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그리스도를 믿고 어떻게 그리스도를 따르지? 누가복음 9장 18-27절 2016.6.12

//어떤 그리스도를 믿고 어떻게 그리스도를 따르지? 누가복음 9장 18-27절 2016.6.12
어떤 그리스도를 믿고 어떻게 그리스도를 따르지? 누가복음 9장 18-27절 2016.6.122018-12-03T23:08:20+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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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읽은 본문은 우리가 대부분 달가워하지 않는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생각과 뜻대로 살고 싶은데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으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말씀을 사랑해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서는 결코 주님을 온전히 따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온전히 따르지 않으면 마지막 날에 받을 상급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에 이르렀을 때에 제자들에게 “무리가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헤롯 대왕의 둘째 아들 빌립 왕이 도시를 개발해서 로마 황제의 이름 ‘가이사랴’를 붙이고 자기의 이름 빌립을 붙여서 만든 일종의 기획도시입니다. 그러나 지명에 황제 이름이 붙여지려면 이에 걸 맞는 건물들이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규모가 큰 경기장이나 화려한 신전 등이 있어야 합니다. 당시 가이사랴 빌립보에는 이방신 PAN을 위한 신전이 있었습니다. 이 신은 희랍 신화에 나오는 산과 들의 신으로 염소 뿔과 다리를 가졌고 피리를 부는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렇게 화려한 이방신전이 있는 곳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질문을 던지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왜 이런 배경으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물으셨을까요? 그것은 겉으로 화려하게 보이는 이방신전의 신은 가짜고, 그들의 눈에 볼품없이 보이는 자신이 진짜 신이라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눈에 대단하게 보이는 것들은 진짜가 아니라 가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화려하게 보이는 그 어떤 것으로 주님을 대신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 마귀에게 세 가지 시험을 받으신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시험받으신 내용이 무엇입니까? 마귀가 지극히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예수님께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이며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한 것입니다. 세상의 화려함과 영광을 보여주고 그것을 경배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시험을 단호히 물리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 4:10).
    사실 신앙생활은 날마다 이것과의 싸움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명예, 권세, 부귀와의 싸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세상의 화려함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주님 한 분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주님 한분으로 만족이 없다면 아직도 그 사람은 주님을 만나지 못했거나 영적으로 영유아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처럼 고백해야 합니다.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시 16:2).

    예수께서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고 물으시자 제자들이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19절입니다. “대답하여 가로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하나가 살아났다 하나이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처럼 세례요한이나 엘리야냐 옛 선지자중의 하나로 생각한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세례요한이나 엘리야나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가졌던 특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세례요한이라고 한 것은 예수께서 세례요한처럼 악을 행하는 자들을 책망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엘리야라고 한 것은 예수께서 엘리야처럼 여러 가지 능력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선지자중의 하나라고 생각한 것은 예수께서 선지자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곧바로 또 제자들에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러자 베드로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 즉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런 고백을 들으시고 어떤 반응을 보이셨습니까? 전혀 뜻밖의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21절을 읽습니다. “경계하사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명하시고” 사실 예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신 것은 이 고백을 너무 듣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마태복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하자 너무 기쁘셔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내가 네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아무에게도 전하지 말라고 명하셨을까요? 일반적으로는 예수께서 그리스도로 널리 알려지면 로마제국에서 예수님을 곧바로 잡아 죽이므로 메시아적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실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저 역시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말씀을 준비하면서 전후 문맥을 자세히 살펴보던 중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21-2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경고하사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명하시고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 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예수께서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 일에 살아나야 하리라”(22절).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자신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말하지 말라는 것과 자신이 죽임을 당하고 제삼 일에 살아나는 것이 상관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 대망 사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다윗과 같은 메시아가 나타나서 로마제국의 억압가운데 있는 자신들을 구원해주실 것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그토록 따라 다녔던 것도 바로 이런 기대를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고, 각종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등 각종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을 다윗과 같은 정치적인 메시아로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메시아로만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이 보다 더 우선적인 목적을 갖고 계셨습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말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자신이 고난받는 메시아인데 정치적인 메시아로 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정치적인 메시아로 잘못 전해질 것을 우려하여 아무에게도 그리스도라고 전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과연 어떤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즉 예수께서 고난받는 메시아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에게 고난받는 메시아를 전해서 그들도 구원을 받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대부분이 예수님을 믿으면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잘 산다는 성공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주의 은혜로 이 세상에서도 성공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는 것보다 세상의 성공을 앞세워서 복음을 증거해서는 안 됩니다. 번영신학과 성공복음은 주님께서 전하라고 가르쳐주신 복음이 아닙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만이 복음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고난받는 메시아보다 정치적인 메시아를 앞세우고 있다면 이미 복음의 자리에서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는 마귀의 유혹에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마귀의 유혹에 넘어갔다는 것은 신앙의 방향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방향이 잘못 되었는데 아무리 열심히 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과연 그 열심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께서 장차 자신이 고난당하시고 죽으실 것을 말씀하면서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제삼 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예수께서는 자신이 죽을 것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제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도 말씀하셨습니다. 왜 예수께서 자신이 죽을 것만 말씀하시지 않고 다시 살아나실 것도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자신이 정치적인 메시아가 아니라 죄 문제를 해결하는 고난받는 메시아이심을 증명해보이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죽은 자는 스스로 살아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자신이 죽지만 다시 살아난다고 말씀하신 대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신 것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다고 말씀하셨어도 만일 살아나시지 않았다면 그분 자신의 죄를 위하여 돌아가신 것이지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가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되실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이심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복음을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날마다 집에 있든지 성전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고 전했던 것은 예수께서 자신들의 죄를 해결해주신 메시아이심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주신 그리스도로 믿고 구원을 받았다면 누구를 만나든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복음을 누구에게 먼저 전해야 하는지 아십니까? 구원받은 자신입니다. 나에게 복음을 먼저 전해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해져서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이 비밀을 알았기 때문에 사도들이 날마다 집에 있든지 성전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고 전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집은 가정교회를 말합니다. 즉 가정교회와 성전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자신이 죽지만 곧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것이 있습니다. 23절입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성경은 예수께서 이 말씀을 누구에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무리들’입니다. 그런데 정말 예수께서 ‘무리들에게’ 이것을 요구하셨을까요?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은 자신을 부정하라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자기 자신을 없는 자로 취급하라는 것입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것은 주님을 따르는 데 소용되는 대가를 지불하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을 따르는 과정에서 요구되어지는 희생을 치루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무리들에게 이런 것을 요구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의문을 가지고 이와 동일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살펴보았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이것을 말씀하신 대상을 ‘제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마 17:24). 그리고 마가복음에서는 ‘무리와 제자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막 8:34). 상이점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들도 곁에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을 ‘무리로’만 번역한 것은 오역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으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구원받은 자들의 삶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즉 참 제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지만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왜 그렇게 살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고난받는 메시아보다는 정치적인 메시아로 믿고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만 주님께 가까이 하지, 자신의 죄를 해결해주신 진짜 주인이신 예수께서 자신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에 대한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은 결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아갈 수 없습니다. 날마다 자신을 죄에서 구원해주신 것에 감사해서 주님을 찾는 자만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건져주셨을 뿐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예수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으라고 하시면서 또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24-26절을 읽겠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이 말씀은 23절 말씀에 대한 보충설명으로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로, 주를 위해 목숨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누가복음 9장 24절을 읽겠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이 말씀은 자기 목숨을 위해 살면 죽지만 주님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리면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기 전에는 자기를 위해 살았지만 이제는 주님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자들이기 때문에 자기의 목숨을 위해 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 우리가 이미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육신을 위해 살면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실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비천한 저와 여러분을 위해 목숨을 내어주셨듯이 우리도 주님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어드려야 합니다. 이런 은혜를 받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로, 범사에 주님을 시인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9장 26절을 읽겠습니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이 말씀은 한마디로 주님을 따르는 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주님으로 시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평적인 관계에 있는 경우에는 이 말씀을 지키는 것이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수직 관계, 즉 갑을 관계에 있는 경우는 쉬운 것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을 주로 시인할 경우 죽임을 당하는 상황에서는 더욱 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말씀을 어떤 상황을 염두에 두시고 말씀하셨는지 아십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목숨을 잃게 될 것을 염두에 두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을 부끄러워하거나 숨기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면 죽는다 할지라도 예수님을 주로 시인해야 합니다. 자신의 진짜 주인이 주님이신 것을 숨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주님께서도 우리를 부끄러워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얻은 구원은 시시한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과는 바꿀 수 없는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시인해야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면 로마제국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유대교에서 출교를 당하는 상황에서도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구원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순교자적 삶을 살아갔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자의 삶의 방식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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