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뿌리는 비유를 통하여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눅8:4-15 2016.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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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뿌리는 비유를 통하여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눅8:4-15 2016.3.202018-12-03T23:04:30+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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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소위 씨 뿌리는 비유입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는 네 종류의 밭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길가, 바위 위, 가시떨기 위, 좋은 땅입니다. 씨앗은 같지만 그 씨앗이 어디에 떨어지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열매를 맺게 됩니다. 저는 이 비유를 통하여 또 다른 은혜를 받기 위하여 세 가지 질문을 던지고 이에 답하는 형식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먼저, 왜 예수께서 이 말씀을 비유로 하셨느냐는 것입니다. 4절과 9절을 읽겠습니다.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니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4절).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9절) 우리가 알 수 있듯이 예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얼마든지 직설법으로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비유로 말씀하셨을까요? 성경은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10절입니다.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본문은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를 제자들은 알게 하게 하고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러 오셨는데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깨닫지 못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의도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말씀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전후 문맥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이 비유를 누구를 향하여 말씀하셨다고 소개하고 있습니까? 4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니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 즉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무리들을 대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신 대상은 누구였습니까? 9절에 있듯이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예수께서 이 비유를 무리를 대상으로 말씀하셨는데 그 뜻을 제자들에게만 가르쳐주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9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 즉 예수께서는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셨지만 동네 사람들은 그 뜻을 묻지 않았고 제자들은 물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려고 하는 자들에게만 자신의 말씀을 깨닫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주님께서 의도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선택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 없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들어도 알 수 없는 비밀로 남아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10절을 해석할 때에 예수께서 왜 비유로 말씀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갖고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노력하게 하기 위해서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자신을 다양한 방법으로 계시하셨습니다. 자연을 통한 일반계시 외에 여러 모양으로 인간역사 안에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각종 이적이나 기적 등 초자연적 역사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셨고 마지막 때에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하나님을 완전히 보이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최종적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신 큰일과 말씀들을 영감으로 기록하게 하셔서 성경계시를 완성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예수께서 자신의 이야기를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비유로 말씀하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물론 장애를 입고 태어나는 분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귀를 가지고 있고 귀가 있으면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주님께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귀를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이 하는 말만 들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하면 주변에서 무슨 소리를 해도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태도를 바꿔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말고 그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비밀로 남아있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말씀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도 베뢰아 성도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해야 합니다(행 17:11).
    저는 이번에 말씀을 준비하던 중 갑자기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과연 나는 주님의 말씀을 잘 들으려고 하는가?”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큐티를 하는 것은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제가 매일 큐티를 보내면서 저도 모르게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큐티를 하기 보다는 큐티를 잘 전하기 위해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즉 어떻게 하면 주님의 음성을 정확히 들을까에 관심을 쏟지 않고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칠까를 생각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준비하던 중 잠시 멈추고 주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큐티를 나누는 것보다 먼저 주님께서 주시는 음성을 온전히 듣게 해주세요.”

    둘째로, 씨가 떨어지는 네 종류의 밭은 이미 확정된 것이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펴본 대로 씨가 떨어진 땅은 네 곳입니다. 첫째는 길가, 둘째는 바위 위, 셋째는 가시 떨기 속, 넷째는 좋은 땅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네 밭 중 어떤 밭일까? 여러분은 어떤 밭에 속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길가, 바위 위, 가시떨기 속, 좋은 땅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나 씨가 떨어진 밭이 개인적으로 이미 고정된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즉 어떤 사람은 길가이고, 어떤 사람은 바위 위고, 어떤 사람은 가시떨기속이고, 어떤 사람은 좋은 땅이 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것은 네 밭이 각 사람 안에 공존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어떤 경우는 길가와 같이 반응하고, 어떤 경우에는 바위 위와 같이 반응하고, 어떤 경우에는 가시 떨기 속과 같이 반응왜 그럴까요? 이런 반응이 각 사람에게 분리되어 나타나지 않고 한 사람 안에서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비유를 들으면서 지금 자신의 마음 밭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살펴보고 열매를 맺는 좋은 땅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혹 길가에 떨어진 씨앗 같지는 않은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미 우리는 말씀을 듣고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길가에 떨어진 씨앗 비유는 우리와 무관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미 구원받았을지라도 말씀을 사모하지 않고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굳어져서 말씀을 들어도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호 10:12)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바위 위에 떨어진 씨앗 같지는 않은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씨가 바위 위에 뿌려진 것은 말씀의 뿌리가 없어서 시련을 당할 때에 주님을 배반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지만 바위 덩어리처럼 마음이 단단하면 뿌리를 내리지 못해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씨가 바위 위에 떨어진 자와 같이 생활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예수를 믿으면 복 받고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산다고 해서 믿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영적으로 어렸을 때는 이렇게 한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혹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면 범사에 형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성경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사신 분이 어디 있고 사도 바울처럼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한 자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은 우리가 상상치 못할 정도로 고난을 당하고 육신적으로 힘든 삶을 살아갔습니다. 여기서 잠시 ‘배반이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배반은 종말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속에서 자주 일어나는 것입니다. 상황에 따라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은 배반입니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될 것 같자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것이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우리가 이런저런 이유로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은 바로 우리가 주님을 배반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셋째로, 가시떨기 속에 떨어진 씨앗 같지는 않은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팔레스타인의 가시떨기는 매우 강력해서 2미터가 넘도록 자랍니다. 그리고 땅의 양분을 뺏을 뿐 아니라 그 가시떨기가 기운을 막아 다른 것들이 결실을 맺지 못하도록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세상의 염려와 재물을 인하여 염려하고 세상 향락에 빠지면 말씀의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상태에 있을 것입니다. 대부분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알고 죽으면 천국에 간다는 것도 알지만 이 세상에 대한 염려와 재물에 대한 욕심, 정욕대로 살아가기 때문에 말씀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주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말씀을 듣지만 말고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힘쓰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주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고 매일 큐티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들은 말씀을 우리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씨 뿌리는 비유는 그 방법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15절을 읽겠습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말씀을 듣고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착하고 좋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선을 추구하고 도덕적으로 건전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착하고 악하다’는 개념은 윤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나는 것입니다. 즉 좋은 경우는 선한 것이고 나쁜 경우는 악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살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의 말씀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둘째로 ‘지켜야’ 합니다. 영어 성경 NIV는 ‘지킨다’를 계속적으로 유지하다는 뜻의 ‘retain’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ASV와 RSV는 그와 다르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두 번역본은 모두 ‘hold it fast’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fast는 ‘빠른, 빠르게’이라는 뜻도 갖고 있지만, 본문에서는 ‘단단히, 굳게’ 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좋습니다. 즉 들은 말씀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그것을 굳게 붙잡지 않으면 말씀대로 살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들은 말씀을 반복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반복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묵상이라고 합니다. 즉 우리가 들을 말씀을 묵상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지 않고 내 안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었던 것은 예수께서 그리스도라고 날마다 가르치고 전했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전하고 가르쳤다는 것은 즉 반복했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인내해야 합니다. 농부는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이 되기까지 기다립니다. 하우스 재배나 이모작인 경우는 씨를 뿌리고 수확하는 기간의 공백이 일반적인 농사에 비해 짧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농사를 하는 경우도 씨를 뿌린 후 자라서 수확을 할 때까지는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동일합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말씀의 씨를 뿌린 후 일정한 기간이 필요합니다. 어떤 말씀은 하루 만에 이뤄지기도 하고 1달 만에 이뤄지기도 하고 1년 만에 이뤄지기도 하지만 어떤 말씀은 10년, 아니 평생 걸리기도 합니다. 따라서 말씀을 듣고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인내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인내는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농부가 씨앗을 뿌린 후 수확하기 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뜨거운 여름 햇빛을 견뎌야 하고 재정의 궁핍을 이겨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의 열매를 맺을 때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인내해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지만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마치 음식을 먹지만 설사하는 것과 같습니다. 음식을 먹지만 설사를 하면 단지 설사하는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우리의 건강에 해를 끼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단지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이 땅에 풍성한 삶을 살지 못하고 마지막 심판 날에는 도리어 심판하는 칼로 돌아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먼저 말씀을 맡았지만 말씀대로 살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을 비판하고 정죄하자 주님께는 그들에게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자여”라는 책망하셨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자유롭게 들을 수 있는 것은 정말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들은 말씀이 우리의 영혼의 양식이 되게 하고 그 말씀이 우리의 삶을 바꾸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들을 뿐 아니라 굳게 붙잡고 끝까지 인내하여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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