얍복나루에서 기도의 진수를 배우다 창 32:24-32 2014.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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얍복나루에서 기도의 진수를 배우다 창 32:24-32 2014.11.162018-12-03T22:35:15+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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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지난 주 요셉의 인생을 하나님의 섭리라는 칼로 해부해보았습니다. 크게 네 가지 질문을 던지고 답을 얻었습니다.
    첫째로, 왜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는데 요셉이 형들에게 구덩이에 던져지고, 애굽에 팔려가서 종살이를 하고, 억울하게 누명을 써서 옥살이를 할 때에 가만히 계셨느냐는 것입니다. 본문은 요셉이 고난 당할 때에 왜 하나님께서 침묵하셨는지에 대해 말씀하지 않고 있지만 시편 105편 17-19절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요셉을 단련하시기 위해서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지만 고난당할 때 침묵하시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따라서 뜻하지 않은 고난을 당할 때에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거나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는데 왜 도와주시지 않느냐고 원망과 불평하지 말고 오히려 연단을 통해서 정금같이 나오게 될 것을 믿고 감사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연단을 받을 때에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것은 연단의 기간이 정해 있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꿈을 꾼 시기는 17세이고 그의 꿈을 이룬 시기는 30세였습니다. 즉 요셉이 연단을 받은 기간은 13년이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된 후 110세 죽었기 때문에 80년간 애굽의 총리의 영광을 누렸습니다. 단지 13년 동안 연단 받고 80년을 애굽의 총리로 살았던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는 기간이 영광을 누리는 기간보다 훨씬 짧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요셉을 연단하신 내용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연단하신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인생의 주인이심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주인이라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생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원치 않는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자신이 원치 않게 형들에게 팔리고 억울하게 옥살이 하는 과정을 통하여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 아님을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생의 주인이 자신이 아니고 하나님이심을 깨달아도 좀처럼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지 않습니다. 고난이 지나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신을 주인으로 착각하고 자기 생각대로 인생을 계획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한두 번 고난을 당하지 않게 하시고 오랜 동안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고난 당하는 것과 하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은 비례합니다. 고난을 크게 당하면 당할수록 인생의 주인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뼛속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400년 동안이나 애굽에서 종살이 하게 하셨던 것은 그렇게 오랜 동안 연단 받지 않으면 오직 하나님만이 그들의 주인이심을 깨달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오랜 동안 원치 않는 종살이를 하면서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알았기에 오랫동안 나라를 잃고 고난을 당했어도 지금까지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요셉이 연단을 받을 때에 그가 한 일이 무엇인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종살이 할 때는 가정 총무가 되어 그 집의 모든 소유를 주관하였고 옥살이를 할 때는 옥중 총무가 되어 감옥의 제반 사무를 주관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가정 총무가 되게 하시고 옥중 총무가 되게 하신 것은 장차 애굽의 총리로서 해야 할 일을 준비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을 당하는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꿈을 이루시기 위해 그릇을 준비하시는 때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준비한 만큼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의 인물이나 세속사의 인물이나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연단 없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연단 받을 때에 시간을 대충 대충 보내면 안 됩니다. 연단 과정에서 얼마나 성실하게 훈련을 받느냐가 우리의 미래를 결정짓는 것입니다. 연단과정에서 요셉처럼 준비를 잘하여 하나님께 온전히 쓰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은 형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형통은 모든 일이 아무런 어려움 없이 잘 되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형통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형통은 무엇일까요? 창세기 39장 3절과 창세기 39장 23절을 읽으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두 본문을 통하여 ‘형통’과 ‘임마누엘’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성경에서 말하는 형통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으면 세상에서 아무리 잘 되도 그것은 형통이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에게 최고의 복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보다 인간에게 더 큰 복은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시 73:28)고 말한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므로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 아무런 존재 의미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야곱이 얍복나루터에서 하나님을 새롭게 만난 과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야곱은 형 에서에게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가로채고(창 25:29~34),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일로 야곱은 형 에서의 분노를 사게 되었고 하란으로 도망을 합니다. 밧단 아람에서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긴 세월 봉사하고 외삼촌의 두 딸 레아와 라헬과 결혼하여 두 아내와 여종인 실바와 빌하를 통하여 열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습니다(창 29~31장). 그러나 야곱이 그곳에서 많은 재물의 축복을 받아 번성하자 외삼촌과 그의 아들들이 그를 시기하므로 그들의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시자 그는 즉시 고향 길에 오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형 에서가 자기를 죽이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야곱이 얍복 나루터에서 밤을 지새며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꿔주심으로 그의 운명을 바꿔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는 우리의 궁금증을 불러오는 요소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 답을 하는 형식으로 본문을 통해서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 야곱이 홀로 남았을 때에 어떤 사람과 씨름했다는 것이 무슨 의미냐는 것입니다.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 사람을 보내 형이 자신에게 대하여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 알아봅니다. 그런데 형이 400명의 군사를 데리고 온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러자 불안한 마음이 그를 짓누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는 동행자와 양과 소와 낙타 등을 여러 떼로 나누고 앞의 떼를 치면 도망할 계획을 세웁니다. 그래도 불안하자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합니다(창 32:9-12). 그래도 여전히 불안하자 또 다른 전략을 세웁니다. 형에게 암염소, 숫염소, 암양, 숫양, 암소, 황소, 낙타, 암나귀 등 약 530여 마리를 택하여 예물로 보냅니다. 그리고 야곱은 모든 소유와 가족들을 건너한 후 홀로 얍복강 이편에 남았습니다. 왜 야곱이 홀로 남았을까요? 혹자는 형 에서가 앞에 있는 가족과 가축들을 치면 혼자만 살기 위해 도망을 하려고 홀로 남았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야곱이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행동을 보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이와는 전혀 다른 의견을 내놓는 자들도 있습니다. 장로교 창시자이며 개혁주의 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존 칼빈은 야곱이 홀로 남은 것은 앞서 간 종들이 화를 입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달아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도하기에 알맞은 한적한 곳을 택하기 위해서였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 주석가 김응조 목사는 온전히 기도에 몰입하기 위해서 기도에 방해가 되는 처자식을 먼저 보내고 홀로 남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과거에 전자의 견해를 따랐습니다. 즉 에서가 가족을 치면 혼자서 살아남기 위해 도망을 하려고 홀로 남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설교를 준비하면서 후자의 견해로 바뀌었습니다. 왜 저의 생각이 바뀌었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야곱의 기도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을 새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형 에서 문제로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다른 한쪽으로는 자신의 꾀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얍복나루터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완전히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께만 매달려 간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야곱은 오직 하나님께 매어달려 기도하기 위해 홀로 남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홀로 남았을 때에 무엇을 하십니까? 여전히 자신의 생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머리를 싸매고 이 궁리 저 궁리하고 있지 않습니까? 홀로 남았을 때는 하나님과 일대일로 마주 하는 때입니다. 하나님만 붙잡고 매달릴 때입니다. 어차피 인간은 하나님 앞에 일대일로 서야 합니다. 혹 아직도 자신에게 남아있는 것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모든 것을 잃기 전, 홀로 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매어달려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야곱이 씨름을 했다고 하는데 왜 기도를 했다고 말하고 있을까요? 제가 성경을 해석할 때에 가장 기본적으로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까?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따라서 야곱이 씨름한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려면 성경의 다른 곳에서 이것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야곱이 어떤 사람과 씨름한 것을 하나님께 기도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함께 호세아 12장 3-4절을 읽겠습니다. “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되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여기서 야곱이 하나님과 겨루되 천사와 겨루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난 자와 씨름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울며 간구했다는 것은 하나님께 울며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을 때에 씨름하듯이 하나님께 매어달려 기도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왜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셨느냐는 것입니다. 요즘은 씨름이 별로 인기가 없지만, 80년대는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씨름을 떠오르면 천하장사로 등극한 이만기나 이봉걸 선수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씨름 경기에 대해 아시겠지만 오직 힘과 기술로 먼저 상대방의 무릎을 꿇게 하는 자가 이깁니다. 그 어떤 것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얍복나루터에서 야곱과 씨름할 때 이기지 못하는 것을 알고서는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쳤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천사를 가리킵니다. 과거에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하던 중 어느 학생이 “하나님께서 허벅지 관절을 치신 것은 반칙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반칙을 하시면 됩니까?”라고 질문하는 것을 듣고 웃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는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셨을까요? 이것의 의미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허벅지 관절의 기능에 대해 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허벅지 관절의 근육은 인체에서 가장 강한 부분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강한지 심지어 달리는 말도 사람의 허벅지 근육을 망가뜨리지 못할 정도라고 합니다. 구약시대 사람들은 이 부분에 손을 얹고 서약했으며 병사들은 이 부분에 칼을 차기도 했기 때문에 개역판 성경에는 ‘환도뼈’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허벅지 관절을 쳐서 어긋나게 하셨다는 것은 자신이 가장 힘으로 삼고 있는 것을 내려놓으라는 뜻입니다. 즉 우리가 의지하는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야곱이 어떻게 살았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자신의 힘과 능력만 믿고 살았습니다. 속이고 빼앗는 자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그렇게 살지 말라는 의미로 하나님께서 허벅지 관절을 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어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신을 의지하는 것과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반비례합니다. 하나님을 10% 의지하면 하나님께서는 10%만 책임져 주시고, 50% 의지하면 50%를 책임져 주시고, 100% 의지하면 100%를 책임져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허벅지 관절을 치시기 전, 우리가 힘으로 삼고 있는 것들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셋째로, 어떻게 야곱의 기도가 얍복나루터에서 바뀌게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야곱의 기도가 얍복나루터에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허벅지 관절이 어긋나기 전에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즉 한쪽은 하나님, 다른 한쪽은 자기 자신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나 어긋한 후 무게 중심이 완전히 하나님 쪽으로 기울어졌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실을 26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한 번 같이 읽겠습니다.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모든 복이 오직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고백입니다. 즉 자신이 형에게 죽임을 당하든지 살든지, 부자가 되든지 가난하게 되든지, 오래 살고 빨리 죽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지 않으면 자신의 목숨도, 자신이 지금까지 힘들게 쌓은 재산도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야곱이 이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온전히 하나님께만 매달려 간구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나님만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시 127:1-2). 또한 요한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요 3:27). 우리가 성공하기 위해 열심히 수고해야 하지만 정말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인생에서 성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성공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자신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온전히 깨달아야 하나님께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히 매달려야 할까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주님의 뜻대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해야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통하여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셔서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아시고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게 하소서”라고 간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의 무게 중심이 자신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자신의 생각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우선적으로 생각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새도록 땀이 피방울처럼 뚝뚝 떨어질 정도로 열심히 기도하셨어도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생각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셨다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지만 종종 시험에 드는 이유는 기도의 무게 중심이 여전히 자기 쪽으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무게 중심이 하나님 쪽으로 기울어져 있으면 자신이 소원하는 일이 빨리 이루어지지 않아도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이 자신의 뜻대로 되는 것보다 훨씬 좋기 때문입니다. 야곱처럼 기도의 전환점을 맞이함으로 기도의 무게 중심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옮겨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넷째로, 왜 야곱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개명으로 응답하셨느냐는 것입니다. 야곱은 허벅지 관절이 어긋났지만 날이 새도록 붙잡고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26절)라고 매달리며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이에 “야곱이니다”라고 대답하자, 하나님께서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알다시피 야곱이 얍복나루터에서 기도한 것은 형 에서가 자신을 죽이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따라서 스토리 전개상으로 하나님께서 야곱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에게 “너희 형 에서의 마음을 바꾸어 너를 돕는 자가 되게 해주겠다”라고 하셨어야 합니다. 그러나 야곱이 밤새도록 기도하고 응답 받은 것은 그의 이름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꿔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죽음 앞에서 목숨 걸고 기도한 야곱에게 그의 이름을 바꿔주신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야곱(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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