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이 가장 지혜로운 자인가? 누가복음 21장 29-36절 20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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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가장 지혜로운 자인가? 누가복음 21장 29-36절 2018.4.82018-12-03T23:45:59+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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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본문은 ‘무화과나무의 비유’라고 불립니다. 여러분도 이 비유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를 말씀드리기 전, 먼저 무화과나무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화과(無花果)는 ‘꽃이 없는 열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흔히 사람들은 정말 꽃이 없이 열매가 열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꽃이 과실 안에서 피어 밖으로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무화과나무는 키가 3-4미터밖에 안 되는 키 작은 갈잎의 과일나무로서 일 년에 두 차례 열매를 맺는데 5-6월에 익는 겨울 무화과가 있고 8-9월에 익는 여름 무화과가 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쉽게 신구약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곳은 창세기 3장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먹고 눈이 밝아져 자신들이 벌거벗고 있다는 것을 알고서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했는데 그 나무가 무화과나무입니다. 또한 유대 민족의 번영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왕상 4:25; 미가; 사 36:16). 또한 약용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에 이사야 선지자가 무화과나무 반죽을 가져다가 상처 위에 놓자 고침을 받았습니다(왕하 20:7). 신약성경, 특히 사복음서도 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화과나무가 신약성경에서는 주로 긍정적인 상황보다는 부정적인 상황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듯이 성경은 예수께서 시장하셔서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잡수시려고 했는데 아무 것도 없자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고 하시는 순간 무화과나무가 말랐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마 21장, 막 11장, 눅 13장). 또 오늘 본문에도 종말의 심판을 말씀하신 것과 관련하여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 번 다시 29-31절을 읽습니다.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 알라.” 이 말씀은 한 마디로 무화과나무가 싹이 나면 여름이 가까운 줄로 알 수 있듯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징조들이 일어나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로 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무화과나무 비유를 어떻게 해석하는지 아십니까?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1948년 독립한 것을 싹이 난 것으로 해석하여 곧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이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무화과나무는 잎사귀와 열매가 거의 동시에 생기는 특이한 식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이렇게 해석하면 안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화과를 이스라엘의 국화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올리브입니다. 또한 마태와 마가복음에는 ‘무화과나무’만 나오지만 누가복음에는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무화과나무를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나무라고 생각하고 무화과나무의 싹이 난 것을 이스라엘의 독립으로 해석하여 곧 종말이 가까이 왔다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입니다. ‘무화과나무의 싹이 난 것을 보고 여름이 가까이 온 것을 아는 것’과 ‘예수께서 말씀하신 여러 징조들이 나타난 것을 보고 종말이 가까웠다는 것을 아는 것’은 별개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화과나무가 무엇을 비유하고 그 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해석하여 그것을 종말에 연관시키면 안 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31절입니다. 다시 읽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 알라.” 여기서 ‘이런 일’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할까요? 적그리스도의 출현, 이단의 발흥, 곳곳에서 전쟁의 발발, 난리의 소문, 기근과 지진의 발생 등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이런 징조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때부터 계속 있어 왔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지구의 종말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종말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갖는 자들이 많습니다. 혹자는 지구의 종말이 없다고 합니다. 그들은 종말을 단지 사람을 겁주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라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종말이 있겠지만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지구의 종말을 우주적인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또 혹자는 종말이 자신들이 주장하는 특정한 날에 임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자들을 ‘시한부 종말론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 알라.”(31절). 마태와 마가는 이를 다소 다르게 표현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마 24:33, 막 13:29). 무슨 말입니까? 이런 일이 일어나면 종말이 심히 가까이 온 줄로 알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종말의 징조로 말씀하신 것들을 보면 종말이 심히 가까이 온 줄로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면서 덧붙이신 것이 있습니다. 32-33절입니다. 함께 읽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이 세대’와 ‘모든 일’은 각각 무엇을 가리킬까요? ‘모든 일’은 종말에 나타날 우주적인 징조를 가리키는 데에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세대’를 어떤 의미로 말씀하셨는지 분명하지 않아 이에 대한 견해가 다릅니다. 혹자(Kummel)는 동 시대에 사는 사람으로 해석하여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으로 해석합니다. 혹자(Rengstorf)는 조상이 같은 민족으로 해석하여 유대 민족을 가리킨다고 주장합니다. 혹자(Klostermann)는 본서의 저자인 누가와 같은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 해석합니다. 혹자는(Ellis)는 예수께서 재림할 즈음에 살고 있는 마지막 세대로 해석합니다.
    그런데 저는 예수께서 어떤 특정 세대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세상의 종말이 매우 임박해 있음을 강조하시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일반적으로 ‘세대’를 ‘30년을 한 단위로 하는 연령층’으로 이해합니다. 영원한 시간의 관점에서 볼 때에 30년은 한 점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예수께서 말씀하신 종말의 징조들이 다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 날이 속히 임한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 징조로 볼 때에 세상의 종말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곧 오신다는 임박한 종말론적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임박한 종말론을 믿었기 때문에 세상에 한 눈 팔지 않고 오직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목숨을 걸고 복음 전도에 충성을 다한 것도 자신의 당대에 예수께서 다시 오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종말이 임박했기 때문에 예수께서 이를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함께 34-36절을 읽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첫째로, 스스로 조심해야 합니다. 다시 34절을 읽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예수께서 종말과 관련해서 스스로 조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조심해야 할지 구체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면 무엇을 조심해야 할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방탕하지 않도록, 술 취하지 않도록,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스스로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 ‘방탕’을 살펴보겠습니다. 방탕이란 ‘성적 쾌락, 노름 등에 과도하게 빠져 바르게 살지 못함’입니다. 성적 쾌락과 노름 등은 한번 빠져들면 헤어 나오기 힘들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또 ‘술 취함’입니다. 술을 마시다보면 절제하기가 힘듭니다. 혹자는 소주는 2잔까지, 맥주는 1명까지는 죄가 안 된다고 말하지만 그 선을 지킨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식사 때나 취침 전에 술을 조금씩 마시다가 알코올 중독자가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인 것입니다. ‘생활의 염려’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염려를 달고 삽니다. 혹자는 어느 정도의 염려는 긴장을 조성하고 정신건강에 좋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건강에 좋을 정도까지만 염려한다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방탕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해지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면 마음이 둔하여지고 그 날이 덫과 같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덫’은 함정이나 올가미를 뜻하기 때문에 방탕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해지면 마치 덫에 걸린 짐승처럼 꼼짝 못하고 멸망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기도하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36절입니다.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여기 ‘인자 앞에 서도록’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주님 앞에 서서 심판받을 것을 대비하여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서서 심판을 받아야 하기에 그 날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를 새롭게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일반적으로 각종 문제를 해결하는 무기 정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단지 현실의 문제만 해결하는 무기가 아리라 종말에 미칠 각종 재앙을 피하는 무기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받고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고 상을 받아야 합니다.
    이토록 깨어 있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예수께서 구체적인 예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마태복음 25장에는 나오는 열처녀 비유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열 처녀 모두 등을 들고서 신랑을 맞으러 나갔습니다. 그런데 미련한 다섯 처녀는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을 준비하지 않고 등만 가지고 나갔고,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등과 함께 기름을 별도로 그릇에 담아 준비했습니다.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곧 신랑이 온다고 하자, 열 처녀들이 다 그를 일어나 맞으러 나갔습니다. 그런데 미련한 자들의 등에는 기름이 부족하여 등불이 꺼져가자 슬기 있는 자들에게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고 했지만 거절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하는 수 없이 기름을 사러 갔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에 신랑이 왔기 때문에 미련한 자들은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무엇을 교훈하시기 위해 이 비유를 말씀하셨을까요? 마지막 때가 언제 인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깨어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랑이 더디 올지라도 끝까지 기다리는 자라야 신랑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한밤중에 신랑이 닥쳤듯이 주님의 재림은 우리가 뜻하지 않은 순간에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며 깨어 마지막을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신랑이 늦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기름을 별도로 준비한 다섯 처녀를 슬기롭다고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잠시 사는 이 세상에서 약삭빠르게 행동하는 자들이 슬기로운 자가 아니라, 주님의 재림의 약속을 믿고 깨어 기다리는 자가 슬기로운 자입니다.
    옛날 어느 궁궐에 임금의 말상대 역할을 하는 현자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왕이 그에게 자신이 쓰던 지팡이를 건네면서, 일주일 후에 모든 신하들을 불러 모을 테니 그들 가운데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을 찾아서 이 지팡이를 주면 내가 그를 죽음에 처하도록 하겠다고 했습니다. 현자는 대상자를 찾기 위해 부지런히 다녔습니다. 한 주 후, 모든 신하들이 왕 앞에 다 모였습니다. 현자가 지팡이를 들고서 왕 앞에 서자 신하들은 혹 그 지팡이를 자신에게 주지 않을까 하여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현자는 왕 앞에 큰 절을 올린 후 그 지팡이를 왕에게 도로 드렸습니다. 그러자 왕이 대발노발하며 현자에게 말했습니다. “이 지팡이를 가장 어리석은 사람에게 주라고 했더니 왜 다시 나에게 주느냐?” 그러자 현자는 왕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왕이시여, 제가 이 왕궁 안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을 찾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 결과 저는 왕께서 가장 어리석은 자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자 왕은 “무슨 근거로 내가 가장 어리석다고 판단했느냐? 만일 네 판단이 터무니없다면 네 놈의 목을 벨 것이다.” 현자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왕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왕이시여, 이곳에 모인 모든 신하들은 오늘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 주간 동안 준비하다가 이곳에 모였지만, 오직 왕께서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이 자리에 참석하셨기에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을 준비하지 않고 사는 자가 가장 어리석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가장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전혀 죽음을 준비하지 않는 자입니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 죽음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겨우살이는 준비를 하면서도 죽음은 준비하지 않는다.” 우리는 죽은 후 주님 앞에 서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날이 언제인지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죽음을 준비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기도로 깨어 죽음을 준비하는 자에게 그 날은 축복의 날이지만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저주의 날이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예수께서 종말과 관련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예수께서 이미 두 차례에 걸쳐 종말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또 예수께서 종말에 대해 말씀하신 것일까요? 그날이 마지막 심판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종말은 단지 역사의 끝이 아닙니다. 그날은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이 세상을 마지막으로 심판하시는 날입니다. 그리고 그 심판으로 우리의 인생이 영원히 결정됩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순간에 불과하지만 심판 후 전개되는 삶은 영원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종말을 어떻게 맞이하느냐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깨어 기도하므로 그 날을 맞이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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