겠습니다.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본문에 등장하는 사마리아인을 보십시오. 그는 강도만난 사람의 상처만 일시적으로 치료해주지 않았습니다. 주막 주인에게 데리고 가서 두 데나리온을 주면서 치료를 부탁하고 비용이 더 들면 그것까지 부담하겠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지속적으로 실행해야 합니다. 행사로 하면 안 됩니다. 계속해서 관심을 갖고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웃 사랑을 행사로 하면 이웃을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가 꾸준히 사랑을 실천할 때에 한 영혼이라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를 하려면 이렇게 해야 합니다. 대상자를 정하고 집중적으로 관심을 갖고 돌아보아야 합니다.

    셋째로, 희생을 감수해야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사마리아인은 여행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강도 만난 자를 돕기 위해서 돈을 많이 썼고 그리고 그곳에서 하루를 머물었습니다. 그의 일정을 늦추었기 때문에 그에 따라는 손해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기꺼이 그렇게 했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희생과 사랑은 동의어입니다. 희생이 없이는 사랑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희생이 없는 사랑은 허공을 치는 말에 불과할 뿐입니다.
    일부 선진국에서 시행하고 있는 독특한 법 중에 ‘제노비스법’이 있습니다. 이 법은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조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외면할 경우 제 3자일지라도 처벌할 수 있도록 한 법으로서 ‘착한 사마리아인의 법’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런데 왜 ‘제노비스법’이 제정되었는지 아십니까? 1964년 3월 13일 뉴욕의 어느 밤거리에서 일어난 사건 때문입니다. 그날, 28세의 여성 ‘키티 제노비스’가 괴한의 칼에 찔려 살려달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동네 주민가운데 어느 누구 하나 신고를 하거나 돕지를 않아 범인은 다시 돌아와 그녀를 칼로 찌르고 강간까지 했습니다. 결국 그녀는 과다출혈로 사망하였고 범인은 범행 후 유유히 도망쳐버렸습니다. 뉴욕타임지가 38명의 목격자 중 어느 누구도 범행을 만류하거나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고 대서특필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어 결국 법으로까지 제정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위기에 처한 여성의 비명소리를 듣고서도 어느 누구하나 도움을 주지 않았을까요? 범인에게 보복을 당하거나, 경찰서에서 오라 가라 하는 귀찮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즉 희생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어떤 종류든 희생이 없이는 할 수 없습니다. 인도에 간 한 젊은 선교사가 마하트마 간디에게 “내가 어떻게 하면 인도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 때 간디는 대답하기를 “Be like Jesus!(예수님과 같이 되십시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예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신 희생적 사랑을 본받는 삶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강도를 만나서 영육으로 어렵게 살아가는 자들을 찾아가서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희생의 대가를 기꺼이 지불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기때문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주님께 한 것입니다. 한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진정한 이웃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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